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무서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예전교회에 처음 나온 가정이 있습니다. 아내 되는 분은 전도훈련도 받고 사경회나 집회에도 참석을 많이 한 분인데 타 도시에서 이사를 와서 예전교회를 다닌 지 이제 3주 차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예배를 드린 지는 2주 밖에 안 됩니다. 남편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과 인격이 아픈 분이고 딸은 이제 고 1인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들어간 가정입니다.

두 번의 주일 중에 첫 주는 딸이 집에 있다며 오전 예배만 드리고 점심식사도 아니하고 간다는 말도 없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지난주에는 부인만 오후 예배에 참석하고 남편은 여전히 간다는 말도 없이 집으로 갔습니다. 지난주에는 오후 예배 후에 그 부인 집사님과 몇몇 성도들이 잠깐의 교제 시간을 가졌는데 좀 더 있으라고 하자 아니라고 집에 가야 된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집에 조그만 우상이 있어서 섬기러 가야 한데요?”

 

그러자 성도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말해주었습니다.

 

, 집에 우상 같은 고 1짜리 딸이 있는데 그 딸을 섬기러 가야 한데요.”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이렇게 변명을 했습니다.

 

, 토요일 밤마다 학원에서 새벽 세 시에 오기 때문에요.”

 

학교는 용인에 있는데 토요일마다 서울 강남에 있는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면 밤늦게 부부가 아이를 데리러 가서 천안에 있는 집으로 오면 새벽 세 시쯤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뒤로 하고 KTX역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탄식소리가 내게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주님은 밤으로 낮으로 근심하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가 같은 믿음으로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사람만 삐끗해도 온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이 시대에 생수 같은 말씀이 갈하여 예전교회를 나왔는지 모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임을 주님은 복음서 내내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일을 지나서 며칠 동안 너무나도 근심이 나를 사로잡아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분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다음은 문자를 주고받은 그대로입니다.

 

애한테 공부가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라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줌으로 하나님이 없이 세상에서 잘 될 것처럼 우상숭배를 가르치고 있음.”

 

그랬더니 만만치 않은 대답이 돌아 왔습니다.

 

공부보다 믿음이 앞서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여러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답문을 받은 나는 마음속으로 심히 부담이 되어 그다음 문자를 보냈습니다.

 

주일은? 예배는? 말로만 가르치는 것은 외식하는 것.”

 

그랬더니 이렇게 답이 왔습니다.

 

율법적이지 않도록 본인의 믿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순간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율법적이라는 말인가? 이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가끔 협회 세미나 때 간증도 하고 평상시에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이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시간 후에 정확히 여섯 시간이 넘어서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에게 답을 주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율법주의를 아무데나 같다 붙이면 안 됨. 육체를 신뢰하고 육을 키우고 자유하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임. 믿음과 은혜는 율법을 굴복시키는 것 임”(믿음과 은혜는 육체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등산 중에 문자를 보내다 보니 오자가 나온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근심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로써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마음속에 그분을 향한 근심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믿는 이의 육체는 성령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성령이 육을 감동해서 무슨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육을 다스리심으로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이 율법으로 육체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그런가 하면 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오히려 육체에 자유를 주는 것이 자유주의이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어서 못한다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육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를 주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법을 떠난 우상숭배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7)

 

신명기 말씀에 성품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마태복음의 목숨은 헬라어 프뉴마로써, 둘 다 공히 영혼을 말한다. 영혼을 다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기도가 필요한 것은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 본인은 말씀도 모르고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악한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화가 나고 마음에 큰 근심이 일어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슨 자기의 종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해야 순종하겠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들은 성도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녀는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해주시면 한다는 말은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종인 것처럼 매사에 부려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이전에도 성경에 기록된 어떤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2:4)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자유주의는 우상숭배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25)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도 자식을 더 중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이며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 그렇게 방종하게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1-12)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시도록 시내산 위에서 사십 일을 주야로 금식하고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만나주심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나아와 자기들을 위하는 신을 만들라고 해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며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과 더러운 뜻대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32:1-4)

