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불행하게도 이 땅의 교회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꾸로 가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이 그때에도 교회는 하나님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교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단지 지식으로만 듣고 배우고 가르치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지키려고 애를 쓰며 남들에게 행위를 요구하며 그렇게 남보다 율법을 애써 지키는 것이 남에게 자랑이 되고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육체로서 행하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되는 삶을 살았다. 믿음은 사는 생활이 아니라 생각이고 관념이었으며 제사와 기도와 금식등등 모든 의식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 드려지는 그냥 그들만의 일방통행식의 관습이 되고 형식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와 그 율법주의로부터 오는 행위주의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 없는 교회로 전락을 시키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말살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노력으로 힘쓰고 애씀으로 거꾸로 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의로 인한 교만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진리를 배척하고 온갖 지혜를 저버리는 어리석음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눈이 멀고 귀가 가리어져서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어두움가운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와 같이 지금 현대교회의 가장 큰 악함도 은혜가 아닌 이와 같은 행위를 강조하고 가르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율법은 선하고 온전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 앞에서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하고 온전한 율법과는 달리 율법주의는 은혜를 도말하는 악하고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는 은혜를 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은혜를 뒤로하고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상실하고 은혜를 구하지 않고 날마다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바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주의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소망이 없는 죄인에게 거저 값없이 주신바 은혜를 망각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을 부인하고 다시 구원받기 이전의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육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율법주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하는 것이며 교회의 복음의 진리를 앗아가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마다 이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책망을 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서신서마다 그의 마음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이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책망하고 있다. 율법주의를 다른 교훈, 다른 복음이라 하여 규정하고 그와 같은 율법주의를 전파하는 자들을 거짓 선생이요 거짓형제들이라고 구분을 지어서 말하며 책망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주님도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다른 복음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곧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다른 말씀에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은혜는 언제든지 교회로 바로가게 하지만 반면에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교회로 거꾸로 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면 율법주의가 왜 교회에 해가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율법주의는 진리가 없는 지식

진리는 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항하는 말로서의 지식은 생활도 행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지식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영적인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는 것이다. 누구와 사는 것인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동반자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화하며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로부터 응답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살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환경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진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여기고 가르친다. 진리는 사는 것이지만 지식은 생활이 아니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진리는 생활이 되는 것이지만 지식은 생활도 아니고 생활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며 머리에서 나와서 머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로 사는 것 곧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판단을 가지고 곧바로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는데 자기에게도 요구하고 남에게도 요구하지만 그것을 행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육체를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생활은 진리로부터 오는 것이다. 진리(眞理)는 ‘참진’, ‘이치이’ 곧 “참된 이치”를 말한다. 참된 이치는 쉬운 말로 하면 참된 방법이다. 곧 진리는 사람이 사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방법이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사는 영적생활을 사는 것은 진리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로부터 오는 지식은 말은 같고 성경말씀도 같지만 그 말씀으로 살아지는 생활은 없는 것이다. 말은 같다. 지식도 같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듣고 배운 그 말씀대로 살고 행위와 생활로 나오는 지식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말씀을 읽고 받으나 그 말씀으로 인한 생활과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성경도 읽고 말씀도 듣고 감동도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예배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 들은바 말씀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지만 응답받는 기도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겉모양으로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것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은 기도에 응답이나 기도로 인한 성령의 역사를 찾아 볼 수가 없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오래해도 변화되는 인격이나 생활은 없는 것이다. 설교하고 가르치기를 잘해도 자기는 한손가락도 까딱하지 않고 말로만 하고 입으로만 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격체이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리를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의 제자이었기에 주님 앞에 나아 올 때에도 그는 좋은 선생을 찾아왔고 말씀의 새로운 지식을 찾아 왔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선생도 지식도 아니고 거듭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한 것을 역설하신 것이다. 여기서 거듭나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 생명 곧 영적생명으로 사는 영적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새로운 말씀의 지식을 구하는 수많은 니고데모가 있고 더 좋은 선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교인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 누가 율법주의적인 교인인가?
지식은 풍부한데 말씀으로 사는 진리가 없는 사람이다. 말씀을 머리로는 많이 알고 있는데 그 아는바 말씀대로의 순종이 아니 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교회마다 교인들에게 필기시험을 보게 한다고 하자. 간단하게 OX 문항을 내고 전도를 해야 하는가? 안해야하는가? 라든가 말씀을 읽어야 하는가 안 읽어도 되는가?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하나? 쉬어가면서 해야 하나? 성도들을 사랑해야하는가? 안해야하는가? 자녀들 사랑과 부부간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미워하는 것들 헌신하는 것들과 감사하는 것과 항상 기뻐하는 것 등등 몇 가지의 질문을 문제지로 만들어 시험을 본다면 교인들마다 틀리는 것이 없이 하나같이 다 만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살고 순종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도 진실한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다른 교인들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한구석에 “이게 아닌데...”, “무엇인가 잘못되었는데...”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가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이다. 행위는 단편적일수도 있고 일시적일수도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지식으로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은혜로 되어지는 생활은 지속적인 것이다. 은혜라는 말의 뜻 자체가 내가 못하는 부분을 주님이 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해주신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깨닫고 살고 따르고 순종하는 모든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주체가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수를 믿기 전의 죄인의 삶이 실패하고 황폐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자기의 육체로 선한 삶을 살고 양심대로 살려고 하였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육체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상태를 우리는 죄라고 말하지 않는가?

