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부끄러운 노래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지나가는 길에 지하 교회에서 반주기를 틀어 놓고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에 , 저런 노래를 부른다면 노래가 문제이기 이전에 저 영혼들이 문제인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장섰다.

 

진실한 성도는 이 노래는 불러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이 노래는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났을 때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으로 시작되는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가사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모르는 무지에 빠져 있든지 아니면 무관심하든지 둘 중에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대화가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대화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사랑은 헬라어 아가파오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파오가 아니라 그냥 친구로서의 사랑인 필리오로 사랑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것은 아가파오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말이다. 사실 그는 주님을 친구의 사랑 곧 의리를 지키는 사랑으로도 사랑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이틀 전의 일을 잊을 수가 없는 나약하고 무능한 죄인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주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며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의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소극적으로 하면서 그 사실을 주님이 잘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다. 두 번째 질문도 주님은 아가파오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하지만 베드로의 대답은 예상할 수밖에 없이 필리오의 사랑으로 대답한다. 세 번째 주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네가 나를 필리오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마음에 부담을 벗고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필리오로 사랑하는 줄을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님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으면 네가 두 팔을 벌리리니 다른 사람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것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젊어서는 나이가 어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에는”, “처음에는이라는 뜻으로 곧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생활을 살았을 때를 말한다. 그리고 늙어서는이라는 말은 익숙해져서라는 뜻이며 곧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신 뜻이다. 그때에는 네가 두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네게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살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말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아가파오 할 수 없었던 주님을 아가파오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아가페 사랑은 자기의 의지와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이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킴이라라는 말을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 달려 죽었다는 해석을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는데 그것은 캐톨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경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 달려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살 때 자아가 죽고 자아의 자취가 없어지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와 같은 죽음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실제로 그렇게 아가파오 사랑으로 평생토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죽기까지 주님을 아가파오 하는 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것은 무지한 노새와 말과 같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목사나 신학자나 일반 교인들이나 무지하기는 마찬가지 수준이다. 그래도 보수적인 주석가인 매튜 헨리조차도 이 사실에는 눈이 감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 그리고 수많은 목사들이 그 옛날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같이 성경을 모른다. 그것이 현실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22:29)

 

왜 그런가? 그들은 어느 말씀이 어느 책에 있고 또 몇 장 몇 절에 있는지는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머리로 아는 바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모르는 자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전하고 가르치고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는 말씀이다. 오늘날도 정작 자신은 순종하지도 않는 말씀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려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일찍부터 말씀하심으로 경계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19-20)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 외식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외식하는 악한 일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들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교수들 중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대종을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 주님의 교회의 비극이며 슬픈 일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도 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이며 영혼을 건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님에게 영혼을 추수하는 일군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비방하고 훼방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지키지도 않는 율법을 자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하나라도 순종하지 못하면서도 감히 자신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한 말을 가지고 자신들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을 신뢰하는 율법주의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하며 주님 앞에서 위험한 일이 되는 것인가?

주님은 말씀에 순종하고 순종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아가파오와 필리오로 질문하고 대답한 이 말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절대로 아니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5-27)

 

어린아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생활도 없이 이것저것 따져 보지도 않고 가볍고 경솔하게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이 무지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서는 아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가사의 내용이 주님의 뜻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기보다는 주님의 뜻에서 아주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좋아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12:26)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주님을 따라오라고 명령하셨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19)

 

주님을 따라가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그 말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영혼을 건지는 전도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동안 주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따라간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따라갔든지 아니면 세상을 따라가거나 돈을 따라가거나 헛된 것을 따라다닌 결과인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아주 아픈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그러므로 캐주얼(가벼운 마음으로)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정신으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것을 말하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런 사람들은 입술은 하나님에게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먼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듣지 못하게 임하며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말씀이며 치료하는 말씀이 아니라 고침을 받지 못하는 말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9-10)

 

그들은 결국 그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다.

주님이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추수할 일군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라.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10:2)

 

주님에게는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공허한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하면서 가르친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같은 신학자들과 바리새인들 같은 목사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주님은 지금도 중심에 진실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함부로 입을 열거나 경솔하게 노래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날 저녁에 지하 교회의 그 노랫소리가 멀리 흑암 가운데 아득하게 들렸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들의 영혼이 참으로 불쌍하여 그 영혼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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