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목사님께

이글은 목사님께만 드리는 글이기보다는 목사님과 비슷한 형편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협회의 훈련을 받고 회개를 하는 이들이 “내가 전도를 못했습니다.”라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내가 잘못 살았습니다.”라고 회개들을 하곤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전도협회는 전도를 가르쳐주는 단체로 오해하고는 훈련에 와서는 어떤 이들은 전도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항의를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울부짖은 것과 같이 전도도 목회도 잘못 했지만 전도를 못하고 목회를 잘하지 못한 것은 그 이전에 신앙생활이 잘못되어 있음이 근본문제라는 것을 알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격이 고침을 받는 이도 있었고 가정이 회복되는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교회를 해야 된다는 현실에 붙잡혀 가까스로 깨달았던 우선 순위가 다시 환원되는 아픔을 겪는 이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전국의 목사님들이 전도를 하다가 전도를 중단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은 어느 약국을 경영하시는 장로님의 말과 같이 “정말 목사님들이 훈련을 받고 약국 앞 번화가에서 그리고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외칠 때는 금방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는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전도현장들이 없어져 간 것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대단한 일이 일어날 때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 사역이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기다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는 아직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훈련을 받고 잘못 산 것을 아파하고 고백을 하고 나서는 목회현장으로 돌아가서 주님하고 살아야 하는 영적생활의 부담을 저버린 것에서 지나쳐 참 목회와 교회경영의 사이에서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주의 명령을 뒤로하고 교회경영의 길로 다시 들어선 것이 우리를 오랫동안 아프게 해 온 것입니다.

훈련을 받고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이제는 살길을 찾았다고 말씀을 하시던 그 모습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하면서 열매를 맺는 기쁨과 성경학교를 다니며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기뻐하던 것도 잠시였습니다. 천국을 소유한자들이 다 받을 것이라고 주님이 오래전에 미리 말씀하신 핍박을 이기지 못하여 전도현장을 떠나고 잘못된 이들과 어리석은 교단들이 협회를 핍박하는 일이 시작되고 그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김포의 누구에게로 가고 왕권으로 가고, 빈야드로 가고, 제자훈련이다, 다락방이니, 무슨 무슨 성경공부다, 무슨 통독대회니, 두날개니 무슨 교회성장이니 하는 것들과 또 새물결이니 하는 지식과 방법을 구하는 이들에게로 돌아다니던 목사님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가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교인들에게서 조차도 잃어버린 영적권위를 세우기 위해 청교도00이니, 초대00니, 흰돌0000이니하는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에게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강단에서 교인들을 행위로 겁주고 두려움에 떨게 함으로 담임목사에게 굴복을 시키는 것을 좋게 여기는 일들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들이요 그러나 교회의 상황은 변한 것도 없고 교인들이 변화된 것도 없는 형편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개척교회의 수준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것은 자기의 영혼도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교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의 교회안에 교인들이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와 같은 교회에 주님이 영혼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교인들이 전도여행이 오지를 않아서 혼자 참석하면서 괴로워하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여름에 교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에도 데리고 갔었지만 그것도 그 타령에 그치지 않았습니까?

잘못 산 것을 깨닫고 울부짖을 때와 같이 내 영혼이 주님만을 바라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하는데 제자들은 삼년 반을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바 줄기이신 주님에게 가지로서 제자들이 붙어있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아직도 줄기 따로 가지 따로인데 무엇인들 제대로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전도가 되겠습니까? 목회가 되겠습니까? 설교가 제대로 되어 교인들의 심령을 찌르고 잘 박힌 못과 같이 말씀이 그들에게 박혀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교회안의 영혼도 사랑이 안 되는데 영혼사랑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가정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짜증을 부리고 싸우는 일들이 다시 돌아온 상태가 아닙니까?

주님 앞에서만 살도록 부르심을 받고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거래처(?)가 너무나 많으니 어떻게 주님을 모시고 주의 일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목회에는 세 가지 목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목회가 있고,
교회를 위한 목회가 있으며,
생존을 위한 목회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를 보면 생존을 위한 목회를 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주신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 중에 어느 누가 생존을 위한 목회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목회가 안 되면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가 안 되고 자기도 모르게 교회를 위한 목회와 생존을 위한 목회로 흘러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오 년도 훨씬 이전에 울산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훈련을 받으면서 죄를 자백하는 기도를 하는데 “주님 처음에는 이렇게 목회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요...”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심히 통곡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잘못 살았던 것을 울부짖음으로 고백할 때에는 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한 목회,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를 하려고 부르심을 받고 목회의 첫발을 디뎠던 때의 모습이 아님을 아파하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은 자기의 목회가 하나님을 위한 목회가 안 된 이유가 내 영혼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안 되었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임재 앞에서 밤낮없이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그리워서 울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삶을 상실하였기에 목회가 처음에 시작한 마음이 아닌 모습으로 변질된 것을 아파한 것입니다.

목사님도 하나님을 위한 목회가 안 되니 교회를 위한 목회, 목회를 위한 목회를 하다가 아예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기도 하는 생존을 위한 목회에 젖어 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크면서 대학에 들어가고 돈이 필요하면서는 더더욱 생존에 집착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거래처가 필요했던 것도 교회를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부인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모든 필요가 충당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생존을 위한 목회를 하는 것은 곡식을 밟아 떠는 주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활의 상대가 되어야하는데 수많은 사람들과 지식과 방법을 구함으로 스스로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돌아오십시오. 협회로, 우리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애당초부터도 ‘우리에게’라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골방으로, 주님의 임재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거래처들을 다 끊어버리고 돌아오시오. 목사님에게는 교회가 중요하지만 주님에게는 목사님의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목사님에게는 전도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주님에게는 목사님의 얼굴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교회도 사랑하시지만 목사님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이제는 어지러운 길에서 떠나 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주님 앞에 종용히 머리를 조아릴 때입니다.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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