당신이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도 믿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지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니다. 말씀을 읽는 것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를 따라 되는 것이지 내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본 사람은 다 체험으로 알고 있다. 기도를 하는 것이나 전도를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전적인 은혜로 되어 지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참고 인내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이 이와 같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를 믿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도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날마다 사는 것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은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로 말미암는 행위는 믿음도 없고 생활도 없이 할 수 있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행위를 요구하지만 은혜는 반드시 생활을 요구한다. 생활이 변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믿음으로 사는 삶도 아니고 은혜를 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배우고 터득하고 깨닫는 머리에만 들어가는 혼적인 지식은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또 힘쓰고 애쓰며 노력하면 세상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지식으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바 말씀대로 살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얻는 삶은 절대로 살수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머리로는 아는데 행실로 생활로 옮겨지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곧 가짜라고 말하고 있다.

2. 율법주의는 행위를 요구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혼란 가운데 빠져 있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머리로는 빤히 알고 있는데 그것이 행함으로 생활로 행하여지지 않고 살아지지 않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머리로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땅위에 단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효도가 아니 된다. 술,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끊을 힘이 없다. 마약도 나쁜 습관도 불량한 친구도 끊어야하는 것을 알고 고민을 하지만 그것이 끊어지지 않아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사랑해야하고 용서해야 하는 줄을 다 알고 있으나 실제로 사랑하는 것과 용서하는 생활이 안 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가?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내가 듣고 아는 말씀이 행하여지지 않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지식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진리이다. 진리는 행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지지가 않는 것이다.

진리로 살지 못하고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보여주고 본받게 할 영적실재가 없기 때문에 지식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육체의 행위를 보일 것을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전도해라”, “기도해라”,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라”, “사랑해라”, “말씀을 읽어라”, “봉사해라”, “헌금해라”, “섬겨라”, “주일성수해라”, “십일조를 해라”, “건축헌금을 해라” 등등의 행위를 강단에서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처럼 가르침으로 행위의 동기를 제공하려고 한다. “무엇 무엇을 하면 복을 받는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말한다. 또 “무엇 무엇을 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못하면 형통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행함이 없으면 지옥간다.”라는 말로 두려움을 안겨 준다.
행위의 결과로서의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무엇을 하라고 하는 말들은 틀린 말은 결코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에 있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자기들은 한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 악함을 책망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바리새인들의 말은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요구하는 행위주의에 빠져 그렇게 살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헌금이나 봉사를 하고 그것이 믿음인양 교만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도가 아니라 전도의 행위에 빠져서 성령의 역사도 열매도 없는 전도를 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들이 얼마나 허다하며 그로인해 영적인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당신은 그렇지 아니한가? 생각하여 보라. 예배가 행위가 되고 예배에 빠지면 저주를 받을 것처럼 말하는 자들과 예배를 의무라고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일년에 몇 번 교회 나오기 등의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도 예배 때에 주님을 흡족히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빠진 사람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예배도 전도도 기도도 헌금이나 봉사도 내 육체의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해주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은혜에 속한 것이지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나의 육체의 행위로 하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불쌍하고도 부질없는 짓인가? 이러한 행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기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음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3. 율법주의는 외식을 하게 된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자기에게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서로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자기는 행하지 못하지만 타인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맞게 행해줄 것을 요구하고 때로는 강요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은 행하지 못하면서도 남에게 행위를 요구하고 가르쳐야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는 행하고 있는 것처럼 외식하는 일들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남에게 행위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행하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지를 못하니 행하는 것처럼 사람을 속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1-6).

