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이 어떤 사람의 율법주의에 대해 변호하기를
"장로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다음의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사도바울이 경계를 했던 율법주의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교훈에 빠지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여러가지 말로 바울이 책망을 한 것도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요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강조하고 행위를 강조하는 교훈에 빠지는 것을 아파함으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일이 있은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율법주의 와 은혜의 차별이 무엇인가?
율법주의는 아직도 행위의 주체를 그리스도인의 육체로 보는 것이며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주체를 그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향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명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율법주의이며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해주시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행위의 주체가 성령임을 믿는 것이 은혜이며 그것이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일치되는 것이다.

어느교회에 갔더닌 강단에 이런 표어가 써 있었다.
"말씀을 먹어 버리자 기도를 해버리자 전도를 해버리자."
말씀을 다 전하고 그목사님에게 "목사님 저거 잘못된겁니다."
그목사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 보면서 "왜요 장로님." 하고 물었다.
저거를 다시 써붙인다면요 "말씀을 먹어버리게 하옵소서 기도를 해버리게 하옵소서. 전도를 해버리게 하옵소서."라고 써붙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하시는 역사로 되어 지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갔을 때에 그표어가 없어지고 새롭게쓰여진 표어를 볼수가 있었다.

그렇다 바울은 그렇기 대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을 강조한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이 그리스도와 함게 죽은 것이고 그안에 성령이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주체가 내가 아니요 내안에 계시는 성령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것이 없느냐는 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 세밀히 순종할수록 더 세밀히 역사하시고 인도하신다. 적당히 순종하는 사람은 적당히 인도함을 받을수밖에 없고 하루종일 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전심으로 가르쳐 주신다. 불순종하는 이들은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가르치셔도 저들의 관심은 다른데에 있기때문에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의 생활속에는 주님이 일하시고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주님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가 현현(顯現)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은혜의 생활이다.
내가 모든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믿음을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향하여 행위를 요구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아니한다.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요구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자녀들에게도 행위를 자꾸 요구하는 어리석은 일을 중단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생활을 한다고 해도 예수믿기전부터 자기 육신을 향해 남을 향해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던 어리석음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며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통해서라야만 율법의 흔적을 지울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와 모든 사람의 생활속에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주의가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이 하루빨리 자취를 감추고 오직 성령으로 역사하는 은혜가 강조되는 가르침과 생활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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