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장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라는 말의 뜻은 본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유대교적이고 종족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를 교회적인 개념으로 쓰기도 하는데 에클레시아는 모이는 교회로 디아스포라는 흩어지는 교회의 의미로 쓰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헬라어 디아”(διά)스페이로”(σπείρω)의 합성어로서 디아“~를 통하여” “~” “~중에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스페이로씨를 뿌리다라는 뜻의 동사로 합한 뜻은 씨를 뿌림으로”, “씨를 뿌리는 중에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엑클레시아 교회이며 엑클레시아의 모임에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복음의 씨를 뿌리는 교회가 디아스포라 교회이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 지는 교회가 균형이 잘 맞아야 한다. 교회가 모여서만 교회생활을 하고 흩어져서 사는 교회생활을 소홀히 하면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고 모임으로 부패하고 타락한다. 그런가하면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하면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구성원들이 세상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변질이 된다. 말하자면 엑클레시아가 안되면 디아스포라가 안되고 디아스포라가 안되면 엑클레시아도 안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교회는 엑클레시아와 디아스포라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교회이었다.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전은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죽이고 그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위협을 주는 적대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집은 오늘 날로 말하면 믿는 성도들이 모이는 예배당을 말한다. 성전에 있는 것은 디아스포라요 집에 있는 것은 에클레시아다. 사도행전 교회의 성도들은 성전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 곧 흩어질 때나 모일 때 항상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 위하여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그리고 날마다 집에 모여서 떡을 떼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여 자기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활을 살았다. 사도행전 교회는 날마다 디아스포라를 힘써하고 엑클레시아를 힘써 한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오늘날은 왜 교회가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지 못할까? 열심히 모이고 많이 모이는데 왜 믿지 않는 이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을 찾기가 힘 들까? 왜 오늘날 교회는 전도를 하지 못할까? 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을 피하여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교회이다.

내 딸이 고등학교 때에 나에게 질문하기를 자기반에 어떤 아이 어머니가 전철역 앞에서 교회신문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아이는 자주 집을 나가 가출하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렇게 밖에서 전도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가정도 비정상이다. 길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는 목회도 안 되고 가정도 안 되기 때문에 전도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도 본적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가정은 물론 교회 안에서 조차도 칭송을 받는 인격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지나간 일천 수백여년의 오랜 세월동안에 흩어지는 교회가 퇴화 되면서 교회 안에서조차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실한 교회가 된 것은 역사가 알고 지금 교회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결과 교회 안에는 나와 같은 가짜들이 허다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은 줄로 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믿음인줄 안다. 게다가 새벽기도에 출석을 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하면 믿음이 아주 좋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들이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내용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다. 그냥 겉모습만 보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안과 밖의 모습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생활을 살고 그렇게 사는 데에 점점 익숙한 기술자들이 되어 간다. 교회안에서는 수치를 감추고 세상에서는 수치를 있는 대로 벌거벗은 들이 드러내 놓고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뻔히 보고 있는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 모르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백성의 칭송을 기대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 정반대로 살게 되었다. 나에게는 교회도 교회고 집도 교회며 직장도 교회이었다. 예수를 믿기 전의 교회생활과 같이 교회도 세상이고 집도 세상이고 세상도 세상인 그런 생활은 나에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주를 따라가는 것이다. 주를 따라가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배우기 위하여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주님을 배우면 주님을 닮는다. 주님을 닮으면 세상사람 들과 확연히 달라진 생활을 산다. 그런 제자들을 가리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를 따르지 않는 교인은 교회를 다니는 것만 제외하고는 세상사람 들과 하나도 틀림이 없이 똑 같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교인들을 욕하는 것이다. 교회만 다닐 뿐이지 자기들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자기들만도 못한데 그렇지 않은 척 외식까지 하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과 다를 것이 없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까지 욕을 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인 주님의 제자는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숨기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를 따르고 주를 닮는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짐으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것을 알아보고 그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1975121일 입사를 한후로 나는 매일 직장에서 주님을 모시고 사는 교회생활을 했다. 직장이 내가 주님과 함께 사는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다. 집에서 따르던 주님을 직장에서는 모른척하고 따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직장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생활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연수교육을 마치고 인사발령을 받아서 처음 출근을 하던 날 부장의 인도를 받아 직속상관인 국장실에 가서 신입사원으로서 첫 인사를 할 때에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국장에게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나를 소개했다.

