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예수전도협회를 검색하기 위해 어느 포탈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예수전도협회가 이단이니 아니니 말이 분분해서 살펴 보았더니 장로님이 하신 말씀들이 다 맞는 말씀이더라구요 그런데 죄를 사람앞에서 자백을 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로님 꼭 교회에서 사람앞에서 공적죄자백을 해야 합니까?"
인터넷에서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떠도는 비방에 의해 진리의 잣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따른 것도 아니며 각각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어리석은자들의 변론에 빠질가능성이 농후함을 말해준 후에 죄의 공적자백은 신구약성경에 가득한 엄연한 성경적인 진리이며 각교단에서 오래전에 채택하고 헌법에 명기까지한 공적교리임과 2000년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부인할수 없는 진리임을 말해 주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는 야고보서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요한일서의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씀은 우리가서로 우리의 죄를 자백한다는 명백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범죄한 아간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 7:19)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죄를 사람앞에서 숨기는 것은 스스로에게 영광을 취하는 것이고 자신의 죄를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람들앞에서 가리움으로 거짓되고 위선된 모습으로 사람에게 칭찬이나 존귀를 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앞에서 악하기가 이를데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이다.
어떤 자매가 집회중에 질문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앞에서만 죄를 고하고 용서를 받으면 된다고 하는데 장로님은 왜 사람들앞에서 죄를 자복함을 가르치시나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받겠다는 뜻보다는 차라리 사람에게만큼은 자기의 죄를 숨기고 싶은 속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후에 사실상 성경은 하나님앞과 사람앞을 구분한적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은 사람앞에도 임재하시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앞에서 죄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앞에서도 죄를 숨길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하나님앞과 사람앞을 구분하는 것이 외식의 시작이며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아주 악한 소위임을 말해준후에 정직이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있는 그대로 내어 놓는 것이며 사람앞에서도 죄를 감추는 부정직함을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도 용납될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임을 일깨워 주었을 때에 죄를 자백하는 시간이 되자 그자매는 제일먼저 일어나서 죄를 자복하였는데 안수집사의 딸이면서도 간음죄를 짓고 직장동료들이 자신이 기독교인인줄을 다아는데도 그들에게 소문이 날정도로 직장동료와 동거를 하고 아이를 임신했으며 같은 성가대원과 간음을 한죄들을 아픔을 가지고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은 정수리까지 미쳐서 세상불신자들은 교인들을 그리고 목회자들까지도 세상에 드러나도록 죄를 지음으로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다알고 그들의 더러운 입에 오르내리는 형편인데도 교회안에서만 죄를 철저히 감춤으로 세상죄인들이 보기에도 교회는 비류들의 모임처럼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앞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에 죄의 자백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야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그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죄를 자백할수 있으면 차라리 그것이 복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날마다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받는 사람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살수 잇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제까지나 죄를 자복하고 살아야만 합니까?"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죄를 자복하는 것이 힘도들고 지겹기까지도 한 모양이다. 나에게 그말을 전해준 분에게 이렇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세수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때마다 몸을 씻는 것은 항상 더러워지는 환경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굴이나 몸을 항상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정결해야하겠는가. 몸을 씻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인가 안씻고 사는 것이 부담이 되는 생활인가? 분명하지 않은가? 영혼을 씻고 사는 것이 부담스럼고 불편해서 그만둔다면 그런 사람은 거룩하신 주님과의 생활이 안되는 사람이다. 날마다 마귀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죄를 짓기 쉬운환경에서 항상 깨어 있어도 속기 쉽고 죄를 짓기 쉬운 삶을 사는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날마다 항상 계속해서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어린양의 피로서 예복을 항상 빠는 것이 생활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회개가 생활이 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수 없는 것이다.
어느날 어느교회 강단에서 기도를 하는데 주님의 작고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너희집 욕실에 세제가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 보겠니?"
눈을 감은채로 대충 생각을 해보았더니 열가지는 족히 넘는 것 같았다. 주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얘 그렇게 많은 세제들이 왜 필요하니?"
"더러워지니까 필요하지요?"
"그래 그런세제들이 항상 필요하고 하나라도 없으면 불편하고 곧 불결해져서 냄새도 나는 것과 같이 너희 영혼도 항상 더럽혀질수 있기 때문에 항상 회개가 필요하고 죄를 자복함이 필요하고 항상 피로서 씻어 정결케함이 필요한 것이란다."
