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다 죽어"라는 말은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현실과 가장 맞아 떨어지는 말같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를 돌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과연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제자들에게 한 질문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말에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중에 얼마나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교회의 제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아니라 우리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만을 알 뿐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안에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채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가는 것은 교회를 다녀야하는 것이며 교회를 다니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적인 하늘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늘나라의 권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늘의 권능을 가지고 땅의 문제들을 해결받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들은 여전히 땅의 저주에 얽매여 허덕이는 삶을 살아 갑니다. 

그들은 타고난 저주를 뚫지 못하고 날마다 문제를 생산하면서 그 문제 중 하나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저주이지만 돈이 많은 것도 저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병든 것도 저주이지만 건강한 것도 저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일찍 죽는 것도 저주이지만 장수하는 것도 슬픈 저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교회를 다니는 것도 저주인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인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야 합니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러므로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엎드려 불쌍히 여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너희가 교회를 다니는가"를 따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를 따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하고 생각이 없이 천박한 사람은 경솔한 생각으로 교회만 다니다가 멸망 길을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할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목사들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중에 얼마는 말을 잘해서 목사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로들중에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집사나 권사들중에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났던 사람들중에 거의 대부분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주님에게 "구원을 얻는 이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을 했던것입니다. "적다"는 단어인 "올리고스"는 조금이라는 뜻도 아니고 거의 없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안의 현실이 부인할수 없이 그와 같은 현실입니다.  

전도훈련을 받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도훈련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 다 구원받은 것으로 여겨주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또 전도를 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여겨주는 일들이 팽배했습니다.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그러나 전도를 행위로 하는 거짓된 목사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중에는 귀신에 들린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귀신으로서는 자기 정체를 가리우고 교회를 속이는데에 전도보다 더 강력한 위장술이 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거액의 연보를 함으로 자기를 감추는 종교인들도 있었으며 그들중에도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운다고 다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닌 것이 드러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사람은 회개를 하여 구원을 받지만 단지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아파함으로 우는 사람들은 아무리 울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죄는 회개하지만 아직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삼,사십년동안을 지켜 보았는데 은혜의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릴 줄 모르는 가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를하는 사람들가운데도 자기를 위하여 울지 않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중에는 목사도 많이 있었고 귀신들린 목사나 사모나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나와 함께 일하던 협회 간사중에도 그런 간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중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서넛이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간사가운데는 간증을 하면서 폭풍눈물을 흘리고 많은 사람들을 울게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눈물은 은혜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연민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도 역시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울고 아니 울고는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눈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기를 위하여 피 흘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영적인 거지가 되지 아니하며 여전히 육체의 필요를 찾아서 살고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애통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온유한 사람 곧 말씀으로 길들여지는 생활이 없는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없는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요 하나님앞에 불쌍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여서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고 세상문화로 자기를 더럽히며 사는 것도 구원을 받지 못해서 입니다. 화평케 하지 못하고 서로 공격하고 정죄하고 원수를 맺는 것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생활이 없이 육체의 안전만을 도모하여 사람들과 진리를 타협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주를 따르는 착한 행실이 없는 것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요 교회에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지 않고 편애하고 편벽되이 행하는 것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말씀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버리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요 몸으로는 죄를 아니 지어도 마음으로 간음하고 눈으로 간음하고 생각으로 간음하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시침을 떼는것도 구원을 받지 못해서이며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고 미련하다고 하는 것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맹세를 하는 것이나 악한자를 대적하는 것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며 원수라고 미워하는 것도 구원받지 못해서이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로 외식하는 것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며 응답받지 못하는 헛기도를 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인 것은 그가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사요 장로라고 하면서 재물을 땅에다 쌓아 두고 사깃군에게 빼앗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여서 하나님과 재물을 두주인으로 같이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가난하여 종일 먹을것과 입을 것과 마실것을 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목사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요 먹고 살기 위해서 간사를 한 많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공통되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함으로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생활을 구하지 않았으며 먼저 그의 의를 구함으로 날마다 짓는 죄를 속함받아 처음 받은 의를 회복하는 속죄생활을 전혀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고 남의 죄를 보기 때문에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남의 허물을 비판하는 외식을 행하는 자들이었으며 개와 같이 돼지와 같이 거룩한 것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은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를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구할줄 알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이었으며 거짓선지자들을 조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를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요한도 말씀에 순종하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을 말씀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나쁜 열매를 맺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인데 그것은 "모로스"로 "얼간이" "정신 나간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이 세상에 썩어질 것에 자기의 시간과 몸을 허비하는 생활을 살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살지 못하는 얼간이가 되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나 하나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앞에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면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 받았는지 시험하고 확증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버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할 때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그중에 누군 가를 불쌍히 여겨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불쌍히 여겨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중에 소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주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들어가는 사람은 고사하고 찾는 이도 적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에서 재물이나 좀 모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교회를 다녀도 심판받고 지옥갑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통째로 지옥에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때에 각자가 시급히 할 일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을 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다가 지옥에 가면 교회도 다니지 않고 지옥에 온 사람들보다 더 억울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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