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목회자 전도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40명쯤 참석을 했는데 평신도가 목사들을 가르치니 저항을 단단히 받았다. 어떤 분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손을 들고 일어나서 내가 전하는 말씀에 터무니없이 감정적인 반박을 했다가 주변사람들에 의하여 제지되었다. 그는 마지막 시간에 천국에서 만나보자”(I will meet you in the morning, Just inside the Eastern gate;) 찬송을 부르며 다 같이 통곡하고 울 때에 앞으로 나와서 내 목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면서 미워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첫 회부터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날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목사들의 중대하고도 치명적인 결함은 전도를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직장 가까운 외국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미국목사와 식사를 하면서 내가 길에서 전도하는 것을 간증했는데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아주 의아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에 마침 길거리에 승용차 본넷과 지붕위에 구두를 올려놓고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저렇게 장사를 하듯이 전도를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니 그는 끝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와 헤어졌다. 그를 뒤로하고 걸어오는데 주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이 나에게 들려왔다. “예 저 사람은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는(love to preach) 사람이야. 그에게는 그것밖에 없어.” 그는 전도에 관한한 무능한(incapable) 목사이었다.


신학도 하고 목사안수도 받고 교회도 맡아서 목회를 하고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설교도 하는데 교회밖에 있는 죄인들에게 할 말이 한마디도 없고 전도를 못하는 것은 사도행전교회와 같은 정통교회에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며 괴이(怪異)한 일이다.(ridiculous and weird)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교부시대 이후로 지나간 이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소위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함으로 교회가 타락하고 퇴화된 것이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교회성도들이라면 오늘날 전도를 못하는 어떤 목사를 보고 목사인지 알아보지 조차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은 그런 사람을 목사라고 하시겠는가? 전도는 목사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일반성도에게도 기본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도를 못하는 목사는 기본이 안 된 사람이요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 전도하지 못하는 목사를 목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부르심의 목적이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전도를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이 없는 사람이든지 부르심을 받고도 주님을 따라가지 않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질적인 충족이 되지 않은(disqualified) 불량한 사람이다. 전도하지 못하는 목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장로도 집사도 마찬가지이다. 가톨릭에서도 전도를 하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가 아닌 교황이 되고 추기경이며 사제며 수녀들이 된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목사를 못해도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신학교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경도 전도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또한 그것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학과 신학교의 전체적인 결함이다. 그것은 일부가 아닌 전부가 잘못된 것이다.


어느 한국에서 유명한 조직신학박사가 전도훈련을 받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신학생들을 데리고 학교에서 가까운 사거리에 나가서 전도를 하다가 신학교에서 쫓겨나서 영국으로 갔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경우가 무척 많았지만 미국에서도 신학교수가 전도훈련을 받고 전도를 한다는 이유로 다음 학기에 강의배정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신학교는 전도를 하는 주님의 제자가 아닌 전도를 못하는 목사들을 배출하는 곳이다. 그와 같은 악한 짓을 행을 하는 사람들은 만약 오늘날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주님까지도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쫓아낼 사람들이 분명하다

 

목회자 전도훈련에 오신 분들은 목사지만 전도를 못하기 때문에 전도를 배워서 교회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왔다. 그러나 전도는 누가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배우는 것도 아니다. 전도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 사람의 인격과 생활속에 그리스도가 보여지는 사람이다. 그것을 성경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한사람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그의 생활속에 예수의 증거가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내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전도는 방법이나 기술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신분이요 전도는 그 증인의 생활이다

 

주님은 전도를 배우려고 목회자세미나에 온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다. 그들 대부분이 구원조차 못받은 영혼들이었기에 교회안에서도 이때껏 들어 보지 못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나와 같이 그들도 교회와 신학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전에는 전도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듣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갔다. 밤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날마다 짓는 죄를 속죄함으로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하는 생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고 저마다 잘못 살았다고 회개하는 역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테이블마다 화장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을 했지만 일평생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이전에는 찬송가를 그렇게 실컷 불러보지도 못하고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리면서 찬송을 불러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또 기도원에 가서도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본적이 없다고 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찬송만 불러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일어나서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pass me not, O gentle savior, here my humble cry;)를 부르면서 영어가사와 같이 죄인 부르실 때에 나를 지나쳐 가지 말아달라고 목 놓아 울면서 찬송을 불렀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Father, I stretch my hands to Thee; No other help I know; If Thou withdraw Thyself from me, Ah, whither shall I go?)를 부르면서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절(mournful)하게 부르짖었다.


그들은 교회로 돌아간 주일날 강단에 서서 우느라고 예배를 진행하지 못하고 설교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현실을 깨닫게 되니 설교준비도 할 수 없다고 우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미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영국에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인도 일본 중남미에서 어디서든지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참석한 사람들의 가정이 회복되었다. 이혼하기 직전의 목사들의 가정이 회복 되었다. 별방하는 목회자 부부들이 사랑이 회복되고 합방하는 일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해외에서까지도 늦둥이를 낳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교인들이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교인들의 가정도 회복이 되었다. 교회안에 문제들이 말끔히 회복되는 일도 당연히 뒤따랐다.



(*.236.1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