그렇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 보다도 우리의 영혼 주님이 건져주시고 살려주신 깨끗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우리의 영혼보다 소중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다른 것은 좀 더러워져도 살수 있지만 영혼이 더러워져서는 살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되짚어 보자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3,4)
주님은 제자들에게 삼년반동안을 말씀을 가르쳐주셨다. 말씀을 가르쳐주신 결과 주님이 인정하시는 깨끗함 곧거룩함 영혼의 정결함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며 이제는 그정결함으로 주님과 함께 살수 있게 되었다는말씀이 이말씀의 뜻이다. 거한다는 말은 지속이 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지속됨'이라는 말이 얼마나 목마르고 갈급한 말인가 많은 이들이 은혜가 지속이 안되고 사랑이 눈물이 사역이 지속이 안되어서들 얼마나 야단들인가? 그래서 기도원을 들락거림이 잦아지고 부흥회도 자주하고 벼라별세미나를 다 찾아 다니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이와같은 것들이 다 은혜가 지속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인데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깨끗함은 주님이 보시고 인정하시는 께끗함이요 그것은 거룩함이요 영혼의 정결함이다. 그것은 말씀으로 깨끗해진 것을 말하는데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할 때에 그말씀앞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깨달아지고 회개함으로 정결해져서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들으면서 가르치면서도 거룩함의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허망한 사람이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생활을 할 때에 그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노를 격동한 이유를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을 하나님의 편팔과 강한손으로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구원해내시던 날을 기억하지 못하였음이라고 규정을 하고 계신다.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죄를 짓는 자들, 구속함을 받고 짓는 죄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 죄를 아파할줄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하며 주님안에 거해야하는 이들이 죄안에 거하는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후에는 반드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함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였다. 그럼으로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회복할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사람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끌고 회막으로 간다. 사실상 짐승을 끌고 회막으로 가는 그사람의 모습은 아무도 모르게 또는 밤중에 은밀하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회막을 향해 짐승을 끌고 가는 것은 공개적이며 그의 모습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사람이 하나님과 해결해야될 그리고 용서를 받아야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사람은 회막문에서 제사장앞에 그리고 사람들앞에 자기의 손을 짐승의 머리위에 올려 놓고 안수함으로 자기의 죄를 낱낱이 자백을 한다. 그럼으로 자기의 죄를 그짐승에게 전가를 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마음속에 눈꼽만큼이라도 죄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중심이 있으면 그죄는 짐승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손으로 짐승을 잡고 제사장은 그피를 받아서 제단에 뿌리며 또 그사람은 내장을 뺀 그짐승의 사체를 각을 뜨면서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통곡을 하며 자기죄를 아파하면서 장차 오셔서 내죄를 담당하실 메시야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으심을 아파하면서 죄의 아픔을 체휼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사체를 단위에 올려 놓고 불로 태움으로 속죄제사가 필하는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 죄를 자백함이 없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것이고 자백할 죄가 없는 사람은 제사가 필요치 아니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양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죄를 자백하였으나 십자가의 영원하고도 온전한 제사가 완성된 오순절 이후에는 죄를 자백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이죄를 인함이라는 고백이 필수적으로 수반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전혀 자백하지 않는다면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도 그와같이 죄가 없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심판을 받은 사실이 납득이 갈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기를 싫어하고 꺼리는 사람은 십자가를 깍아 내리는 사람이라 하여도 절대로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광야에 이스라엘은 제사가 생활이 되어 있었다. 날마다 죄를 씻는 일이 생활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것이 생활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항상 영혼의 정결함과 거룩함으로 사는 비밀인 것이며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의롭다 하신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대로 사는 길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가르치시면서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기념하라는 말은 원어에 기억하라는 뜻에 가까운 것이다. 예수를 기억하라는 말은 십자가의 예수를 기억하는 것 곧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피흘려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하였다. 날마다 성찬을 하였으며 사도행전 20장 7절의 교회는 '안식후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때에 교회에 모이는 목적 자체가 성찬이었다. 모일 때마다 우리죄를 사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교회가 모이는 가장중요한 이유이었던 것이다. 그와같은 교회는 항상 정결한 영혼으로 주님과 함께 살고 그안에 거하는 지속적인 거룩함으로 살수 있음을 그들은 체험하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예수가 필요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예수가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은 죄인으로 교회에 들어와서 어느 순간부터 용서가 필요 없고 회개가 필요없는 사람처럼 죄를 감추고 행동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짓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속된말로 하나님나라에서 또라이 짓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거룩함을 입은 회중들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 죄를 자백할줄을 모르는 이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님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죄의 깨달음이나 죄의 자백이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병원에 온 환자중에 아무병도 없고 치료도 고침도 필요 없는것처럼 행하는 이상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진찰을 해도 환자가 병명이 밝혀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죄인이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거의 버림을 받은 수준에 가까운 것이다.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심령은 성령의 회개의 영의 역사가 떠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인데 죄의 깨달음이 없이 하루를 사는 사람은 말씀의 접촉이 없는 사람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요 말씀을 읽고 들어도 그말씀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교만한 심령으로 사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 주시면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발을 씻으시도록 내어 놓지를 않았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요 13:6)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발을 씻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에 베드로는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목욕을 한자는 발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셨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9,10)

