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충신교회 집회보고

 

 

 

“장로님 저랑 사진을 같이 찍어 주실 수 있는지요?”

 

 

화요일 밤 저녁집회전 찬송을 부를 때에 목이말라서 물한모금을 마시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 한 사십대 중반쯤되는 남자가 나를 따라나와서는 한 말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해서 둘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자신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면서 그는 그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제가요 이사진을 부모님에게 보낼려고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제가 예수를 믿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동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제일생 처음으로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에 엊그제인 지난주일날 이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장로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매시간 참석하여 지금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집회를 마치고 교회 현관에서 그를 만났는데 울먹이면서 하는 말이 “내일 새벽이 마지막 시간인데 제가 나올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악수를 해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새벽시간에 그가 나와 있었다. 내가 볼 때마다 끝자리 중앙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어김없이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

 

 

참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는 놀라우신 분이다. 그한영혼 건지시기 위해서 이집회가 여러해전부터 하려다가 못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하였던가? 그리고 금년들어서도 2월부터 매달 날자를 잡다가 서로간에 일정이 맞지를 않아서 무산되다가 겨우 집회를 잡았는데 그나마도 담임목사님이 6월 30일부로 은퇴를 하시면 영영 집회를 열수도 없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마련된 집회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한영혼을 마음에 두시고 이집회를 열게하시는 은혜를 주신 것이었다. 주님을 찬양한다.

 

 

5월 19일인 주일날 아침 일부예배를 시작으로 이부예배 그리고 오후예배시간과 그리고 월요일과 화요일에 새벽, 낮, 저녁시간에 말씀을 전하였고 수요일 새벽시간을 마지막으로 집회가 이어졌다. 나와 사진을 찍은 그사람에게만 이복음이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집회인원은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났다. 타교인들은 몇 명안되고 본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은대로 은혜를 사모하여서 너도나도 열심으로 참석을 한 것이었다.

 

 

“장로님 우리교회는요 일년에도 수없이 많은 집회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사로 와서 말씀을 전했는데 이복음은 확실히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던 어느 권사님이 위로 올려다보면서 너무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한 말이었다. 그와같은 말을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 은퇴하시는 목사님도 이런 말씀은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임을 본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속으로 아 신앙생활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도 말씀했다. 사모님은 은퇴를 하기전에 정말 귀한집회를 하게 되어 교회에 할 일을 한 것같아 고맙다고 했다.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 식사대접은 한번만을 받았다. 그런데 마지막날 새벽에 기도회가 끝나고 어느 장로님부부가 자원해서 식사를 대접을 했는데 그분들이 식사중에 동일한 놀라움을 표하면서 복음이 너무나 분명해서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한말씀 한말씀 믿음으로 살고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어떤이는 헌금봉투에 “나의 내면세계를 확실히 보게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제목을 쓴 사람도 있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이복음이 너무나 생소한 말씀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마다 충격을 받았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큰 충격을 받았고 내가 주님앞에서 사는 생활의 간증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녀들을 기를때에 주님이 나에게 주신 지혜와 또 주님이 나의 자녀들을 직접 길러 주신 사실들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그리고 취소될수 없는 구원을 받은 은혜와 빼앗기지 않은 생명을 받아서 그생명으로 사는 영적인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님이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수사적이고 형용사적인 말이나 찬송이 아니라 생활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나라가 인격의 통치가 이루어 지는 것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말씀이었다. 찬송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님과 생활이 없는 찬송은 하나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과 오늘날 찬송이 생활이 되지 못하고 예배의 도구로 전락을 하고 듣기좋고 부르기 좋은 가사와 곡조로 바꾸어서 교인들에게 혼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인간중심의 찬송이요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을 전했다. 생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안받으시는 가증한 것임을 말했다. 또한 기도로 공력을 쌓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는 연약하고 무능하고 힘이 없을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도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성령이 예배당의 이 자리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기름부으심이 있으라고 자주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직도 성령을 받아야하는것처럼 속이는 것이요 우리가 이미 성령을 받은 사실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말씀했다. 성령은 나의 마음을 성전삼고 이미 내안에 들어와 계시는데 우리가 볼찌어다가 안되기 때문에 성령이 근심하시고 성령이 소멸함으로 마치 내안에 안계신것처럼 느끼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임을 말씀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인격적인 품질이 필요하며 사람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이 되지 않고는 자식도 기를수 없으며 교회일도 할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앞에 자기를 세우는 사람이나 자식들을 하나님앞에 세우는 자녀교육을 할수 있는 것임을 간증했을 때에 그들은 숨을 죽이며 말씀을 듣고 통곡했다.

