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사랑을 회복하라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교회가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많고 거짓된 자들을 드러내고 대적한 것들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주님이 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모든 것을 다가지고 있어도 처음사랑과는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것이 에베소교회를 책망할 일이라고 했다.

오늘날도 교회는 분주하고 바쁘기만 하다.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며 각종훈련과 성경공부의 종류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며 때로는 과유불급이라는 말과 같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과 행사들로 넘쳐나고 있는 형편이다.
교회성장을 하겠다고 저마다 각각 힘을 쓰고 애를 쓴다. 예배도 바꾸고 찬송가도 바꾸고 교인들이 부르기 좋고 세상친화적인 노래를 부름으로 불신자들에게 문을 열어 놓는 교회가 되자는 등등의 온갖 수고와 힘과 애를 쓰는 일들이 범람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시록의 에베소교회보다도 한수만이 아니라 여러 수를 지나쳐 처음사랑이 온데간데없는 교회생활로 점철이 되는 듯하다. 교회생활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람의 열심일 뿐이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성령의 인도하심과 주님이 주시는 소원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이 아닌 것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범람하고 들끓고 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예배의 소원이 사라진 예배를 드리는 일들이 오래 되었다.
기도의 소원이 사라졌으며 찬송이 단체적이고 인위적으로 불러지고 스스로 기뻐하려고 위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찬송을 부른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속하시고 나와 함께하시고 축복하심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교회에서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 되었다.
크게 잘못된 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예배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찬송을 부르고 주님으로부터 관심을 얻으려고 드리는 예배가 된지가 오래 되었으며 교인들을 모이게 하기 위해서 드려지는 특별기도회 등등 사람이 주님께 가려고 하고 주님을 만나려고 애를 쓰는 종교의식들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일이 왜 한국교회에 가득하게 되었는가? 율법주의자들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와 열심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이들이 열심을 가지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행위주의자들 때문이다. 바울도 그와 같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기 때문이다. 은혜대신에 열심히 하는 것만 있다면 십자가가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죄의 결과를 중요시하고 행위를 강조하면서 교인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 그래서 두려움에 충성하게 하고 하나님께 아니라 목회자인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는 마귀의 술수요 그와 같은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은 마귀의 일군들인 것이다.
여느 목사들이 그와 같은 것을 즐기지 아니하는 목사들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을 데리고 그들에게 가서 교인들이 굴복시켜주는 것을 기뻐하지만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교인들이 돌아와서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고 교인들이 그랬음에도 자기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 되풀이 확인될 때에 목회자와 교회를 향한 축적된 불만과 분노가 폭발할 때면 어느 누구도 치료할 수 없고 아무것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는 일들을 지금도 교회가 겪고 있는 아픔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고 항변을 한다.
그렇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심과 은혜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다.
애굽에서 건짐을 받는 전적인 은혜를 받고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만들은 것이 금송아지였다. 주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때를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 은혜임에도 저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또한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언제 만들었는가? 하나님을 상실했을 때에 만들었으며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에 만들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자였다. 그는 백성의 중보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모세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상실하고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상실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행위로서 하나님께 환심을 사려는 악한 자리에 들어간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기다릴 수 없어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자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행위를 강요하며 행위를 하고자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발행이 되어 십자가의 은혜를 말살시키는 마귀의 전략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것이 아닌가? 구원받음에 우리가 한일은 오직 믿고 순종한 것 외에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3-5)

