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사랑을 회복한 여름전도여행

지난 8월 2일부터 5일까지 천안갈릴리교회에서 제31차 여름전도여행이 열렸다.
7월에 부산에서 집회를 하면서 주님이 주셨던 “처음사랑을 회복하라”는 표어를 가지고 기도로 준비를 했다.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이전에 근 이십년동안 세미나에 참석을 해서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전도도 못하고 은혜도 상실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번여름전도여행에는 전도하는 시간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달라는 부탁을 간사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그와같은 영적인 부담이 기도하는 가운데에도 중압감으로 다가와 어느날 예상시간표를 보고 있는데  “새벽기도를 해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쪽 마음으로는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힘이 들기 때문에 안하고싶은 꾀도 났다. 그냥 실무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하더라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귀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아야겠기에 즉시 메일을 보내어 새벽기도를 시간표에 넣을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면서 전도여행날짜가 가까이 올수록 영적인 부담이 더해만 갔다.  
며칠전부터는 올사람들과 안올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님은 그얼굴들을 보면서 무시로 기도를 하게 하셨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을 해보니 아이들과 합해서 삼백명이 모였는데 지난해보다 조금 적은수가 모였다. 꼭 올것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를 않았다. 해마다 있었던 일이고 또 마귀의 역사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십년전 십오년전에 훈련을 받고 은혜를 상실하고 살던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적지 않이 눈에 띄는 기쁨도 있었다.
첫날 저녁에 이전같으면 밤늦게라도 전도를 나갔을 텐데 예배당에서 저녁집회를 했다. 요한계시록 2장의 말씀을 본문으로 읽고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신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의 말씀으로 조명해주시는 은혜를 받았다.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불균형적인 것을 말하면서 불신자들에게는 육신의 어려움이 저주로 임하지만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처음사랑을 상실할 때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크고작은 고난을 당할 때가 처음사랑을 회복해야하는 하나님의 신호로 받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야곱이 생애를 비추어보면서 벧엘의 하나님과 받단아람의 경건의 훈련 그리고 얍복강에서의 하나님과 씨름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믿음으로 사는 야곱이 세겜에 정착을 하면서 자녀들이 세겜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우상을 집으로 들이는 것을 막지 못할 정도로 야곱도 세겜의 생활에 동화되어 가면서 벧엘의 하나님 곧 하나님과의 처음사랑을 상실한 사실을 말씀을 전하면서 벧엘의 신앙과 세겜의 신앙, 벧엘의 하나님과 세겜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전했다. 말씀을 전한후에 기도회를 하면서 거의 대부분이 처음 사랑을 상실하고 살았던 자신의 병든 모습을 보고 울고 회개하면서 이번집회에 처음사랑을 회복시켜달라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새벽에 새벽기도회시간에는 처음 사랑을 상실한 마가의 삶을 되집어 보면서 처음사랑을 회복함으로 이전보다 더 바울에게나 주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된 것으로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앞에 행위로 주님을 기쁘게하려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백부장의 믿음과 백부장에게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믿음을 비교하면서 백부장이 자기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서 그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믿음이 세겜의 가치관이요 세상적인 믿음이라는 것과 자기는 주님앞에 은혜를 구하기도 감당할수 없는 이방의 죄인이요 주님께 나아갈수도 없고 주님이 집에 들어오심도 감당할수 없는 자격이 없는 존재로서 은혜를 구한 백부장의 믿음이 대조되어 전해졌을 때에 세겜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같이 굳어진 종교생활을 했던 죄를 목놓아 울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같이 내가 내의를 가지고 내열심으로 찬양하고 전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고 헌금을 한 것으로 주님께 나아갈려고 했던 교만과 악함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전도하고 목회도 하고 선교도 한 것으로 사람앞에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는 말을 한 것이, 또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마땅히 받을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죄인지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잠언 11장 2절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교만한자는 지혜가 없는 자요 욕을 자초하는자인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교만한자여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도 그의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여름전도여행 내내 말씀이 벧엘의 가치관과 세겜의 가치관에 집중이 되었다.
세겜의 가치관은 거래의 가치관이요 댓가성을 요구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벧엘의 가치관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관이다. 가장 불쌍할 때에 비참해졌을 때에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부모도 자기를 찾아와 주지 않을 때에 나를 찾아 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벧엘의 가치관이다. 그 벧엘의 가치 곧 은혜의 가치는 수로 헤아릴수도 없고 다깨달을 수도 없으며 티끌만큼도 값을수도 없는 하나님의 가치관인 것이다. 귀한 것일수록 값을 정할수도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값으로 계산이 안되는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들에게 베푸신 은혜 그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영생과 구원과 사랑과 축복은 던으로 계산이 안되는 것이다. 야곱이 벧엘의 믿음을 가지고 밧단아람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고 약복강에서 자기의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사백인을 거느리고 왔을 때에 밤새워 기도하다가 하나니므이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그형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을 없애주시는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세겜으로 옮겨 땅을 돈을 주고 사고 거기에 거하면서 야곱은 서서히 세겜의 가치관으로 젖어 들어가게 된다.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이들이 자기의 의로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세겜의 가치관은 우상숭배의 가치관이다. 막얀히 무엇인가를 잘하면 좀 봐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세겜의 수준 곧 자기의 세상가치관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관을 상실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동일하고도 아주 흡사한 모습이 아닐수가 없다. 딸 디나는 세겜사람을 보러 나갔다가 변을 당하는데 보러나간다는 말은 연애하러 나갔다는 말이다. 세겜의 즐거움에 자녀들이 빠져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일로 자녀들이 사고를 치지만 야곱은 그와같은 자녀를 통제할 능력과 권위를 상실했다. 그것이 세겜의 생활이요 오늘날 믿음의 사람에게 세상가치관이 들어오면 자녀들도 그부모를 더 이상 존경할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찾아 온 생존자체가 불투명한 위기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의 신앙을 회복할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이 자식들과 함께 이전에 잃어버렸던 처음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야곱을 만나주신다.  