이말씀에서 우리는 발을 씻는것보다는 목욕을 하는 것이 더 큰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면 목욕은 무엇이며 발을 씻는 것은 무엇인가? 목욕은 세례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일생에 단한번 있는 사건인 것이다. 발을 씻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더러워 지는 것을 말하는데 주님은 목욕은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은 일회적인 영원히 단번에 일어난 사건을 말하는 것이요 발을 씻는 것은 예수를 믿고 난후에 날마다 더러워질수 있는 우리의 영혼을 씻는 것이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목욕을 하고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어찌 주님과 상관이 없겠는가? 분명코 상관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말인가? 발을 씻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은 상관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상관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영적생활이 안된다는 말이다. 주님안에 거하는 깨끗함과 정결한 거룩한 생활이 안된다는 말이다. 경건생활이 안되고 교회생활이 안된다는 말이다.
아나니아는 그리스도인이 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자기의 집을 팔아 바칠 정도로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나니아를 지옥에 갔다고 경솔히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와같은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수 없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이들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가운데 많이 있다. 예수를 믿고나서 우리가 잘못행한 행위가 우리가 받은 구원을 무효화시킬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을 하는 이들도 예외없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죄를 짓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행은 이땅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광스러운 교회생활을 빼앗긴 것이다. 죄를 숨기고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주신 죄를 자백할수 있는 단한번의 기회를 놓침으로 그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영광스러운 교회생활을 맛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더럽히는 죄를 지으면서도 깨닫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혹시 깨달아도 죄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킴으로 죄와 타협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죄와의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싸우기는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아니하는 삶을 사는 것을 주님은 허물하시는 것을 분명하고도 똑똑하게 알아야 한다. 옛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죄는 자복하고 버려져야 하며, 죄는 심판하여 버려야함'을 항상 강조하고 살았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죄를 자복하는 것이 생활이 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수 없다는 것을 요한사도는 요한 일서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해주고 있다. 요한은 교회가 생기고 6,70년이 지난후 교회가 타락을 하고 교회생활의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에 요한서신을 썼는데 요한 일서는 누가 무어라 해도 퇴락한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쓴 '부흥서신'이다.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사랑이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사랑이 없는 이유는 사귐이 없기 때문임을 말하는데 사귐도 없는 사람들끼리 어찌 사랑을 할수 있겠는가? 이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귐이 없는 교회생활의 이유를 빛가운데 거하지 않고 어두움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말하는데 어두움가운데 거하는 것이 죄자백을 하지 않고 서로 자신을 포장하고 숨기는데에 급급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서신은 '만일 우리가 빛가운데 거하면'과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의 결과가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5-10)

교인들에게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있으며 설교를 하는 것이나 교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가운데 거하는 것은 죄를 숨기고 자백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요 진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임으로 요한은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이 빛가운데 계신것과 같이 우리도 빛가운데 행하면 숨김이 없이 서로 죄를 자백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으며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자요 진리가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범죄치 아니하였다고 하는 사람들 곧 죄자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자로 만드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죄를 깨닫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은 만일 우리가 서로 서로 우리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의 자백을 싫어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은 말씀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이요 스스로 속이는 자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이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며 진리대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이며 때로는 진리가 아예 없는 예수가 없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의 공적자백을 비방하거나 폄론하는 사람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충동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으며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교회안에 '우리'가 있고 '너희'가 있음을 말하며 너희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는 예수를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지는 실제가 있는 신앙생활을 했음을 상기시킨다. 너희는 우리와 사귐이 안되는 사람들이요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 아니 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는 교회생활과 성도와의 교제가 아니되는 교회생활은 참담한 것이요 그것은 신앙생활도 교회생활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와같이 교회에서 영적교제가 아니되고 사귐이 안되므로 인해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고 살면서 죄에 눌려 사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로 다할수 없다.
