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자백을 신봉하는가?

지난 3월 부산집회 때부터 주님은 칭의의 은혜와 영감을 한없이 부어주셨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기가 지은 죄를 인하여 자존감을 상실하며 자기의 행위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마귀의 속임에서 놓여나는 은혜를 수없이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 지난 유월에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어느 목사님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에 복음이 있는 곳이 하나도 없어서 교사를 보낼 데가 없다는 하소연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곧장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여름성경학교 교재를 써라”
“무엇을 쓸까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날마다 짓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칭의에 관한 교재를 써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여 주님이 영감을 주시는 대로 예화 하나하나를 간섭해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칭의생활의 확신’이라는 교재를 썼다. 편집을 하고 교정을 하는 단계에서 어느 간사가 말을 했다.
“장로님 이 교재에 문제점이 조금 있습니다.”
“무슨 문젠데?”
“죄자백에 관한 말씀이 없습니다. 몇몇 목사님들과도 의견을 나누었는데요. 어느 집사님이 칭의에 관한 글을 사이트에 올린 것도 문제점이 있고요. 그래서 두 군데 표시를 해 놓았는데 죄자백에 관한 부분을 추가해 주십시오.”

순간 무엇으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죄자백을 신봉하는거야? 교리를 믿는 거야?”
“.....”
“죄자백을 아무데나 넣고 어디든지 집어넣어야 하나?”
“.....”

여러 말을 하기 싫어서 내가 하룻밤을 다시보고 다음날 아침에 말을 해주겠다고 말을 하고 협회사이트에 올린 칭의에 관한 글도 다시 보겠다고 말을 하고는 헤어졌다.
내가 쓴 교재를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느 집사님이 올린 칭의에 관한 글도 읽어 보았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다. 별문제가 없으니 그냥 책을 만들라고 말을 해놓고 사이트의 글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 후에 그 간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로마서 5장에서 8장이 칭의에 관한 말씀인데 거기에 죄자백이라는 말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읽어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는 것은 기본으로 깔고 하는 거야. 아무데나 아무 말씀을 꼭 넣어야하는 것은 잘못된 거야!”

알았다는 말을 듣고는 ‘이래서 교리를 고집을 하고 신봉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과 같이 스쳐 지나가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였는데 좌로나 우로나에서 지나 갈지자로 치우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믿어야하는데 전도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외침전도를 신봉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주의 복음을 값싼 것으로 전락을 시킨 자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죄자백을 믿는 것처럼 자기가 교회에서 공적 죄자백을 여러 번 한 것을 마치 계급장처럼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아내의 죄가 의심이 된 나머지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는 자 ‘이제 당신의 죄도 자백하시오.’ 함으로 죄자백을 남의 죄를 밝히기 위한 취조도구로 사용한 이들도 있었으며 어떤 부흥사는 부흥회 때 은혜를 받아야 한다며 담임목사에게 죄자백을 다그치고 강요한 사람들도 있고 회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스스로 죄자백을 먼저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의가 없는 죄자백은 전혀 쓸데없는 인간의 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과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죄자백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죄자백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죄자백이라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하는 죄자백인 것이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시켜서 하는 죄자백은 더더욱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고 죄사함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고 죄자백을 한 사실을 자랑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빠진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좋은 것도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고 해가 되는 것이다. 죄자백을 믿어도 안 되고 전도를 믿어도 안 되며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신앙고백과 같이 성령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제자훈련을 신봉하는 것은 어리석음중에 어리석음이다. 성경공부를 신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성장을 신봉하는가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교리를 신봉하고 교단을 자랑하는 것도 금하여야 할 것이다. 예정론을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칭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하는 가운데 칭의의 교리하면 먼저 나서는 것이 장로교회다. 장로교회에 속한 목사님이 어느 감리교 목사님에게 “어이 감리교에 칭의가 있어”하고 괴롭히는 말을 하였다. 내가 옆에 있다가 그 목사님에게 말했다.
“장로교는 칭의가 있습니까?”    
“있지요”
“칭의의 교리는 있지요 그러나 칭의 생활이 있습니까?”
“....”

칭의의 신학도 있고 칭의의 교리도 있지만 칭의생활이 없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날마다 칭의의 주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확신을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칭의는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다.

어느 권사님이 칭의에 관한 말씀을 여러 시간 듣고 은혜를 받고나서 울부짖으면서 기도를 했다.
“주님 저는 무식해서 칭의라는 말도 몰라요. 그런데요 말씀을 듣고 보니까 칭의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연약해서 죄를 지어도 끝까지 용서해주시고 의롭다고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 칭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칭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들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 선언 속에 예수 믿기 전의 나의 죄와 또 예수를 믿고도 연약해서 짓는 모든 죄의 값을 십자가의 피로 다 청산하신 사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믿는다. 이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날마다 칭의의 은혜가운데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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