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와 문지기

강의 : 이유빈 장로(요한복음)
정리 : 고병훈 집사

(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목자’는 담을 넘어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 목자는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목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어떤 자라는 말인가? 이당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을 만나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종교와 율법과 교권) 넘어가서 양을 만나고 치리하고 다스렸다. 이유는 양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양을 도적질해서 자기들의 수하에 두고 자기들의 다스림 가운데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기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자기들을 따르도록 하게 함으로 그들은 ‘절도며 강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목회를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서 양들로 하여금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목자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지기는 바로 목회자요 인도자라고 할 수 있다. 문지기는 주님을 위해서 문을 열어야 되고 절도와 강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지기 노릇하면서 양을 잡아먹는 문지기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다. 또 문지기이면서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목자는 오직 주님 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 그중에서 주님이 우리를 일꾼으로 삼아주시고 문지기로 삼아주셨는데 충실하게 주님을 위해서 문을 여는 일들이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로 도망하느니라’ 이 말은 목회자들이 성령에 붙잡혀서 목회를 하면 교인들이 목사님을 통해서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 일어나지만 그게 아니라 인간적인 목회를 하면 교인들이 달아나고 진실한 사람들이 떠나간다. 이유는 목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목사님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때문에 교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나 때문에 교인들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나 때문에 교인들이 주님을 닮아 성장하는 것이 방해가 되고 내가 충만하지 않고 내가 주님의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교인들이 타인의 음성을 듣고 도망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가? 를 돌아봐야 한다. 사람의 말을 듣고 또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말을 듣고 교인들이 도망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목회를 제대로 하면 염소들이 도망을 가지만 목회를 잘못하면은 양들이 도망을 가는데 진짜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애쓰는 양들은 도망을 갈 수 밖에 없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바리새인들이다. 주님을 몰라보고 주님께로 가지 않는 사람들, 문으로 가지 않는 사람들, 담을 넘어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 주님과 상관없이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내가 문이니’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구원을 받고 꼴을 얻는다.
교회를 나오는 사람 중에는 부모로 말미암아, 친구로 말미암아, 종교로 말미암아, 직분의 명예로 말미암아 교호를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말은 목자가 있다는 증거다. 교인들이 꼴을 얻고 있지 못하면 그들이 생활 속에서 목자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 주간 동안 살면서 교인들이 꼴을 얻고 있는지? 말씀의 꼴을 먹고 있는지? 그들이 생활 가운데서 말씀이 깨달아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목자가 있다는 증거지만 꼴을 먹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목자에 인도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주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도적은 자기 욕심 때문에 물건을 훔치는 것이 도적이고 강도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바로 강도이다. 그것처럼 목회자가 자기의 목회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양떼들을 자기 수하에 두고 교인들을 자기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다면 바로 도적이고 강도임이 틀림없다. 목회는 교인들이 주님의 손에 장악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교인들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이다.

그리고 도적은 마귀와 일치한 것인데 양떼들을 죽이고 심령을 죽이고 멸망 받게하고 실족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일들을 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다는 말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사는 생활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 풍성한 생활을 살게 하기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여기서 ‘선한목자’와 반대되는 개념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다. 주님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를 위해서 양을 주관하고 양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들은 극단의 기회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위험이 있는 것 같으면 주님을 죽이려고 하고 위험이 없는 것 같으면 가만히 있고 하며 기회주의 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삯꾼의 정의는 돈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양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삯꾼이다. 선한목자와 삯꾼이 차이는 사랑인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정말 목자처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가 삯군이냐? 아니냐? 를 결정하는 것이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우리가 “삯꾼목자”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삯꾼은 목자가 아니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마귀가 오는 것을 볼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마귀가 양을 늑탈하고 헤쳐도 도와줄 힘이 없는 것이 바로 삯꾼이다. 그리고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이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이 말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또 좁은 의미로 말하면 “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내가 바로 우리에 들지 않았던 불쌍한 양이었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때문인데 이 말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신 다는 것이다.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라는 말은 사랑의 권세를 말한다. 그런데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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