죄를 공적으로 자백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생활을 못하고 마귀에게 노출되어 공략을 당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나 교회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외에도 스스로의 심령에 큰 고통이 있다. 죄를 자백하지 않고 품고 사는 사람의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귀는 누구인가?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성도들을 밤낮없이 하나님앞에서 참소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죄책과 정죄의식에 빠져서 살아간다. 교회에 와서도 죄를 씻지 못하고 날마다 더하는 죄로인한 정죄의식의 중압감에 기쁨도 없고 얼굴의 광채도 죽고 생기도 없는 창백한 종교생활로 바꿔치기를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3-5)
다윗이 이와같이 고백한 것처럼 끊임없이 계속되는 영적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여집사가 아이를 제왕절개수술로 낳았는데 일년이 다되도록 뱃속이 뜨끔뜨끔하니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뱃속에 핀셋이 들어 있었다.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의사가 핀셋을 빠드리고는 상처를 꿰멘 것이었다. 그병원은 종합병원이었는데 혼비백산하여 수술비를 다 감당하고 다시 수술을 해서 그핀셋을 뱃속에서 끄집어 냈다.
만일 그여집사가 수술을 하는 것이 아프고 번거롭고 부끄러워서 수술을 안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을 하자 항상 그핀셋을 속에 두고 평생을 아픔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기를 꺼려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은 죄를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큰고통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큰고통이 되어도 그것을 속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 보다는 순간적인 아픔만 참으면 아프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어리석은 이들은 죄를 자백하는 것을 아파하고 죄를 자백하는 것을 싫어하고 죄를 자백하는 것을 꺼려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러운가 생각하라 어리석은 자들아.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꼬이고 막히고 형통치 못하며 문제가 터진다는 말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죄를 숨기는 자는 영혼이 문둥병이 들어서 죄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악한 일들로 육체에 고통을 가함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굴복을 시키는 일을 하신다. 왜냐하면 영적감각이 죽었기 때문에 마지막 으로 남은 고통을 느낄수 있는 것이 육신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고통을 주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역사가 성경에 가득하고 교회사에 가득한 것이다.
도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기도응답이 될 수가 없다 . 하나님은 더루운 심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영혼이 더러워진 사람은 여타의 다른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깨끗케 해달라는 회개하고 죄를 자백함으로 정결케 해달라는 기도가 급하며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시편기자는 '내가 죄를 지으면'이라고 하지 않고 '내마음에 죄악을 품으면'이라고 말한다. 죄는 지을수 있다 그러나 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숨기면 안된다는 말이다.
만일 어떤 재판정에서 검사에게 기소를 당한 사람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부인을 해도 그의 죄에 대한 반증을 다가지고 기소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죄의 사실을 부인하면 계속되는 수사와 재판과 상고속에 많은 세월들을 고통가운데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과는 유죄확정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날마다 자기의 죄를 숨기고 자백하지 아니하면 항상 마귀의 참소와 고소를 당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면 우리의 자비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우리의 죄를 즉시 사면하여 주실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다이루었음에도 어리석게 죄를 숨기고 사람앞에서만 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백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계속해서 공격의 대상으로 자기를 노출시키는 어리석은자가 되는 것이고 그의 영이 마비상태에 이르러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요한웨슬레의 감리교 부흥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미국선교에서 돌아온 죠지 휫필드가 자기가 체험한 '자기죄를 자기입으로 자백할 때에 체험되어지는 거룩함'에 대해 간증을 했을 때에 요한 웨슬레는 그 자리에서 즉시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서 두사람이 끌어안고 울고 통곡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가 가르치는 클라스 미팅을 모아놓고 자기죄를 자백한 후에 돌아가면서 죄를 자백시켰을 때에 큰 아픔과 떨림이 회중을 사로잡으면서 서로에게 숨기고 감추던 어두움이 순식간에 물러가고 빛가운데 거하며 서로 사귀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역사를 바탕으로 요한 웨슬레를 통해서 주님은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주신 것이다.