 

 

찬송가와 복음성가 그리고 템포러리(일시적 유행성)한 복음성가를 구분하여 가르쳐 주면서 생각없이 찬송하지 말고 생각이 있는 찬송을 부르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찬양팀이 부르는 가사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찬송가 가사에도 영적인 실재가 있어야함을 말했다. 나에게는 찬송이 간증이 되는 찬송이 많음을 말하면서 찬송가 가사가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불러도 안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위로받기 위해서 부르는 가사여도 안되고 요망사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영적인 전쟁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내면의 정욕과의 싸움임을 말하고 타종교와의 종교적인 대치 또는 세상과의 대치를 부각시키면서 외적전쟁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돌리는 것은 악한 마귀의 궤계임을 말했다. 첫날 아침식사시간에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인터콥이라는 선교단체가 재림을 교인들에게 두려워하게 가르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말을 듣고 말씀시간에 아마겟돈전쟁은 땅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요 공중의 전쟁이라고 했는데 그말한마디에 교인들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을 보았다. 재림은 신부된 우리가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기쁘고도 흥분되는 사건이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제 3성전이 건축된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것을 성경과 역사를 가지고 풀어 주었다. 땅의 성전은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에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된 몸에 거하시는 성령은 이제는 다시 어느 건물에 거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말씀을 가지고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가서 모스크가 무너지라고 가르쳐 주는대로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거기에 성전이 다시 설 이유가 없는 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전했다. 베리칩이나 바코드가 짐승의 표가 아니며 짐승의 표는 영적인 배교를 말하는 것이지 육신에 표를 받고 아니받고가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가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님을 말했다. 말세에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은신처를 준비하는 것은 영적인 재림준비가 아니라 육신때문에 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요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에 빠진 것임을 말해 주었다. 마지막날 새벽에는 믿음소망사랑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의 재미와 맛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육체를 가진 우리들이 이세상에서 절대로 사랑할수 없는 분이요 뜻을 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지 않으면 목숨까지도 다하지 않으면 이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사랑할수 없는 분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킬수 있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것과 같은 사랑을 하라는 주님의 계명도 지켜지지 않는 것을 말했다.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람도 사랑할수 있다는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싫은 감정을 말하고 표현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그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고 질문을 하여 자녀들을 하나님앞에 세우는 것이 부모임을 말했을 때에 그들은 말할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게 주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멸망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천천히 부르면서 울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집회내내 “새롭습니다” “이제까지 들은 것과 다릅니다” “말로만 하는 다른 강사들과는 달라요” “지식과 진리의 차이를 알겠어요”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들었다.

 

 

요즈음 현대교회는 수사적(修詞的-Rhetoric)인 교회로 타락된 교회이었다.

찬송한마디를 해도 마음에도 없는 것은 물론이요 머리로도 생각이 안되는 입술로만 찬송을 하는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이라도 해보라고 책망을 했다. 가사하나하나 의미가 없는 것을 지적했다.

기도도 하기좋고 듣기좋은 말만을 늘어 놓는 수사적인 기도가 되어 자기자신의 영적인 현실의 알맹이도 없고 심령의 원통핟도 없으며 자기의 영적인 목마름을 부르짖는 기도는 더더우기 없는 교회가 되었다.

설교도 교인들이 듣기에 좋고 듣기 편한 설교를 선호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부담이 되기 때문에 기피하고 인간중심의 언어들을 늘어 놓는 수사적인 설교가 강단에 넘쳐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령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연히  외적으로 종교적인 성장을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아버지를 닮은 하늘의 성품으로 세상을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세상과의 대립과 타종교와의 대립을 강조하고 부추기며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이나 타종교로부터 오는 피해의식을 가지게 함으로 세상종교나 세상죄인들을 영적인 전쟁의 대상으로 삼게하는 마귀의 술책에 빠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대적이요 주적인 마귀는 자신의 정체를 그와같은 것들로 혼돈케 하여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데 교회는 그와같은 마귀의 궤휼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아니라 강단에서나 집에서나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주님이 그렇게도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신 수사적인 기독교가 되어 있었음을 보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성령하나님이 그와같은 현실을 지나쳐 가실리가 만무하였다. 진리의 성령이신 주님은 강단에서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진리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그들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과 사고와 가치관 그리고 말한마디까지도 고쳐주셨다. 찬양인도자의 말실수를 강단에서 지적하고 식사시간에 한 말실수를 강단에서 고치시는 역사를 보았다. 주님은 우리의 말한마디에도 크게 상처를 받으시는 주님이었다. 왜냐하며 그죄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도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우리안에 좌정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이할만한 것은 대구 예일교회에서 다섯명이 제주관광을 왔다가 낮에는 관광을 하고 저녁에만 이틀동안 참석해서 이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주님의 고난당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이전에 항상 듣던 이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 주님이 죄인을 사랑하신 말씀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수십년만이 처음 듣고 있다는 사실에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동안 이 귀한 말씀을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말씀을 심드렁하게듣고 순종함이 없이 들은 교만한 죄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장로님 이번집회가 끝나면 우리교회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 확실합니다.” 나를 마중보내는 집사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이집회를 위하여 십년가까이를 기도해온 주님의 도구이었다.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해주신 모든분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