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감격도 다 상실하였습니다. 신앙양심도 없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바알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서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격렬하게 통곡을 하는 이도 있는 가운데 강단에 올라온 노목사님이 기도를 하시면서 아픔을 토해낸 말씀이다.

어느교회에서 지난 주일날 전도에 관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 주일 일부예배와 이부예배에서 말씀을 전했다. 일부예배는 전도의 사명에 대해서 이부예배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교인들중에 절반이상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들었다.

일부예배를 마치고 이부예배와의 중간시간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교회는 수평이동으로 교인들이 몰려와서 한동안 그도시에서 가장 부흥하는 교회로 주목을 받았던 교회라고 했다. 그목사님은 이제는 또 다른 교회로 몰려가고 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했다. 그러던중 뜻하지 않게 우연히 전도행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이 창립기념일인데도 창립행사를 대신하여야 할 정도로 앞뒤로 행사가 가득히 짜여 있는 모양새였다.

노목사님은 넌지시 이런말씀을 하셨다.
“저 우리교회가 컨설팅을 받고 있습니다.”
“아 예..”
그렇게만 대답을 하고 가만히 있을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자꾸 말을 걸어 왔다.
“요즈음 교회가 약해지는 것이 강단이 약해서 그런것같아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말을 아니할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목사님 컨설팅을 하시려면 골방에 들어가셔서 주님에게 컨설팅을 받아 보시는게 어떨런지요?”
“......”
“주님이 교회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씀을 하시는지를 들어 보시고 주님이 목사님의 목회를 어떻게 평가를 하시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
“사실 교회는 컨설팅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직장을 다닐때에 방송국을 경영컨설팅을 하겠다고 전문가들이 와서 자료를 요청하면서 여러달동안 연구를 하였지만 그들의 입에서 방송국은 창조적인 업무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경영컨설팅의 대상이 안된다는 결론을 들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방송국보다도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인데 인간이 어떻게 수치와 틀속에 넣고 평가를 할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하나님만이 평가할수 있는 교회를 인간이 평가를 하고자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도 말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했나?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그목사님은 펜을 들고 적기 시작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을 이어갔다.

“목사님 오늘날 교회가 어려워지면서 은혜가 없어졌는데 사람들은 그은혜를 회복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성장이라는 조직력을 가지고 교회를 끌고 가 보려는 인위적인 시도들이 교회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조직의 힘으로 이끌리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은혜로 끌고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 곧 이끄심이 역사하는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시바삐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각 영혼마다 은혜가 회복이 되면 영혼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성장하면 교회는 저절로 그수가 많아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교회성장을 부르짖다보니 그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먹이고 살리고 기르는 일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영혼을 먹이는 것이 목회고 영혼을 기르고 치는 것이 목회인데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강단이 약해졌다는 것은 주님과 의 유기적인 관계와 생활이 약해졌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은혜를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은혜를 상실하니 교인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먹일수가 있겠습니까?”
“.....”
“영혼이 되게하는 것이 목회인데 사람들은 어리석음과 흑암에 빠져서 교회를 하려하고 교회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은혜도 상실하고 자기의 영혼과 교인들의 영혼이 다함께 영적인 질식상태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현실입니다.”
“.....”
“목사님이 기억을 하시겠지만 60년대만해도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울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 예배때에 울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이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왜 웁니까? 하나님은 온전하신데 우리들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우리는 그앞에서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대는 그래도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믿음들이 있었고 인격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험을 강조한 것은 주님하고 사는 영적생활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는 교인들에게 체험조차도 시켜줄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피폐해진 결과 복음성가나 여러 가지 감성적인 것들로 교인들을 느끼게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전도도 안되고 불신자들이 회심하는 일들이 희박해지면서 급기야는 교회성장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이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시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크게하려고 애를 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교회는 커지지도 않고 실제로 성장이 되는 것도 아니며 교회부흥과는 거리가 먼것들과 가득하게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체험을 너무나 강조하면 안되나요”      
그목사님이 질문을 했다.
“체험을 하는 것도 주님과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영적인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속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무슨 체험이나하게 하고 교회를 하게 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대화속에서 목사님은 부지런히 내가 한말을 적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목사님은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질문을 했다.

그분에게 주님가르치신 기도대로 사는 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라고 말을 하면서 주님가르치신 기도를 자세히 풀어 주었다. 우리의 생활의 기준과 목표는 세가지인데 그것은 나를 통해서 곧 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세상사람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첫 번째 목표인 것과 둘째로는 나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사는 것이 생활의 목표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와 다스림가운데 행해지는 것임과 세 번째의 생활의 목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과 같이 나를 통해어 이땅에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난 것이 주님과 함게 사는 생활의 내용임을 말했다. 그리고는 그와같은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라고 가르치신 것과 같이 날마다 양식을 먹어야하는데 그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하며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공급되는 것임을 말했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건강해도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해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으로 내가 그리스도께 죄사함받은 은혜를 상실함으로 영적으로 병드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라는 기도는 오늘도 새로운 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지금까지 내가 빠져 있는 죄의 악으로부터 마를 건져주시고 청산해달라는 기도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주님과의 접촉점이 없이는 아무도 목회할수 없음을 말해주었다.
목사님은 여름전도여행과 제직훈련에도 관심을 크게 보였다.

나를 소개해준 집사님이 전도모임을 인도하는 중에 기도회를 인도하고 보고회를 인도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사람이 진짜 전문가구나. 참 하나님의 일군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그말을 듣고 그가 그렇게 교인들과 목사님에게 감동을 줄수 있는 것은 그만큼 주님과 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해주었다.

