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개혁자들의 불굴에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신학에는 천주교 신학으로부터 전승한 잘못된 오류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천주교에서 이어 오고 있지만 아무런 영적인 비판이나 거름이 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이 마지막 시대에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확실히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옛 원수 마귀는 이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 안에 그가 베푸는 여러 가지 궤계의 아주 중요한 재료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가 심어 놓은 그와같은 수많은 잘못된 가라지 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 정체를 벗겨가는 일을 함으로 주님이 다시 오심이 가까운 이때에 순수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교회를 준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와 같은 것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하고 고쳐야 하는 것이 부활절에 채색한 달걀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본래 이것은 천주교에서 하던 행사를 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그 근본 자체가 아주 미신적이며 인본적인 것이다.

 

사실 달걀에 색을 칠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이교도로부터 기인 한 것이다.

 

60000년 전에 아프리카에 타조의 달걀에 장식을 한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약 5000년 전에는 수메르인들과 이집트인들이 부의 상징으로 무덤에 장식한 타조알을 넣어 둔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에서의 부활절 달걀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칠하여 기념하는 것에서 전래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천주교는 1610년에 최초로 교황 바울 5세가 부활절 달걀을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공식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공표함으로 교회 행사에 적용하게 한다.

“오 주여 축복하소서! 당신의 피조물인 이 달걀은 주의 부활의 사건에 감사함으로 먹는 당신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온전한 자양분이 될 줄을 믿습니다.”

(위키피디아 영문판 Easter egg 참조)

 

이와 같은 천주교 특유의 미신적이고 이교도적인 풍습이 부활절 달걀을 나누어 주는 퍼포먼스인 것이다.

 

부활절에 달걀을 나누어 주는 일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다 천주교에서 시작된 것이고 만들어 낸 것이다. 

 

그중에 하나는 십자군 전쟁 때에 전쟁에 참여한 어느 군인의 아내가 동네 사람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부활주일 아침에 달걀에 색을 칠해서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가 삶은 달걀에 채색해서 자기 집의 가훈을 거기에 써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가 그 달걀을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사에게 건넸는데, 그가 자기 집의 가훈에 기록되어 있는 달걀을 알아보고 아내를 찾아왔다는 일화로부터 시작한 것이 부활절 달걀을 나누어 준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에서 만들어 낸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 주일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삶은 달걀을 여자들과 함께 먹기 위해서 가져갔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순간에 그 달걀이 붉은색으로 변했다고 해서, 그로 인하여 부활절에 채색한 달걀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또 한 가지 다른 일화는 막달라 마리아가 로마 황제를 찾아가서 “그리스도는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황제가 받아서 말하기를 “저기 식탁에 놓여 있는 달걀이 붉은색으로 지금 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즉시 그 달걀들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것이 부활절 채색한 달걀을 나누어 주는 일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앞의 사건도 믿음이 안 가는 이야기지만 뒤의 두 글은 있지도 않은 전혀 미신과 같은 꾸며낸 이야기며 천주교의 여타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말들과 미신적인 요소를 뒷받침하고 증거하는 것들이다.


 본래 나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예수를 믿으면서 부활절에 달걀을 나누어 주는 일에 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그것은 아마도 내 영이 그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부활절 아침에 삶아서 죽인 달걀을 나누어 주는가?', '그것을 부활의 상징이라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어찌 부활의 관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항상 가지곤 했다. 나는 그와 같은 일을 한 적도 없지만 그런 것을 받는 것도 싫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천주교의 왜곡된 잔재를 주님의 교회에서 몰아내고 교회 안에 인본적인 퍼포먼스를 몰아내어야 한다. 믿음은 퍼포먼스가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퍼포먼스로서의 예배나 행사나 기도나 찬송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잃어버리게 한다.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행사들을 버리고 주님의 임재 앞에 진실함으로 엎드려 불쌍히 여겨주심을 간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야 중심의 진실함 원하시는 주님이 부활절 아침에 제일 먼저 만나주신 마리아와 같이 나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만나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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