바울도 유대인들의 외식을 이렇게 책망하고 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17-24).

그러나 믿음으로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외식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도록 아름답게 꾸밀 이유도 없다. 그냥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보여주고 그대로 닮고 따르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행위를 강조하거나 자랑할 수 없는 것인 그가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어진 것이요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알기 때문이다.

4. 율법주의는 사람의 칭찬을 구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자신들이 애쓰고 힘을 써서 행위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 하고 남에게 대접을 받아야할 자격이 있고 칭찬과 박수를 받아야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존경받고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높임을 받고자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눅 20:45-47).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면 서운하고 알아주면 기뻐하는 것이 곧 사람의 칭찬과 환심을 구하는 증거인데 그것이 은혜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로 한 것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가대 찬양을 하고 교인들이 박수를 쳐 주지 않는다고 슬퍼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성가대나 교사들이 아침도 먹지 못하고 봉사하고 애쓰는 것을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섭섭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의외로 많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텐데 육체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힘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목사님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교인들에게 박수를 받기를 좋아하며 생색을 내는 헌금을 하고 사람에게 보여 지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부는 일들이 믿음으로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닌 육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벌이는 것이다. 또 교인들에게 육신적으로 경쟁을 붙이기 위해 성미나 전도열매나 여러 가지 그라프를 사용하는 것들과 헌금을 많이 한 사람들의 액수를 공개하는 것 등이 교인들의 육체의 행위를 자극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5. 율법주의는 판단하고 정죄한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의로 여기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래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감추고 외식을 하며 자기들이 행한다고 하는 행위들을 가지고는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은 반드시 칭찬을 받아야 하고 남이 못하는 일은 가차 없이 공격하고 정죄를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가 한일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되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여러 일로 여러 가지로 정죄한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행위로 말미암는 율법주의로 자기의 의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6. 율법주의는 은혜를 싫어하고 핍박을 한다.

은혜는 자기의 노력이나 공과를 완전히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육신의 열심과 행위로 무엇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을 감히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저들은 자기의 공로로 사는 사람들이요 자신의 행위를 아름답게 여기는 사람들이지 주님의 전적인 십자가의 은혜를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말하고 강조하는 것을 싫어하다 못해 그런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전성기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어찌 보면 저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옛날과 같이 오늘날에도 그 율법의 지식의 잣대로 때로는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대로 사는 의인들과 주의 제자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단지 그것 곧 지식과 교리만으로 자신들이 진리 편에 서있다고 굳게 믿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첫째로 생활의 주체의 문제이다.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는 모든 행위의 주체를 육체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향해서 아는바 지식을 따라 행할 것을 강요하는 일들을 쉽게 쉽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행위와 생활의 주체를 육체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육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육신은 진리에 속한 아무행위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애쓰고 힘을 써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위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은혜요 믿음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성령이 역사해야 기도도 할 수 있고 성령이 역사해야 전도도 할 수 있으며 성령이 역사를 해야 사랑도 되고 원수까지도 이뻐 보이는 역사가 일어나며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다 성령으로 하는 것이다.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관점은 율법은 행위의 주체를 인간의 육체로 보지만 은혜는 행위의 주체를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로 율법주의가 요구하는 행위는 지속성이 없고 일시적이고 충동적이며 일회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활이 아니라 행위이기 때문이다.

전도훈련을 받고 열심히 전도를 하던 어떤 권사님이 요즘은 전도를 쉬고 있었는데 대화 중에
“장로님 저도 다시 전도를 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대개 이런 분들은 묻지도 않은 답을 들고 나오는 이유가 혹시 저 장로님이 나를 전도를 중단한 사람으로 여기면 어쩌나하는 마음에서 지레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시는데요?”
“예 새벽기도 끝나고 목사님 테이프를 들고 나가서 신호를 기다리는 운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권사님 그건 전도행위지요. 전도는 생활이지 행위가 아니잖아요.”
“.......”