회사를 들어가는 날부터 퇴직하는 날까지 나는 매일 성경책을 가지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성경책을 책상에 놓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나중에 예수를 안 믿는 선배가 사람들마다 출근하면 먼저 하는 일이 각각 다른데 어떤이는 먼저 커피 한잔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신문부터 펼쳐 보는 사람도 있고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워 무는 사람도 있는데 성경책을 놓고 오늘 하루 일을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일을 시작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 귀하게 보인다는 고백을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님이 음성을 들려 주시고 말씀을 깨닫는 생활을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혹시 언제 어디서 말씀을 주실지 몰라서 내 몸에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녔다. 전철에서도 읽고 시내버스에서도 읽고 통근버스에서도 성경을 읽었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고 수많은 토막시간을 이용해서 말씀을 읽었다. 나의 와이셔츠 주머니에는 항상 작은 성경책이 꽂혀 있었다. 시간이 지난후의 일이지만 회사 안에서 나를 통해 예수를 믿은 형제들마다 와이셔츠에 성경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모든 자매들이 누구할 것 없이 핸드백을 열면 내 것과 같은 작은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았다. 퇴근할 때에 전철이나 버스에서 성경을 읽다가 또 주신 말씀을 묵상하다가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치는 일은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집에서도 그렇듯이 직장에서도 찬송이 내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쁜 찬송늘하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직장에서도 그렇게 살았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입에 가득했다. 그것은 내가 유별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충격이 그만큼 크고 유별났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때는 멋모르고 사무실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일을 하다가 부장에게 불려가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 때부터는 찬송을 참고 있다가 사무실을 나갈 때에 문을 열고 나가면서 큰소리로 터져 나가게 찬송을 불렀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힘을 다해서 찬송을 불렀다.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게 내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처음에는 이 찬송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복도에서 부르고 다녔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나에게는 이세상이 정말 슬픈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슬픈 세상이 주님과 함께 사는 천국이 되었다. 3절로 되어 있는 이 찬송가는 한글자도 빠짐없이 나의 생활이 되었다. 내가 찬송을 부르고 지나가면 나를 만날 일이 있는 직원은 자기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만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항상 웃고 다니면서 누구에게나 인사를 먼저 했다. 청소부나 청원경찰같은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어떤 때는 하도 열심히 인사를 한 나머지 방금 전에 했어요라는 말을 듣는 일이 자주 있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했으면 어때요 또 하면 좋지요그러고 웃어 넘겼다. 순식간에 회사에서 소문이 나고 사람들의 입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자기들끼리 나를 아느냐고 서로 물어 보기라도 하면 나를 이름으로 알지 못하는 직원들은 아 복도에서 큰소리로 찬송가 부르고 다니는 사람” “아 그 항상 웃고 다니는 사람이 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나는 잠간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변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인격도 생활도 정돈된 사람입니다

나와 같이 예수 믿읍시다

 

본사직원 3000명이 사장부터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출근을 하면 날마다 내가 부르는 찬송소리를 듣고 살았다. 나는 한 영혼이라도 건지기 위해 신입사원 형편에 부지런히 밥을 샀다.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남산에서 삼송리까지 가서 빈대떡과 냉면을 함께 먹은 적도 있었다.

