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부터 3일간 있었던 요한계시록 사경회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와 생기로 넘쳐 났다.


매 차 새로운 은혜를 주셨지만 이번에는 아주 획기적인 깨달음과 진보가 있었던 까닭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사십이라는 수의 성경적인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알게 되자 어떤 목사님은 "그러면 유대인들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고 맞으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겠네요"라고 하며 흥분을 하기도 했다. 성경의 사십이라는 수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성경 전반에 걸쳐서 주님이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


열의 수는 시험과 시련의 수이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환관장에게 열흘 동안 시험을 해보고 자기들의 얼굴이 동무들보다 나으면 자기들의 청대로 왕의 진미 중에서 채소만 그리고 포도주를 제하고 달라고 청원 할 때도 "열흘"의 열은 시험과 시련의 수이었던 것이다.  그 열흘에 넷을 곱하면 사십이 되는데 그 넷이라는 수의 비밀이 풀린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주리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 동안 광야의 시험 기간을 마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노하셨다고 했다.

노하심의 완성이 사십 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완전한 노하심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그는 또다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매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인 것이다.

인간의 매는 그것이 아비의 매라 할지라도 정욕과 악함을 수반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되기 쉽지만 하나님이 정하시고 때리시는 매라할지라도 매는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사십이라는 수는 하나님이 사랑과 인내로 기다리시는 시간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사랑과 온전케 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거쳐서 사십에 이르는 것이지 매로는 삼십구에만 이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삼십구대와 남은 한대 사이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한량 없으신 사랑과 우리가 사람 되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벌링거'라는 학자의 책에 도움을 약간 입어서 짐승에게 준 "마흔두 달의 권세"에서 마흔두 달의 비밀을 주님이 풀어 주셨다. 사십이라는 수는 여섯에 일곱을 곱한 것인데 그 일곱이 무엇이며 여섯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심에 참석자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탄식과 경이로움의 기쁨이 크게 넘쳐났다. 그리고 666이 무엇인지 그것이 물리적으로 몸에 받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고 지나간 세대에 수많은 학자가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첫째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고 지난 차수 때에 짐승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번에는 둘째 짐승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흥분됨을 감추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그들 중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 주님 중심의 모임, 곧 주님의 모임이며 그것이 다름이 아닌 교회이다.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나 성결교나 그 교단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의 이름에 있어서도 교단의 이름이 앞서면 안되고 주님의 이름이 앞서야 하며 앞뒤가 문제가 아니라 교단의 이름에 비중을 두거나 교단의 이름을 자랑하기보다는 주님의 이름에 비중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주님은 떠나 버리신다. 사람의 모임에 주님은 연연하지 않으시며 미련을 가지지 않으시고 떠나신다. 구약시대를 보아도 우리는 그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의 개념은 "내 이름이 아닌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과 대칭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것은 주님의 모임이 아니요, 성도들의 모임도 아니며 그것은 "짐승의 모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간 상태는 없다.

주님의 모임이든지 아니면 짐승의 모임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하다못해 교인들이 두세 명이 식사하고 차를 마신다 해도 그 모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사람의 모임이요, 짐승의 모임이지 그리스도의 모임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에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뜻과 의향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거와 간증의 기쁨이 없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마음이 전하여지지 않고 주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는 대화도 없다. 오직 자기들의 뜻과 목표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들 그리고 서로 좋아하고 서로 싸우고 공격하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시찰회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느냐, 그냥 시찰회 모임으로 모이느냐에 따라 그 태도부터 달라지고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노회도 총회도 지방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어느 교단의 노회에서 거의 모든 목사님이 전도 훈련을 받고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이 회복이 되었을 때,   마침 노회를 열었는데 단 하루 만에 오전과 오후 회의 동안에 아무런 이의 없이 일사천리로 안건이 통과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노회인 것이다. 서로 싸우고 대적하고 하면서 함께 먹으러 가고 놀러 가고 해외여행을 가며 공금을 쓰는 데에는 이견이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 결단코 될 수가 없다.