 

어떤 무식한 이들은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십일조를 하겠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는 말은 안 하겠다는 말이지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12:46-47)

 

참고로 그분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자면 미국의 어떤 권사님은 자기 아들이 고등학교 때에 갱단에 속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그 아이들 수십 명을 다 집으로 데려오라고 해서 복음을 전해서 다 변화되고 그중에 우두머리 되는 아이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변화되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갱단에서 탈퇴하면 보복을 당하고 즉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한동안 숨어 있다가 나왔는데 아무도 죽이는 일이 없어서 뒷조사를 해 보았더니 그동안에 그 조직이 와해되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UCLA 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연봉이 일억이 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권사님의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십 년이 넘도록 집에서 먹고 놀고 자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십 대 중반에 대학을 들어갔는데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지혜의 길을 열어주심에 4년 내내 수석만 하다가 졸업식에서 학장이 그 아이가 받을 상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주다가 너무나 많아서 불러 주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다 읽어 주었고, 백인들이 여럿이 와서 어떻게 그렇게도 훌륭한 아들을 두었느냐고 말하는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주립대학교에서 한 달에 1,800불씩 월급을 주면서 박사학위 코스를 밟도록 초청을 하였는데 그 아이가 거기에 가서 생활하다가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실 것 같다며 포기하고, UCLA 의대를 졸업해서 나서 현재 UCLA 부속병원 방사선과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경험한 것이지만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머릿속에 있는 총명의 길을 열어 주셔야 공부도 잘 할 수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1:17)

 

이들이 느부갓네살 앞에 섰을 때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의 명한 바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갔더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1:18-20)

 

그리고 한 가지 더 안식일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로는 주의 날을 지키게 되었으나 그것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일 년, 365일이 다 주 안에 거하는 안식일이다. 그런데 일주일 중에 단 하루도 온전히 주님의 날로 주님의 시간으로 드리지 못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 곧 그날 중에 단 한 시간이라도 육체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은 일 년, 365일을 안식하는 주 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도록 거룩해지는 것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평생에 주 안에 날마다 거하는 믿음으로 안식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세상 죄인들과 같이 요동하고 요란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엿새 동안 하시고 제 칠 일에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2:2-3)

 

이 창세기의 안식일은 출애굽의 안식일과 다른 것은 출애굽의 안식일은 구속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창세기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의인들과 연관이 있는 안식일이다. 창세기의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것이며 그날에 하나님이 쉬신 것은 그의 기뻐하시는 아담과 하와와 사귀며 사랑해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날이다. 그러나 출애굽 할 때 주신 안식일은 이제 겨우 구속함을 받고 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날로 그날을 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31:13)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하게 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날이 일주일 중에 단 하루인 안식일이다. 그날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구원은 받았어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어린아이 같고 젖먹이 같은 연약한 자들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거룩하게 되는 인격도 안 되고 생활도 안 되기 때문에 주 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지 못하고, 세상 죄인들과 같이 또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과 같이 어지럽고 요란하며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의 제자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삼 년 반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 안에서 일천이백여 일을 안식일로 지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으로 거룩해졌다. 주님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3-4)

 

그러므로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안식일의 주님의 사역의 결과를 가진 사람들만 주 안에서 날마다 안식을 누리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믿고 성령을 받는다고 다 주님 안에 거하는 안식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아닌 것은 제자들과 같이 일천이백육십 일을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는 안식일의 거룩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메섹의 사울은 주안에서 삼 년 반을 지낸 제자들과 자기가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주의 은혜로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 년 동안 거룩하게 되는 안식을 생활한다. 그리고 어느 사도보다도 주 안에 있어 쓰임을 받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주일에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평생에 안식하는 생활은 단 하루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산다면 안식이 없는 아픔은 계속되는 것이다.

 

주일에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열심으로 그날에 세상과 육체를 거스려 주 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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