입사해서 처음 며칠 동안은 일을 배우면서 마음이 분주해서 근무시간에 주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출근을 해서 서류를 꺼내면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일과가 끝나고 퇴근을 하기 위해 서류를 문서함에 넣으면서 비로소 주님이 생각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이 원통해서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이까짓 직장이 무엇이 관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한시라도 잊어버리고 삽니까? 하루 종일 주님을 생각하면서 일하게 해 주세요그것은 울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불레셋 사람들인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집에 있을 때와 같이 주님을 항상 생각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직장에서도 집에서와 같이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주님의 말할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아침에 4시반이면 일찍 일어나서 출근준비 전에 두 시간씩 말씀을 읽고 오늘도 주님을 항상 모시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는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네 시간이든 잠을 자지 않고 나의 영혼이 흡족할 때까지 기도했다. 저녁마다 빼놓지 않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을 항상 모시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루를 살았는데 산 것 보다 못산 것이 더 많습니다. 내일은 오늘처럼 살지 않게 해 주세요

내일 아침에 이부자리에서 나올 때는 오늘 같은 내가 나오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를 충분히 하고 하루를 시작한 날과 기도가 부족한 채 시작한 하루는 그 내용도 결과도 여간 다른 것이 아니었다. 기도가 부족한 날은 마귀가 회사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를 유혹하고 시험하여 죄를 짓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은혜를 덜 받았다 싶으면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 날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고 나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혼자 빠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서 말씀을 읽으면서 주시는 대로 은혜를 받으면서 내 영혼의 갈증을 채웠다. 어느 날은 일을 하고 있는데 서적외판원 한사람이 내 책상으로 다가 왔다. 큰 팜프렛을 나에게 보여 주면서 책을 소개 했는데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은 후 쓰레기통에 다 갖다 버린 책들이었다. 나 자신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나는 내 책상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그에게 가리키면서 정중히 말했다.

 

선생님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요 이 성경책속에 있는 것도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귀한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아직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그는 허리를 깊히 숙이면서 네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하고는 돌아서 갔다. 그 후로 그는 다시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요한 웨슬레가 간증한 것처럼 단 한권의 책의 사람이 되었다. 때마침 미국 선교사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아침에 시편 다섯편과 잠언 한 장씩을 읽기 시작했다. 한 달이면 시편 한번 잠언 한번을 읽었는데 아침에 주님이 내 마음에 넣어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출근을 하면 그 말씀이 하루 종일 나를 붙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생활을 변화시킨 말씀 중에 시편과 잠언에 있는 말씀이 제일 많았다. 그러는 중에 어느 날 시편 16편의 말씀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아 다윗은 주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살았구나 그래서 주님이 우편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니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고 승승장구하는 믿음으로 산 것이구나. 다윗은 그의 안에 성령을 받지도 못했는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렇게 살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말씀처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활속에서 항상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려고 애를 썼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도 직장에서나 길에서나 가정에서 어디에서나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사는 생활이 어렴풋이나마 살아지는 은혜가 임했다.

그러면서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체험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 내 생활이 되었다. 그 찬송가 가사와 같이 주님 이전에 보지 못했던 조금 더 높은 곳에 나를 들어 올려 주시고 거기 서 있게 해 주세요”(Lord lift me up and let me stand....Oh higher ground I have ever found) 오늘의 나는 어저께의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찬송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부르고 다녔다.

그렇게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빼놓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괄목할 만한 기도생활의 유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시간이 되면 나는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골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혼의 아내는 그런 내가 못마땅해서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살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고 바울처럼 살것이지 왜 결혼을 했느냐고 핀잔을 주기 일수이었다. 그러나 기도하는것만큼 내가 변화되는 것을 알고나서 부터는 아무와도 타협을 할수 없는 주님과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sweet hour of prayer, sweet hour of prayer)는 찬송가 가사가 아니라 나의 생활이 되었다. 그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요 그시간이 하루중에 가장 귀한 시간이 되었다. 매일 정한 시간이 되면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앞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나를 불러내어 그의 보좌앞으로 인도하셨다. 거기서 나의 모든 죄를 깨닫게 하시고 모든 필요를 알게 하셨다. 그리고 간구하고 부르짖게 하셨다. 공휴일에는 아침식사도 점심식사도 거르고 오후까지 골방에서 기도로 씨름을 하곤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나의 모든 위로와 권능이 되어 주셨다.