사실 그동안 목사님들은 나에게 그들이 겪는 노회와 지방회의 악함과 폐단을 말하기를 극히 자제해 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러지 않아도 한국교회의 부정함을 차마 보지 못하는 내가 그런 것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강하게 책망하는 재료로 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와 같은 것들이 봇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장로교회 목사님은 '장로님이 교회 현실을 말씀하실 때마다 실상이 그런 것은 알지만 조금은 너무하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 노회에 어떤 은퇴하는 목사가 교인은 사십 명밖에 되지 않는데, 교회와 예배당을 비밀리에 칠억에 매각을 하여 착복한 사실을 말하면서 분함에 치를 떨면서 이런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두 건이 아닌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함께 공감했다.  교회 담임목사직을 프리미엄을 붙여서 파는 일들과 거기에 개입되는 브로커들이 목사들이라는 것 어느 교단에서는 삼 년을 담임을 해야 목사안수를 받는다는 규정 때문에 유령교회를 만들어 놓고는 전도사는 자기 교회에서 어린이집의 운전을 시켜서 자기 돈도 아닌 정부의 지원금으로 생활비를 주고 삼 년을 채우면 목사안수를 받게하는 극악무도한 일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 등, 앉은 자리에서 공분과 아픔으로 쏟아져 나온 말들은 정말 귀를 의심하게 하는 악한 일들이었으며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 등돌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제외하고도 사람에게 그것도 불신자들에게까지도 맹렬한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는 비도덕적인 행태를 너도 나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영적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요, 13장은 교회를 잔해하는 적그리스도인 짐승의 출현이요, 14장은 적그리스도에 역사의 결과로 적그리스도를 이긴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순수한 십사만사천의 성도들과  세 천사의 경고가 타락한 음녀 교회를 향한 심판과 복음의 마감 시간에 대한 경고와 짐승의 표에 대한 경고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둘째 천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치는 바벨론 교회가 망하는 선언이 계시록 18장  2절과 3절의 말씀과 일치되는 사건이라는 점은 요한계시록을 연대기적으로 풀던 기존의 신학자들의 이론에 치명적인 철퇴를 가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책에 기록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짐승이나 사람을 섬기지 않는 것이 당연한 라이프 스타일이기 때문에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없다는 것과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짐승의 표를 받아 포도송이 심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곧 짐승의 표는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직도 시간을 주시는데 그것이 첫째 천사가 선언한 "복음의 마감시간"이다. 이복음의 마감시간은 교회 안에 있는 알곡을 위한 것이다. 바벨론 교회 안에 있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소돔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같이 그 보고 듣는 것을 인하여 심령이 상할 대로 상한 알곡을 추수하는 마지막 심판이 임박한 시간에 이루어지는 추수이다.


포도송이에는 구원이 없다.

알곡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교회를 타락시킨 포도송이에게는 가차없는 하나님에 진노의 포도주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가 부어진다.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라는 말은 100%의 하나님의 진노를 말한다.

덜함이 절대로 없고 자비와 인자함이 전혀 없는 맹렬한 진노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옛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질 때에 첫 번째 포도송이 추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곧 구약 교회를 타락시킨 자들에게 향한 진노의 심판이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 사람도 거기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섞인 것이 없는 진노의 포도주가 거기 쏟아진 것이었다.

 

역사가들까지도 그와 같은 환난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증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에돔에서 홍의를 입고 오는 이"라고 표현했으며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라고 물었을 때에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두 번째의 포도송이 심판도 임박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 있는 알곡에는 잠깐 동안 시간을 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18장의 바벨론성의 무너짐을 선언하는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말라" (계18:4)


이것이 무르익은 알곡을 추수하시는 소리이다.

알곡은 포도즙 틀의 재앙과 심판을 단 한 사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교회 안에 알곡을 추수할 때이다.

알곡과 포도송이를 가릴 때라는 말이다.

포도송이는 교회 안의 가짜를 말하는 것이다.

가짜 목사,가짜 전도사, 가짜 집사,가짜 장로 등 거듭남의 간증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이 된다.


요한은 그것을 알곡과 쭉정이라고 했다.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송이 심판의 비밀은 19장에도 또 기록이 되었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는 이론들을 파하는 일이 앞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은 너무나도 무서운 심판이라서 포도송이, 곧 교회 안의 가짜들의 심판을 받아 흘린 피가 말굴레 높이에 넓이로는 일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다고 했다. 일천육백은 40X40=1600이다. 여기에도 사십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계시인데 마귀는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주석 책에 악한 거짓말을 너무나도 많이 넣어 놓았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이 없이 요한계시록을 풀어 이와 같은 혼란이 초래된 것이다. 


주님에게는 이제 이와 같은 거짓말들의 실상을 드러내시고 진리를 바로잡을 때가 된 것이다.


5월 11일부터 있는 계시록 사경회를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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