한국의 1907년의 부흥이 죄를 공적으로 자백함으로 왔다는 사실을부인하는 사람은 마귀의 편에 서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마귀의 일꾼이다. 교회사의 여러가지 부흥의 역사에는 반드시 죄를 공적으로 자백하는 역사가 수반되었다.
필자가 세운 KBS 성경공부모임도 죄를 공적으로 자백함으로 거룩한 공동체가 되고 사귐이 있는 공동체가 되고 피차에 눈물이 나도록 사랑하는 공동체가 된후에 수많은 직원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삶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무수히 일어났다. 청년들 20명가지고 시작했던 전도모임도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기에 2년남짓동안에 훈련받은 전도자 300명을 배출해내는 공동체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회개가 없어진 교회이다. 내가 학교를 다닐때만 하더라도 1960년대까지는 부흥회에서 앞으로 나와서 말씀앞에 깨달은 자기의 죄를 공적으로 자백하는 일들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혼탁해지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회개가 없는 축복이 말하여지면서 겉잡을수 없는 세속화와 타락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면서 회개가 없는 교회가 된 것이고 이제는 오히려 회개하는 것을 이단시하고 사이비시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아픈 현실이 되었다. 사실은 회개가 없는 교회, 회개를 부인하는 교회가 이단의 수준이요 사이비인 것이다. 그것은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또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는 것을 꺼려하고 싫어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도 주님은 미리 말씀을 해놓고 계신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빛으로 오지 않고 죄를 자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씻으신 사실을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해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살면서 할수만 있으면 한가지 죄라도 더 깨닫도록 간구하고 주님의 비추심을 구하고 죄를 자백하고 씻음으로 항상 정결한 영혼으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기를 오히려 사모한다는 말이다.  
이번 부산집회전에 대신동의 어느 교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분의 말이 담임목사님에게 예수전도협회집회에 참석을 하겠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다 좋은데 공적 죄자백이 안 좋습니다. 저도 그훈련에 참석을 했었는데 죄자백시간에 귀를 막고 나와 버렸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아무래도 참석을 안하는게 좋겠다라고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목사님이 얼마전에 일간신문에 났던 어느교회의 장로들과 목사와의 광고공방한 사실을 상기 시키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집사님 그광고 보셨지요 그렇게 지금 교회가 타락을 하고 죄를 짓고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목사도 여자를 좋아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래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오늘날 교회현실인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 죄의 공적자백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말을 했더니 그집사님의 말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것도 맞는 말씀이라고 집회에 참석을 하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광고로 불신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시키는 그교회는 교회와 신앙에서 거짓말로 예수전도협회를 호도한 것을 제일먼저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에수전도협회를 적극적으로 비방을 했던 교회이기도 하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큰교회셋이 이죄자백을 비방했는데 그교회들이 다 온전치 못하고 목사가 쫏겨나가고 교인들이 나가는 말그대로 풍지박산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훈련을 받고 죄를 자백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결국은 이혼을 하고 그들이 은밀하게 행한 죄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일들이 일어난 많은 경우가 보고되고 있다. 장로가 죄자백을 싫어해서 목사님을 비방하다가 오히려 그장로의 불의가 드러난적도 부지기수이며 이상하리만치 죄자백을 반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 간음죄와 여러 가지 추악한 죄악에 연루되어 있는 사실들이 사람들이나 교인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밝히 드러내시고 무서운 형벌에 나아가게 하는 일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사람은 대적을 해도 진리를 대적하고 배척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리석은 일이며 그것은 자기의 영혼에 올가미를 씌우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마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말이 생각이 난다.
"장로님 한국교회가 결국은 회개해야지요."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갈으신다고 했다 죽일 기계도 예비하신다는 말은 전쟁이나 재난이 임할수도 있는 가능성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더 이상 기회를 잃어서는 아니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영혼을 더럽힌 죄와 교회를 더럽힌 죄를 통회하고 자백해야 한다. 재를 무릎쓰고 종일 주님앞에 통곡하고 각근히 행하며 자기자신을 슬프게 해야 한다. 자기를 슬퍼할줄도 모르는 자는 아합보다도 못한 악함이 정수리에 미친자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거짓의 탈을 쓰고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자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분노가 쉬지 않음을 모르고 있는가? 지금 회개해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수 없다. 넓은 문을 즐기는 자들이여 회개하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지금 구하라. 하나님이 혹시 한번더 불쌍히 여겨주실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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