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집 식당 옆자리에 세상사람들같은 사람 셋이서 냉면을 먹고 있었다. 얼굴의 안색은 다들 어두워 보였는데 그들은 주로 먹는 이야기를 하는것 같았다. 한사람은 한 육십쯤되어 보였고 나머지 둘은 사십대 중반과 후반처럼 보였다. 그중에 한사람이 이해가 가기전에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말하면서 그소원이 냉면을 먹는 것이었는데 오늘 이해 마지막날에 그것을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중 젊은 사람이 “할렐루야”하는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대화를 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저으기 실망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자 딸도 놀랬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서 눈을 동그랗게 크게 떴다. 그들이 먼저 먹고 자리를 뜬후에 “야 아무래도 저사람들은 가짜들같다. 요즘에는 가짜 목사들도 많아”라고 내가 말을 하면서 딸이 알고 있는 목사이야기를 하면서 “그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야 구원을 받았으면 주님을 따라가야지 사람을 따라가고 조직에 충성하고 자리를 탐을 내고 아무래도 구원을 받은 사람같지가 않아.”

 

요즈음 형제된 목사님들과 대면하면 자주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60년대에 다녔던 교회에 가짜들이 많았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한다. 나도 가짜였지만 나를 가르쳤던 주일학교 반사들도 가짜였다. 나를 가르쳤던 장로님도 가짜였고 교인들이 “우리목사님은 기도를 안한다” 라고 말했던 인자하셨던 할아버지 목사님의 후임으로온 젊은 목사님도 가짜였다. 그리고 그후에 대학교 서무과장을 하다가 오십이 넘어서 목사가 되어서 오신 분도 가짜가 틀림이 없었던 것은 그목사님의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들은 적이 없었으며 매번 율법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었다.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설교에 교인들은 생기가 없었고 장로들은 “우리가 죄인이냐?”고 대들기도 했다. 그리고 교인들은 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바랬지 주님을 닮은 목사를 바라는것 같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교회안에 얼마나 많은 가짜들이 있을까?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다. 내가 오래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자기아들을 후임으로 앉히기 위해 온갖 불의하고 불법한 짓을 많이 했는데 그아들목사가 부임해서 심방을 하는데 앉았다가 일어날 때마다 담배냄새가 나서 교인들이 괴로워한다는 말도 들었다. 같은 교회의 부목사중에는 어느 경솔한 장로가 회의중에 부교역자들이 게으르고 나태해서 다 갈아 치워야 한다고 말하자 내옆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그건 생존의 문제인데....”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아 이사람은 생존의 수단으로 목사를 하는구나.” “이사람이 구원이라도 받은 성도라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났다. 어떤때는 교인이라며 장로요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마치 내가 해골떼 속에 앉아 있다는 불쾌한 생각이 들정도로 지금교회안에는 가짜들이 많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다. 때로는 아무개 장로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을 보면서 “이것도 이상한 놈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떤때는 자기를 목사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것도 가짜가 아닐가?”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갔던 지방에서는 나를 태우고 가는 목사님이 한교회를 가리키면서 “장로님 저교회는요 얼마전에 크리스마스때에 ‘기쁘다 산타 오셨네’를 프랑카드로 크게 써붙였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근방의 교회에서는 목사가 자살을 했는데 교인들에게 쉬쉬하며 입단속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도시의 소방서원이 그시체를 처리하였는데 그의 친구인 그교회 교인에게 그교회를 떠나라고 권면을 하더란다. 그는 물론 성도도 아니고 교인도 아닌 소방관이었다. 이사람의 마음에는 자기 친구가 뭣도 모르고 그런 교회를 다닌다고 한참 불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떠나라고 권면한 것이다.

 

목사들이나 장로들 교인들중에 가짜들이 교회안에 많은 것같다는 이말은 그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서는 전도를 못하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부담이 되고 양심에 가책이 되는 것이었다. 내말은 전도를 안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100%가짜라는 말이다. 주님앞에 계산할 열매가 없어도 마음이 불편하거나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100%가짜라는 말이다. 말씀을 모르면서도 장로라고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도 가짜이다. 설교를 하면서도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설교하며 남의 설교집을 베껴서 하는 것은 스스로 가짜가 아니지를 하나님앞에서 엄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자니라.”(고후 13:5)

 

목사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버리운자 된다면 목사가 무엇이 소용이 있는가 생각하여 보라. 장로가되면 무엇하는가 말씀도 모르고 성경도 한번 진실하게 읽어보지도 못하고 장로가 되었는데 그안에 예수가 없는 가짜라면 그래서 주님께 버림을 받기로 정해진 장로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주님은 아침에 베다니에서 나오시면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나무는 이스라엘이다. 주님이 예루살렘의 패망을 미리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열매를 맺을수 없는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다 예루살렘을 황폐케 하셨다. 성전을 가리켜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3)하신 주님은 같은 하나님의 성전을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8)고말씀하신다. “내집”이 너희마음대로 더럽혔기 때문에 이제는 내집이 아니라 “너희 집”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그로부터 40년후에 말씀하신대로 돌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 드리우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버리고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렇게 원가지들을 아끼지 않고 버리신 이유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가 교만하고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아끼실 리가 만무하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31)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가 갈곳은 불속 밖에는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9)

 

진자와 가짜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열매이다.