언제든지 율법주의와 그로 말미암은 행위주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사랑을 상실하게 만들고 교만하여지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도 교만해지고 교인들도 교만해진다. 교회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해진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를 않는다.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은혜, 자기의 얼굴빛을 비추어주시는 은혜, 하나님이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은혜가 사라진다. 예배도 찬송도 기도도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인간의 열심과 의지로 한다. 내가 열심히 하든지 남이 열심히 하든지 교인들이 열심히 하든지 목회자가 열심히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역행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오래되면 처음사랑이 사라지고 기억조차도 되지 않는 악한 상황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에배도 주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니라 교회하기 위한 예배로 전락을 한다. 기도도 찬송도 교회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의 수단으로 전락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난결과로서의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자기열심의 수단으로서의 찬송을 애처롭게 부르고 있다. 기도도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기도로 전락을 하고 교회를 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전락을 시키고 만다. 목회자도 양을 먹이는 목회는 할 수 없고 교회를 하려고 애를 쓴다.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목회, 어린양을 먹이는 목회를 젖혀두고 교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반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종은 목회를 하라고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 목회를 하면 주님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이 교회를 하려고하는 것은 믿음도 순종도 저버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말기적인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성장주의 라는 것이다. 제자훈련이니 셀이니 두 날개니 하는 여러 가지 이름만을 바꾸어가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지고 인간의 야욕과 욕심을 이루고자하는 성취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주지 못하면서 은혜를 끼치지도 못하면서 교인들을 천편일률적으로 교육을 시킴으로 통조림공장에서 통조림을 찍어내듯이 생명력이 없는 교회성장의 수단들로 교인들을 찍어내고 있다. 그리고 획일화된 사고방식과 행위를 강요한다. 교인들에게 교회를 지켜야한다는 의무감을 부여하고 교회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노래와 주입식 교육을 비디오를 가지고 교재를 가지고 가르치고 강요한다.

이를테면 성장을 추구하는 한국교회가 교회전체주의에 빠진 것을 보게 된다.

이전과 다른 것은 사회에 편만한 교회를 향한 악감정속에 전도는 아니 되고 전도를 할 수 없고 그리고 큰 교회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남의 교인들이 수평이동해서 커진 것이 빤한 사실이고해서 교회들마다 교인들에게 매력이 있는 교회로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시작된 교회전체주의는 교인들의 심령을 다 앗아가고 교인들안에 그나마도 남아 있는 은혜를 다 뺏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이 텅 빈 교인들이 교회 안에 앉아서 뜻도 모르는 복음성가로 자신을 달래고 때로는 춤을 추기도하고 보기도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교회성장이 되면 복을 받을 것 같이 착각하게 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시달리고들 있다.

어느 교회를 갔을 때에 어느 돈 많이 버는 집사가 아내가 못살겠다고 떠나간 후에 나에게 물었다. “장로님 왜 은혜는 축적이 안 됩니까?” 그도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찬양단도 하고 성가대도 했지만 자기의 믿음이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도 믿는 가정에 자라서 삼십 대 후반까지 살면서 교회성장과 교회전체주의의 희생자였든 것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밥이 몸속에 축적이 안 되는 것과 같이 은혜도 마찬가지예요. 날마다 때마다 밥을 먹어야하는 것과 같이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그 한마디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든지 이삭이든지 야곱이든지 그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곳으로 돌아오기를 날마다 힘쓰셨다.

애굽으로 떠난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일하셨다.
딸 디나의 일로 자녀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위기를 당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기를 명하심으로 이전에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때에 야곱의 일생 중 가장 비참함 가운데 하나님이 만나주셨던 그 신앙을 되찾을 것을 명하셨다. 이것이 야곱의 처음사랑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과의 처음사랑을 기억하신다고 했다. 당신을 위해 기억하신다고 했다. 이제는 교회성장도 훈련프로그램도 공허한 찬송이나 기도나 예배의식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도나 이런 것들을 다 접고 처음사랑의 곳으로 올라가야한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처음사랑을 회복한 후에 그것의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불렀다. 벧엘이라는 이름도 야곱이 붙였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다시 벧엘에 올라가서 자신을 다시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는 그곳의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고쳐 부른다. 이 뜻은 물론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하나님의 집에 찾아가면 반드시 다시 만나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찾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던 장소가 있었다. 은혜를 상실하고 교만하여져서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야곱에게 은혜를 상실했어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엘벧엘이었다.
이삭에게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어김없이 만나주시던 브엘세바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어느 날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삭을 만나주시는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물을 주시는 축복이 임한다. 교회는 브엘세바가 되어야한다. 믿음으로 올라갈 때마다 하나님이 어김없이 만나주시는 은혜가 임하는 곳이 브엘세바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엘벧엘의 하나님이 필요하다. 브엘세바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엘벧엘의 믿음이 처음사랑이요, 브엘세바의 믿음이 처음사랑인 것이다.

이제는 이 땅의 교회들에게 엘벧엘의 믿음, 브엘세바의 믿음 곧 처음사랑의 믿음이 회복되어야할 때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에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신 하나님을 만날 때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어도 하나님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기억하신다고 했다. 이제는 그 처음사랑으로 돌아가자.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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