십여년이 지난후에 회사의 홍보실장과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그러자 그는 아주 다급한 마음으로 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왔다.

 

이형 한가지 궁금한게 있어요. 이형은 스트레스를 안받습니까? 어떻게 십년이 넘도록 항상 그렇게 기쁜 얼굴로 삽니까?”

스트레스를 안받는다면 거짓말이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스트레스가빠져나가는 수채구멍이 있어요

?”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굉음을 내면서 빠져 나가지요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항상 지켜 보면서 이질문을 할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나에게 이렇게 영어로 말하고 헤어졌다.

 

“any way(어쨌든) 부럽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영어 찬송가 카세트를 녹음기에 틀어 놓고 듣고 있었다. 그 때에 주님의 책망하시는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왔다.

 

얘 찬송은 내가 듣고 감상하는거야, 너는 찬송을 부르고 나는 듣는 거지. 그런데 지금 왜 너는 찬송을 감상하고 있니?”

 

정신없이 회개하고 그다음부터는 같이 따라 부르지 않는 한 찬송가를 켜놓고 듣는 교만한 일이 나에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 하면서 거룩해지는 만큼 깨달아지는 말씀이 많아졌다.

그러는 중에 말씀이 하나가 깨달아 졌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어느 주석에도 없는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내 생활과 함께하여 깨달아진 말씀이었다.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한 말씀이었다.

사람들은 부장이 바뀌고 국장이 바뀌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한껏 자기를 꾸미고 조심을 한다. 그러나 일단 인정을 받고나면 성의 없이 대하고 피차에 좋은 관계가 된 것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사는 나는 새로운 상사가 와도 나를 잘 보이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모든 인간들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면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첫인상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시작 하지만 날마다 변화되기 때문에 인상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날마다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나의 물 같이 맛이 없는 인격이 포도주같이 맛있는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날마다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져만 갔다. 그날 저녁에 마침 교회에 갈 일이 있어서 교회를 갔는데 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먼저 만난 부목사님에게 이것을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심각해지면서 집사님 부끄럽습니다. 내가요 타이틀만 목사예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오해나 편견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나 같이 지내다 보면 그들이 내 생활을 보고 길어야 석달이면 가지고 있던 오해도 편견도 다 풀어진다. 그런가 하면 애매히 나를 적대시 한사람도 있었다. 같은 부서에 내가 모시고 일하는 김차장이라는 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일이 서툴었지만 그는 20년이 넘도록 방송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가톨릭신자이었고 종교활동도 많이 했던 사람인데 기본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야단을 칠일도 나에게만큼은 꼬박 꼬박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곤 했다얼마나 나에게 심하게 했는지 아침에 출근하면 나를 보고 웃는 그의 모습도 징그럽고 싫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죄를 많이 지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이런 생각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교통사고 나서 죽기도 잘 하는데 저 사람에게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늘 아침에 또 보는구나라는 악한 생각으로 내 영혼을 더럽히면서 살게 되었다. 내가 사람을 미워하는 만큼 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내 영혼이 더 곤고해졌다.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함들 때에 나는 어느 날부터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내가 저 김차장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요. 나를 변화시켜 주세여 그래서 저 김차장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회사 일에 베테랑이 된 것은 그분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하나라도 책잡히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긴장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주님은 날마다 물 같은 나를 포도주같이 맛있는 인격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나에게는 연회장격인 김차장이 나를 맛보기 시작을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 맛있어지는 나를 놀라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덧 직장에서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사랑은 그와 나 사이에 가톨릭도 개신교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래전일이지만 미국에서 말씀을 전 할 때에 어느 집사님이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어느날 업장에서 텔레비전을 켜고 일을 하고 있는데 유명성우들이 KBS 좌담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한다. 사회자가 마무리를 하면서 방송국생활에 잊을 수 없는 분이 한 사람있다면 말해달라고 하자 한 사람이 내 이름을 대면서 그분이 있을 때에 방송국분위기가 가장 좋았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일치하게 그렇다고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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