나중에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 권사님은 자기가 전도하는 것을 전도행위라고 했다며 시험에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전도는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고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전도할 마음 곧 영혼 사랑을 주시는 것도 전도요 전도를 하게 하시는 것도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하시고 붙여 주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요 할말을 입에 넣어주시는 것도 아무도 능히 당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주시는 것도 성령님 이시요 말씀을 전할 때에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시며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잠시적으로 전도를 흉내 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으로 전도하는 사람은 전도를 중단할 수가 없고 그것은 지속적인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 행위로 하는 것은 반드시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훈련을 받고 전도를 하다가도 중단을 하는 것은 그것이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로 하던 전도행위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시작을 하였지만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이 안되는 관계로 어느 순간부터 육체로부터 나오는 행위전도로 변질이 되어 전도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말씀을 보고 깨닫는 것이나 기도나 봉사나 주일성수나 헌금을 하고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이 육체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불신자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육체의 행위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한다면 이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은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믿음은 생활이며 사는 것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생활을 말하는 것이며 그 지속되는 생활로부터 나오는 것이 예배며 찬송이며 기도며 전도며 봉사이며 헌금이며 감사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결핍된 모든 것은 거짓된 것이며 헛된 것이다.

세 번째로 잘못된 것은 행위의 결과로서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육신적인 것이다. 영적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지도 않으시지만 육체의 행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것이고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행하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흠이 없는 것이다. 율법은 선하고 완전한 것이다. 단지 그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하고 육체로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곧 가정교사가 되는 것이다. 죄 가운데 빠져 양심조차도 화인 맞아서 아무런 감각이 없이 자신을 죄에 방임하고 죄에 빠져 살며 죄가 죄 인줄도 모르는 죄인들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죄를 깨달을 수도 없다. 율법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에게는 등대와 같이 길을 인도하는 너무나도 고마운 것이다.

달리 설명을 하자면 병원에 가면 진단기계가 있고 치료기계가 있다. 진단하는 데에 쓰이는 초음파나 MRI나 컴퓨터 촬영, 엑스레이에서 청진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것들은 환자의 병을 알아내는 데에 쓰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로는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진단기계와 같은 것이라면 십자가의 은혜는 그 죄를 사해주시고 치료하는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다.

언젠가 월요성경학교에서 목사님들에게 “예수를 믿고 나면 율법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가운데 제일 연장자이신 목사님이 “필요하지요.”라고 약간 망설이면서 더듬거리면서 대답을 했다. 내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더니 참석자들의 분위기가 일순간 마치 무슨 폭탄발언을 듣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왜 필요가 없는가 하면요.”라고 말을 이어 갔다. “그것은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거하시는 성령께서 율법은 물론이요 율법에도 없는 죄까지도 작고 세밀한 것까지도 가르쳐 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책망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간음하지 말라는 죄는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으나 마음으로 간음한 죄는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살인하는 죄는 율법으로 깨달으나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한 죄나 멸시한 죄는 성령께서 그때그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요 거룩하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한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은혜아래 있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그렇다고 아무리 진단기계가 초현대식이며 정밀하다고 해도 치료기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오직 그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서 그 은혜가 어디로 가는 것이나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안에 거하는 믿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치료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진단은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는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필요한 것이다. 행위가 은혜를 대신할 수도 없고 율법이 없는 은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초등학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서 초등학교에서 배운 덧셈과 뺄셈을 무시하면 공부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율법이 무시되어서는 아니 되지만 대학생이 초등학문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율법의 행위 곧 육체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은혜를 받은 교회에 거짓선생들이 와서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려했을 때에 바울이 그것을 아파함으로 서신서를 쓴 것은 그와 같은 율법주의가 은혜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책망을 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이렇게 주님이 오셨을 때에 교회는 율법주의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그 당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율법주의가 힁했던 시기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에 못지않는 율법주의에 빠져 영혼들이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십자가의 은혜는 자취를 감추고 교회 안에서나 강단에서 십자가의 눈물은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 은혜를 상실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다. 이제는 시대를 분별하고 알맹이 없는 행위주의 곧 율법주의를 버리고 회개함으로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신 말씀과 같이 처음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을 상실한 것을 다시 찾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아니하는가? 돌이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이제는 처음행위 곧 율법주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거룩함이 있고 변화가 있고 열매가 있는 영적행위를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53.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