계속되어지는 집회가운데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간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간 믿음인 것과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개인적으로 만나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통해서 같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 따로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베드로에게 이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야곱에게 세겜의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다가온 것을 들었다.

어떤 목사님이 오랜만에 전도여행을 왔다. 십여년전에 훈련을 받고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목회를 배우고 싶은데 아무도 그에게 목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회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해야 양을 먹이고 어린양을 먹이며 양을 칠수 있는 목회를 할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가르쳐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목사님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협회간사를 한 사람까지 목회를 사람에게 배우려고하였다. 그리고 어떤 간사는 목사가 되어서 협회에 있을 때에는 모르고 그랬는데 목회를 해보니 그때 배운 것으로 안도더라며 협회를 폄하 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일들이 목회를 사람에게 배우려고 했던 어리석음의 결과인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삼년반동안을 따라다닌 결과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도록 허락을 받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참 목회인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내양을 먹이라고 말할수 없는 상태에서 목회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직 그상태에 머무르고 있어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이난다는 속담과 같이 주님이 하라는 목회는 못하고 애쓰고 힘써 교회를 하려고 하는 가운데 “이게 아닌데”하는 고통과 아픔을 속으로든 겉으로든 다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영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목사님은 목회를 배우려고 여기저기를 다헤메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방교회의 워치만니 사상을 가진자들에게 가서 성경을 배우겠다고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도 교인도 없는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이목사님이 대장목사님과 상담을 하는 가운데 예수전도협회는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고작 회개나 하고 전도나 가르치는 곳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눈물을 흘리고 첫사랑을 회복할수 있는 곳은 이곳이기에 잃어버린 처음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말을 전해 들은 내마음속에 아픈 마음이 들어왔다. 아직도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그영혼이 불쌍해서였다. 마지막날 새벽에 주님이 본문을 주셨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26-31)

그리고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모임이라는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너나 할것 없이 다 미쳐 있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자는 하나님의 특권과 권세를 침해하는 악한자라는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이 자라는 곳이라고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잘드리고 말씀을 잘 듣는다고 또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고 교회일을 열심히 한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 주님과 일대일의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 자라는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다.
예수전도협회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전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이고 자라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이세상 어떤 사람도 자라나게 하는 것은 못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가라지를 뿌리고 나쁜 씨를 뿌림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강단에서 말하는 악한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물을 주되 썩은 물을 주어서 오히려 영혼들을 병들게 하고 죽게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차라리 무능해서 씨도 뿌리지 못하고 물도 주지 못하는 목사들이 오히려 그들보다는 낫다는 사실도 전했다.  
아무사람도 목회를 자랑해서는 안된다. 영혼을 자라나게 하는 목회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역과 일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그결과로 자기를 사람들이 칭찬을 하게 해서도 안된는 것이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가 이러이러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말하는 것이나 자랑하는 것이나 그것을 교재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한 일이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자기가 소수의 사람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어떤이들은 세례를 줌으로 교인들을 자기사람들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는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신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씨를 뿌린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물을 준 아볼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이 전부라고 했다.  
잠자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목회의 시작이요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재앙이요 저주인지를 알아야한다. 교인들도 교회안에서 행하는 자기의 행위를 보고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 떨어야 한다.

참석한 교인들이 처음사랑의 중요성을 절감을 했던 여름전도여행이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내안에 들어온 세겜의 가치관과 처음사랑이 아닌 심령을 아파하고 그와같은 교회의 모습이 아파서 부르짖고 울면서 시간을 보냈다. 전도도 중요하고 영혼도 중요하지만 내영혼을 사랑할줄 모르는데 주님이 영혼을 붙여주실수가 없다는 영적인 사실앞에 마음을 찢고 기도했다. 내영혼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교회안에 있는 영혼들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데 새로운 영혼을 주님이 주실수 없음에 아픔을 가지고 부르짖었다.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이 전무하다 시피된 한국교회의 현실을 부여 잡고 울며 기도 하고 나가 전도하면서 준비된 영혼들도 주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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