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에센스

 

우리는 에센스라는 단어를 화장품 선전에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에센스라는 단어의 뜻은 필수 불가결이라는 뜻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화장품을 말할 때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화장품을 말할 때에 쓰이는 것이라고 짐작이 간다. 화장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에는 에센스가 있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교회의 에센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에센스를 생각하지 않고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허망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에센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랑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4-5)

 

주석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이 말씀을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십자가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4절의 처음 사랑과 5절의 처음행위는 같은 것이다. “버렸느니라는 헬라어 압히에미보내다”, “떠나 보내다”, “포기하다라는 뜻의 단어이다. 그러므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부분은 너에게 있던 처음 사랑을 떠나 보냈느니라로 번역 할 수 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는 말씀은 보내 버린 처음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는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문맥상으로 볼 때에 버린 것을 다시 찾아 가지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처음 행위행위는 헬라어 엘곤인데 노역또는 노력이나 수고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행위처음 수고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되면 처음 사랑이나 처음 행위가 처음 사랑의 수고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처음 예수를 믿고 에베소 교회가 세워질 때에 그들에게 있었던 서로 간에 사랑의 수고를 버린 것을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어가 아가페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이나 처음 수고는 교회 안에 있었던 성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마치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교회주의자들인 캐톨릭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 사랑이 성도들의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냉랭하고 사랑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잡히시던 날밤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주문하시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가페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0-12)

 

가끔 길을 가다가 교회의 차량에나 건물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글를 쓴 것을 보곤 하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가고 들어오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라는 말이나 글도 뜬 구름 잡는 것과 같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처음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었다. 그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2:44-47)

 

4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4:32-37)

 

에베소 교회도 처음 복음을 받아 열두어 사람쯤 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주님은 처음 사랑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처음 사랑을 보내 버린 것이 요한에게 그리스도의 예언을 주실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교회로서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처음 사랑의 수고를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다시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의 절대 명령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갈수도 없는 처음 사랑을 버리기 전의 모습으로 100% 돌아가야 하는 회개를 명령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1900년 전의 에베소 교회의 사랑이 없는 현실은 그때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문제인 것이 엄중한 현실이 되고 있다. 그보다 더 중한 문제는 주님이 오늘날의 교회를 향하여 생각하라는 명령도 아니 하신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도 아니 하시고 침묵하시는 것이 오늘날의 전 세계 교회의 현실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회개하기는커녕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하고 예수님의 시대와 같이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는 진실한 주의 종들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히 전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무식한 일을 아무 생각 없이, 두려움도 없이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극소수를 제외한 일반적인 모습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여 처음 행위를 다시 가지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일을 에베소 교회에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5)

 

사람들은 촛대의 뜻도 모르고 막연히 주님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만을 가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주님은 1장에서 촛대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20)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는 말씀대로 촛대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교회를 옮겨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로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자칭 교회나 타칭 교회는 가능하겠지만 주님이 교회라고 칭할 수 없는 종교단체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상 빠진 단어가 있다. 신속히는 헬라어 타코스라는 단어인데, “네게 임하여네게 신속히 임하여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네게 신속히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로 번역이 된다. 주님이 신속히 임하심으로 하시는 일은 촛대를 옮기는 것인데 촛대가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교회를 옮겨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의 행위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은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에서 교회를 신속히 옮겨버리심으로 그것으로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버린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버리시는 일을 지체하지 않고 신속히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허울만 좋은, 교회가 아닌 교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미 벌써 주님이 촛대를 옮기시고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번듯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건물은 교회의 에센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목사가 있고 교인들이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적인 사랑, 곧 교회적인 사랑(church love)이 있어야 교회이다.

교회는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이 두 세 사람이라도 서로 사랑해야 교회인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8:20)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은 주님의 이름은 사랑의 이름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두 세 사람만 같이 있으면 그것이 교회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아무리 크고 구름같이 많은 교인들이 모여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도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면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촛대가 없는 교회이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처음 사랑이 있어서 촛대가 있었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처음부터 촛대가 없이 세워진 교회들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처음 사랑이 없는 교회로 시작한 것을 말한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교회인데 사랑하려고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든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하려고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하는 목회만을 하는 이들이 천지에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부터 아가페 사랑이 없이 시작된 교회들이 많은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님이 옮길 촛대도 없이 교회가 아닌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조금 전에 전철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던 권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남자 권사님인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먼저 알아보았는데, 지금은 다른 교회를 나간다고 하면서 지금도 그 교회를 여전히 다녔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자기 아내가 그렇게도 교회를 옮기자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교회가 전도를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아가페의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그 사랑을 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사랑이 없으니 사랑 없는 전도를 하면서 애꿎게 교회만 나오라고 하는 상술과 다름없는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없는 사랑을 위장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그것으로 교회가 그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사랑도 아닌 것을 가지고 뭇 영혼들을 기망하는 일이다. 영혼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을 하는 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리워지고 천하게 되는 일을 생각도 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사랑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교회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밖의 죄인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목사도 장로도 교인들도 전도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구경조차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라는 말씀 중 생각하고는 헬라어 므네모뉴오생각을 더듬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도들이나 교회는 처음부터 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할 것도 없고 더듬을 것도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이 처음 사랑을 받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나부터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 없이 교회생활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과 교회 안에 사도행전적인 사랑이 전혀 없음에도 마치 그 사랑이 있는 것처럼 속임수로 행했던 모든 외식하는 죄를 회개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해야한다. 사랑 없이 거짓된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교회 일을 하고 성가대나 교사를 했던 것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혹시라도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이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할 정도로 구원조차도 받지 못한 존재가 아닌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뿌리부터 시작부터 자세히 점검을 해봐야 한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이와 같이 권면하고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 13:5-7)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할 것을 명한다. 구원받은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생활하는 믿음, 그리고 열매 맺는 믿음에 있는가를 확증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리운 자들이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에는 너무나 무서운 말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버리운 자가 아닌 것을 너희는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버림받지 않은 것처럼 속이는 악을 행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배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찬송으로 거짓을 노래하며 기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물론 자기가 그런 사람이면서도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버리운 자들이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아무도 버리운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은 믿음에 있는 가를 시험하고 확증을 할뿐 아니라 교회 안에 아가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도행전적인 사랑, 곧 그리스도의 교회적인 사랑이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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