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되서 목회가 안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예수전도협회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흔히들 하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을 배우고 방법을 배우기 위해 이세미나 저세미나를 전전하다가는 오늘날은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에게 가서 교리적으로도 안맞고 이상하다시피한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난 사람들에게 방법을 배우고 율법을 배우고 수단을 배우는 어리석은 일들을 많이 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와같은 목회자들에 의해서 교회생활은 열심히들 가르치고 배우는데, 예배생활을 배우고 헌금하는것을가르쳐 주고 봉사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배우는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지 못하는데 그것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경건생활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안에서 어떻게 살고 행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말씀을 가지고 믿음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사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와 싸워 이기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회가 성도들에게 할수 있는 거의 전부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와같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르쳐 주지 못하는가? 교회안에는 멀쩡한 교인들이 많은데 직장에 나가보면 하나님의 자녀구실은 커녕 자기가 믿는 예수를 말하지도 못하고 자랑하지도 못하는 영적불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차라리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믿음을 지키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고 뭇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교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렇게 경건생활 곧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교회안에 경건한 인격들이 사라지고 경건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사람의 교훈과  사람의 유전을 가르치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교회가 경건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 곧 교회의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닮은 경건한 인격을 가지고 주님에게 내가 배운 거룩과 경건을 가르치고 믿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 경건한자가 끊어진 것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하고 그와같은 현상이 오래된 것은 또 교회가 돌파구를 찾을수 없을정도로 암담한 영적상황에 들어간 것은 나부터 경건생활을 배우지 못하고 주님의 거룩함을 저버리고 더럽혀진 영혼을 가지고 교회안팍에서 행한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역사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걸음마부터 주님에게 배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사람의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던 삶을 접어야 한다. 사람의 교훈을 버려야 한다. 내가 영적인 아기와같은 상태에 있음을 주님앞에 고백하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을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이 너무나 늦은 때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수 있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아무런 역사도 열매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노력한것에 비해 결과가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에게 배우는 사람들은 아무런 아픔이나 문제의식이 없이 이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니고 따라다니면서 무엇인가를 배우려 하고 있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는 열매도 없고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여러가지 교훈에 밀려 요동하는 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정이 없다는 말이다. 쉬이 동요하고 쉬이 설득을 당하고 쉬이 혹함을 받고 미혹을 받는다는 말이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사람도 경험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는 인격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인격을 지식화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우맹이요 소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님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과는 달리 열매가 풍성하고 사람의 생각밖의 역사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주님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배우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을 닮는 것이다. 그의 인격과 생활이 주님을 배우는 사람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에게 배우는 것은 쉽고 쉼이 있고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주님에게 배우는 것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사람에게 배우면서도 주님에게 배운다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피할수 있는 것의 열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소두마리를 한겨리로 해서 멍에를 같이 메운다. 그래서 키가 다르면 아픔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같이하면 영적인 키가 다른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과 멍에를 같이 메기 때문에 믿는 자가 반드시 아픔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과 같은 멍에를 메는 것도 아픔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물론 영적인 아픔인 것이다. 주님과 우리는 키가 차이가 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내가 잘못행하는 것 때문에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픈 결과를 가져오고 영적으로 주님의 키에 맞게 성장이 되기 전에는 날마다 시마다 아픔이 있는 것이다. 주님과 맞지 않는 아픔을 아파한다. 나는 내죄 때문에 아파하고 주님도 내죄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은 멍에의 아픔의 과정이 없는 사람은 죄송한 말이지만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운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게 배운 사람이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사람에게 배운 지식만을 가르칠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십년이 넘는 긴세월을 주님하고 안맞는 내모습에 슬피울며 살았다. 날마다 울었고 시간마다 아파했다. 주님도 같이 아파하시고 탄식하시고 같이 울어 주셨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이와같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함으로서 일어나는 아픔이 없다. 어떤이는 회개도 아니할려고 하고 회개라는 말조차도 싫어 한다. 달콤하고 듣기에 좋은 말을 들으려 함으로 스스로 멸망길을 가고 있다. 육은 힘들지만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육신이 편하고 안일하고 육을 누리는 넓은 길로 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이제는 주님에게 배우기를 사모해야 한다. 주님이 당하시고 지금도 아파하시는 바에 영혼의 아픔 곧 주님과 멍에를 같이 하는 아픔을 우리는 사모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주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싶다고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닮기를 사모하고 거룩해지기를 사모하고 경건생활을 사모하고 무엇보다도 날마다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회개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죄의 아픔을 체휼하기를 기도하고 사모해야 한다.

그때에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배우는 일들이 일어나며 주님에게 배워갈수록 주님의 강력한 역사가 더해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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