믿음과 헌신과 신탁 그리고 고침받는 은혜

 

 

수술을 앞둔 어떤 환자가 의사에게 수술 날자를 잡기를 꺼려하면서 의사를 믿는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만약 의사를 믿고 의술을 믿는다면 선뜻 수술 날짜를 잡고 입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헌신은 몸을 드리는 것이다. 신탁은 믿고 맡긴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의사이신 주님과 끊임없는 영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헌신이 필요하고 신탁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몸을 드리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며 주님께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구원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믿노라하면서도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맡기지 못하는 것은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맡기는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드리는 헌신하는 믿음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요 의심하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찬송할 때마다 믿음을 말하고 기도할 때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예배 때마다 성도와의 대화 때마다 믿음을 피력하고 믿음을 희망하는 말들을 하면서 실제로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헌신에 실패하고 신탁에 실패하기 때문이라는 중대한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믿음이 없이는 헌신이 안 된다. 헌신이 없이는 신탁이 되지를 않는다. 신탁이 없이는 주님이 손도 대지 못하는 인생을 살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는 한 고침을 받을 수가 없다. 단 하루도 한 시간도 고침을 받지 못하면 이전과 같이 실수하고 어리석고 죄를 짓는 삶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은 여인과 같이 피를 흘리듯이 죄를 흘리면서 살 수밖에 없으며 죄를 지을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낙심이 되고 절망과 좌절에 사로잡히는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하다.

 

그냥 믿음이 아니라 생각만하고 말만하는 믿음이 아니라 헌신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헌신에서 지나서 신탁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날마다 드려야지 드려야지 하면서 생각만하지 실제로 드리지 못하고 사는 안타까운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께 드리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드려야지 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살다가 끝내 드리지 못하고 신탁되지 못한 삶을 살고 고쳐지지 못하는 인생을 끝내면서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날마다 실제로 주님의 제단위에 산제사로 자기를 드리는 실행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실행하는 믿음이 믿음이지 실행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헌신을 실행하고 신탁을 실행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말이다.

실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 믿음이 아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러므로 헌신이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신탁이 되지 않는 믿음은 마음에나 있는 믿음이요 생각에나 있는 헌신이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에서 솟는 것도 아니다.

죄인으로 있을 때부터 우리의 마음은 부패한 것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잘못된 증거는 자기가 헌신을 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신을 하고 신탁을 하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을 한다. 헌신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자신의 결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하고 싶으면 안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사람들은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내 마음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저녁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 기분에 달려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면 참석을 하고 기분에 안내키면 참석을 하지 않는다. 수요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일이 바쁘면 참석하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여기기를 비오는 날에 차를 몰고 가다가 아스팔트길위에 개구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쉽게 넘기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도 주님의 뜻이나 믿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나의 형편과 사정이 더 중요하며 그것을 앞세워놓고 고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더 무서운 것은 참석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무의미한 종교적인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을 하고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부흥회를 한다거나 성경공부를 하는 일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나 듣는 자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혹시 전할말씀을 못다 전할까 하는 두려움과 들어야 하는 말씀을 빼놓을까하는 두려워하는 마음 듣는 자나 전하는 자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한 가운데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여름행사가 가까이 왔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여름행사를 참석하고 어떤 이들은 일생이 변화되는 은혜를 받았으나 어떤 이들은 변화되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이는 한번만 참석을 하고도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나 어떤 이는 거듭 참석을 하면서도 자극은 받으나 변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다름 아닌 헌신과 신탁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자기의 뜻을 따라서 참석을 하는 사람이나 남들의 권유에 의해 억지로 참석을 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와 목숨을 걸고 우악스러운 사람들을 헤치고 군종 속에서 주님의 옷자락을 뒤로 만진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은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참석하지 않으면 고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에 은혜는 틀림없이 받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주님이 사랑으로 부르시고 은혜로 살려주시고 고쳐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헌신하고 신탁하는 믿음으로 주님이 시술하시는 수술대위에 올라가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여름전도여행이나 중고등부청소년훈련과 제직훈련이나 집중코스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믿음으로만 역사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고치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자의로나 타의로 참석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번에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하고 신탁하는 믿음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고맙겠다. 여름행사만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교회의 모든 예배와 순서에 주님이 주가 되시고 나는 그의 종이 되어 순종하고 헌신하고 신탁하는 믿음으로 참석하여 시간마다 날마다 고침을 받는 은혜를 받아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믿음이 아니라 승승장구하는 믿음으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전진하고 승리하는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