나는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았을 때에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 모른다. 전도해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열매가 없는 것은 참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전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열매가 없으면서도 부끄러워할줄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가짜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

 

종말론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종말론 학자들과 신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중에 대부분은 종말론을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점점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계시를 받아 기록한 요한은 복음전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서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은 것이 요한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핍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이세상사람들처럼 살지 않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 인격과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핍박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증거는 전도를 말한다. 오늘날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전도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전도를 못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다 하나같이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고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순교했다. 그당시에 전도를 못한는 목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가짜로 여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며 성도들앞에서 한마디도 할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 다. 그당시에 전도를 못하는 장로가 있었다면 그것은 확실한 가짜로서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장로가 아니라 사기꾼일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교회에서는 전도를 하고 전도의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는 것이다.

 

첫째로 가짜의 증거는 열매가 없는 것이다.

 

나를 보고 예수를 믿고 나를 보고 예수를 따르고 닮은 확실한 열매가 없는 사람은 주님이 그사람을 가짜로 여기신다. 주님은 이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수많은 가짜들과 진리의 말씀으로 씨름하셨다. 주님은 가짜들을 가장 지긋지긋하게 미워하신다. 나무는 열매로 안다. 열매없는 나무는 가짜인 인것과 같이 열매 교인은 성도가 아니고 하나님나라의 백성도 아닌 가짜교인이다.

 

둘째로 열매가 없는 것은 전도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를 못하는 것도 가짜가 아닌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도를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고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인격과 생활을 고치시고 주관하시는 생활을 살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입술도 마음도 생각도 다스려지는 성령으로 절제되어지는 생활을 살아서 죄를 이기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죄를 사함받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복음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복음은 인격이요 생활이라고 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도 아는바와 같으니라”(살전1:5)

 

이와같이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보여주는 것이 참복음이다. 그와같은 복음만이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전하여지는 복음이요 열매를 맺는 복음이다.

 

중간정리를 해보자.

열매가 없음은 전도를 못하기 때문이다 전도를 못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를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서 나보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서 성령으로 사는 것을 본을 보고 닮는 것이 교회생활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실재가 있는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돈의 가치가 교회에 중심가치로 떠오르고 교회도 사람들도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단체로 전락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서 교회같지 않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건한자들이 끊어지고 의인들이 교회에서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 영적인 예배 영적인 설교 영적인 기도 영적인 찬양들이 다 물건너 갔다. 인본적인 설교와 사람을 흥분시키는 복음성가 혼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예배 그리고 세상가치를 존중하는 목사와 장로와 교인들이 교회를 인간중심의 조직으로 변질을 시킨지가 오래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이 교회인줄로 착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짐이 곧 국가”라는 옛군주국가 시대의 사상과 가치로 “목사가 곧 교회”라는 가치로 교회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적 의무만을 강요하고 교인들로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죄책감가운데 빠지게 한다. 주님이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과 같이 교회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 된 교인들이 허다하다. 은혜도 주지 못하면서 의무와 짐만을 지워주니 영혼의 자유는 고사하고 몸이라도 자유하고 마음이라도 부담없이 종교생활을하고자하는 가짜들이 천주교로 피신을 가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망해가는 천주교에 종교인들을 공급하는 개신교의 실적(?)으로 전세계 중에 한국의 천주교만 교인수가 늘어서 한국천주교가 교황청의 특별연구대상이 된지가 오래 되었다.

 

교회는 그런게 아니다.

 

“두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마18:20)

 

교회는 주님이 계신곳이 교회이다.

 

주님은 아무데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두명만 모여도 세명만 모여도 그들중에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인격과 행실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름에 목숨을 걸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수만명 모여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한낱 종교집단에 불과한것이며 종교단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절에가도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으며 여타 종교단체를 가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님의 이름에 맞는 거룩한 행실과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교회안에서만 찾아 볼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왜 모르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런사람들에게 할수 있는 말은 그들만의 교회를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모른다는 말이다. 옛날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집을 “너희 집”으로 만들어 놓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옛날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주님이 그말씀을 하신 것같이 그들은 교회의 전문가이지만 순수한 성도들 두세사람의 모임을 목말라하시는 주님의 마음도 뜻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모른다는 말이다.

 

자 다시 정리를 해보자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를 못하고 전도를 못하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이다. 성도 한사람이 하나님앞에 설때에 어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나를 물어 보지 않으신다 어느 목사와 신앙생활을 했는지도 주님은 관심이 없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를 주님은 계산하신다. 열매를 보면 그사람이 전도를 하는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다, 전도를 하면 그사람이 하나님나라를 살았는지를 알수 있고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은 것을 보면 그가 교회를 아는 사람인지 진정한 교회생활을 했는지 헛껍데기로 종교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창찬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종교생활을 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러면 교회를 모르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성령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령에 관해서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으로 사는 것은 성령을 좇아서 사는 것이며 모든 크고 작은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을 사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그것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5:25)

 

이와같이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모르는 것이다.

성령을 모른다는 것은 곧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오시면 주님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신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하시겠다고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자.

열매가 없는 것은 전도를 못하기 때문이다.

전도를 못하는 것은 천국생활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천국생활을 살지 못하는 것은 교회를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를 모르는 것은 성령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도의 열매가 있으면 무든 것이 다 온전하지만 전도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어디선가 잘못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이 가까이 올수록 복음전도자로 이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축복이다.

새해에는 전도를 그만두었던 예비군들에게 각성을 주셔서 다시 훈련을 받고 잃어버렸던 열매를 맺던 가지의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은혜가 한사람도 빠짐이 없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처음 예수를 믿자 마자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때문에 항상 근심하고 눌려서 살았다. 이제보니 그것이 신앙양심인것 같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