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을 얼마나 해야지요?”

말씀중에 질문을 했다.

어느 전도사님이 대답을 했다.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는대로요.”

“성령의 감동이 안오면은요?”

“........”

“안테나가 망가져서 성령의 감동을 못받으면요?”

“........”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도 그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미국의 어느 권사님이 협회 차량헌금을 1000불을 하고서는 나중에 통화를 하는데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찔려서 혼이 났다고 하면서 추가로 헌금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본래 헌금을 하려고 했던 액수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여 이것저것 생각이 많고 하다보니 1000불로 줄어 든 것이라며 주님앞에 잘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 어찌보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주님에게 인색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에게나 스스로에게는 혹시 인색하여도 주님에게 부요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사람들에게는 부요하고 넉넉하며 손이 크게 베풀면서도 사람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앞에 여지 없이 인색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나는 국제통화를 하면서 그권사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액수를 정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되지요.”

 

어느 집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한 이년전쯤에 협회가 이사를 가야하는 형편이 되어서 주님이 내가 기도하는 중 몇몇 집사님들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십분의 일을 선교비로 협회에 헌금을 하면 주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제안을 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전달하는 협회 간사가 믿음이 적어서 이십분의 일로 제안을 했고 그들중에 한집사가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십분의 일을 선교비로 할 것을 직접 응답을 받았는데 그냥 이십분의 일로 하면서 그때부터 많던 수입이 줄어들고 사업상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 났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올해초에 그간사가 협회를 나가자 아예 선교헌금을 안했는데 그때부터는 사정이 더 어려워 지면서 일은 많아졌는데도 단가가 내려가서 수입이 줄어드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이제부터라도 감동을 주신대로 십분의 일의 선교헌금을 다시 시작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부인되는 집사도 말하기를 “많이 번사람이나 적게 번사람이 일반인 것은 쓰고 나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학개서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 1:9-11)

 

많은 것을 바랐으나 수입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갔지만 하나님이 불어서 없애 버렸다. 그래서 남은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은 황무하고 각각 자기의 소용에는 빨랐기 때문에 하늘에 이슬이 그치고 땅은 산물을 그치고 한재를 불러서 땅에 산에 곡물에 새포도주와 기름에 그리고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에 임하게 하심으로 인생으로 힘들게 하셨다는 말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으로 곤고한 삶을 산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모든 산업에 축복하시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가난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축복을 주시고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곤란으로 임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사람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을 고쳐주시기 위함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떤 집사는 그런말을 했다.

“장로님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남은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올해부터는 주님이 새는 구멍을 막아주시니까 돈이 모이기 시작하는거예요. 돈을 열심히 버는 것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새는 구멍을 하나님이 막아주셔야 돈이 모이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가?

돈을 사랑하는 가치관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치관으로 바뀐 사람에게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로 머리를 굴리거나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소멸하지 않는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는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묵살하고 억누르고 그의 감동하심을 깔고 앉지 말라는 말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그렇게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은 성령이 감동을 주셔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로 행하는 사람이다. 그와같은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수는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의 조건을 기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반렬에는 들어갈수가 없다. 그래도 그와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언젠가는 그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두에 물어본 질문에 정답을 말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며칠전에 잠을 자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 헌금은 얼마나 해야하니”

 

 

나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어서 주님이 답을 가르쳐 주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헌금은 말이야 내가 기뻐하는 액수만큼을 드리는 것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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