일부예배와 이부예배를 드리면서 설교하면서 참으로 아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교인들은 핏기없는 얼굴로 앉아서 아무런 감각이 없이 30분동안을 복음성가를 부르고들 있었다.

얼마전에 갔던 오래전에 같이 전도하던 제자가 목사님이 되어 목회를 하는 교회의 예배도 생각이 났다.
그교회에서는 어느 큰교회의 찬양을 비디오로 보여주면서 교인들이 일어나서 다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그가사중에 하나라도 내가 같이 부를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예수 그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말할수 없어서 비밀이 되었네라는” 노래도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강단에 오르자마자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고백을 했다.
“여러분은 예수의 이름을 그렇게도 말할수 없습니까? 나는 그이름을 말할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말하고 외칠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이름,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이름, 나의 병을 고쳐 주시고 나와 날마다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이 예수의 이름을 왜 말을 못합니까?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말함으로 열매를 맺은 것을 말씀을 전한 것도 생각이 났다.

몇 년전에 서울의 북부의 어느 도시의 전도하는 목사님들이 연합집회를 한다고 하여서 가서 말씀을 전한 것도 생각이 났다. 도저히 입을 벌려 같이 부를수 없는 복음성가를 아무런 감격도 없이 부르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손을 들고 노래를 하라고 하는 데 그냥 의무로 손을 드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때에 내가 본 광경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무슨 단체의 모임같았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도자들이 아니었다. 영혼을 건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하는데에 더많은 관심들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의 중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종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하기에는 부리가 되는 사람들이며 오히려 그들은 셀모임이다 교회성장이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목사님의 말이 생각이 났다.
“장로님 요즘 교회가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요 목사가 아닙니다. 강단에서 농담을 하고 세상말을 하는 것을 아무런 아픔이 없이도 합니다.
또 어느 목사님의 말도 생각이 났다.
“장로님 전도하던 아무개 목사 아시지요?
“예”
“이번에 지방회장이 되었는데요 강단에 올라와서 인사를 하는데 첫마디가 ‘여러분 웃으면 복받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순간에 아 저목사가 타락한 목사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예배가 아니었다.
먼저 송영이 어디로갔는지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찬양하는 베네딕투스가 실종이 되었다.
예배가 살아야 된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이 예배에 인간적이고 혼적인 감동을 불어 넣게하려고 영적인 감동을 삭제하여 버렸다. 그리고는 공허하게 예수의 이름과 권세만을 노래하면서 듣기 좋은 말 부르기 좋은 말로 교이들을 기분좋게 해주고 흥분시키고 열광시키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거짓말이었다.
교회는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곳이 되어야함에도 교회는 교인들이 무엇이 필요해서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성장의 필요를 강조하고 교회성장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비디오도 틀어주는 것을 보았다.

말씀을 전하면서 총동원전도주일 프랭카드에 쓰여 있는 “Happy Day"라는 것에 교인들을 주목을 시켰다.
“여러분 계시록의 에베소교회를 기억하십시오 많은 수고와 인내를 겪으면서도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면 주님에게 책망을 받는 것을 아십니까?
총동원전도를 열심히 해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처음사랑이 식었다면 주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교회일을 하다가 처음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교회성장이 되어도 예배당을 건축해도 주님이 주신 처음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 Happy Day 라는 글을 보면 생각이 나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 첨받은 날 참기쁜날이 아닌가” 이찬송가의 제목이 O Happy Day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날의 기쁨을 지난 36년동안 잃어버리지 않고 살았던 것을 간증하면서 이찬송을 회중앞에 불렀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면서 이찬송을 불렀다. 교인들중에 상당수가 얼굴을 붉히고 울면서 찬송을 들었다. 어떤이는 따라부르는 이도 있었다. 40분정도를 시종일관 울면서 말씀을 전했다. 교인들이 울면서 말씀을 들었다 어떤이는 소리높여 통곡을 하는 이도 있었다.

목사님이 헤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교회를 깨워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특별히 강단을 깨워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상념에 잠기는 가운데 이런것들이 생각이 났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는 북한의 실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전체주의” 곧 교회의 가치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희생되어야 하고 교회의 가치이상 강조되는 것은 어떤것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되어야 하고 교회를 하기 위해 영적인 가치나 영혼을 먹이고 치는 것은 뒷전으로 밀린지가 오래되고 말았다. 노목사님에게 영혼사랑이 교회의 중심이라면서 내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영혼들을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되물으면서 특별히 목사님이 스스로의 영혼을 사랑할줄 알아야 교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임을 일깨운 것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반추되는 사실은 아 이사람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나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를 사랑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교회를 사랑하지만 또 전도를 해서 교회를 채우는 일을 강조하지만 내영혼을 사랑해주지 않는 목사님에게 나의 영혼을 어떻게 맡길수가 있을까? 그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아픔이 아닌가 싶다.
마치 강성대국이라는 여러 가지 현수막과 구호아래 당장에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의 동포들과 같이 교회성장과 두날개의 표어와 대형 프랑카드, 여러 가지 훈련프로그램과 제자훈련 전도훈련등 프로그램의 홍수속에서도 내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영혼의 배부름을 멀리한채 주님께로부터 받은 처음 사랑을 상실하고 아무런 감격도 없이 기쁨도 없이 예배하고 찬송하는 그목사님의 고백과 같이 바알신앙에 빠진것같은 현실속에서 목마른 영혼과 창백한 얼굴을 하고 교회의 부름에 열심히 동원되는 교인들의 모습은 북한주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모습에 아픈 마음을 금할길이 없었다.

오주여 이땅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주님의 종들을 이제는 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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