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수 없나니....                      

강의 : 이유빈 장로
정리 : 고병훈 집사

(히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한 번 비췸을 얻고 / Once in lightend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단번에 구원받는 것이다.
한 번에 비췸 받는 것이다. 계속 조금씩 비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은 생명이라고 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영생을 얻은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다. 즉 영생이다. 가장 큰 선물이 영생인 것이다.
또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사를 맛보고 신비한 체험을 맛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것을 성령이라고 할 수도 있고 넓은 의미에서 성령 받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은사를 맛본 것으로도 볼 수있다.

*성령의 참여한바 되고
이 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내 심령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고 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가 되고 참여한바가 된다는 말이다.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고, 하나님 말씀에 진수를 맛보고, 말씀을 즐거워 할 줄 알고,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체험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단 말이다.
(시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말씀을 보거나 체험하게 되면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예수 믿고 나서도 교회 안에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도 말씀의 무슨 맛 인지는 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꿀맛보다 더 달다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119:103) 주의 말씀에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런데 밭의 비유에서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도 죄를 짓는다. 기쁨으로 받아도 그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눈물로 말씀을 받았어도 돌아서서 배반하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눅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누가는 말씀에 목격자라고 말할 때 예수를 목격한 사람에 대해서 얘기를 했지만 이 말씀을 우리 생활 속에 원용해 보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말씀의 목격자인 것이다.
(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목격하고 보는 것을 말한다.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것이 말씀을 맛보는 것이다. 내게 개인적인 말씀이 주어지고 그것을 내가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걸 내가 맛보는 것이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 말은 천국생활을 이 땅에서 경험하고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산다는 말이다.
천국에서 살 생활을 이 땅에서 맛보고 산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은 죄를 이기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세상을 호령하며 살고 정복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막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버린 자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이 귀하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서 버린 것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천국 생활을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딤전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해서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회개를 해야 한다면 처음한 회개가 거짓으로나 가상적으로 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타락한 자들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온전한 회개를 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믿다가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회개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회개는 한번으로 끝난 것이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죽은 행실의 회가가 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한번 한 것으로 끝났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회개는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이것은 한번에, 영원히 단번에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는 것은 영단번의 사건이지 거듭 죽는 것이 아니다.

어떤 번역에 보면 ‘첫 회개로 돌아갈 수 없다’ 라고 나와 있다.
첫 회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식에 들어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냥 완전한데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 타락한 상태에서 주님 앞에 다시 나와서 완전한데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회개못한다’ ‘버림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원받지 못 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비췸을 얻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바가 되었는데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에 관한 부분을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이 문맥을 볼 때 그런 사람은 다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온전한테 나가면 된다는 말이다. 주님은 영원히 단번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타락하고 죄짓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살던 사람도 다시 거기서 완전한데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중에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목욕했다’는 말은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고 있고(생명에 이르는 회개) ‘발을 씻으라’는 말은 날마다 짓는 자범죄(죽은 행실의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발을 싯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구원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상관없다는 말이다. 즉 안식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 시대의 유대교에서 가르침은 ‘은혜를 받고 어떻게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냐?’ 하며 정죄의식에 빠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마귀가 속삭이는데 ‘야 집사가 너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가 있냐? 권사가 너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냐?  목사가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냐?’ 이렇게 죄를 짓자마자 마귀가 속삭인다. 이것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주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것 때문에 죄책감에 빠지고 이것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죽은행실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경계하고 그것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보수교단에 속한 분들은 ‘죄’ 하면 율법적으로 접근하고자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율법적으로 해석들이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이 나오는 이유는 히브리서 6장1절부터 6절에 있는 말씀을 실제 생활속에서 영적 전쟁을 하고 죄와 싸워 이기면서 살아 보지 못 했지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축복과 저주라는 측면에서도 보면 축복은 각종 채소를 내는 것이 축복이고 저주는 채소를 내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불사름이 된다는 말이다.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축복은 안식에 들어가는 삶을 얘기하는 것이며 저주는 버림받아 광야에서 그의 날을 헛되게 하고 그의 해를 두려움으로 지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피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물 가운데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저주받은 땅과 같이 저주에 가까운 인생을 살다가 망하고 말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지옥을 간 것이 아니라 천국을 갔다. 이 부부는 구원받고 감사해서 자기 재산을 바치기로 결정할 정도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 이었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했을 뿐 이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처음 회개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2천년동안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걸어놓고 있다.
한 번 매달은 것도 죄송한데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2천년동안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려는 사람은 주님을 또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려 하는 사람과 같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또 하면 주님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이 욕 먹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또 하려고 하는 것이 주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욕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서 불사름이라는 것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날을 헛되이 하고 그 해를 두려움으로.... 그날이 헛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삶이 헛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 저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보다도 성도의 생활인 안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은 애초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

찰스 윌리암즈는 이렇게 번역을 했다
첫 번 회개의 단계로 돌이키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생활의 첫걸음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라고 했다. 한번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완성시켰는데 계속해서 첫 회개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윌리암 백은 이렇게 번역을 했다.
그들이 타락했을 때 그들을 돌이켜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데 back to a new returns ‘돌이켜서 다시 새롭게 회개하게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의 모든 행실에 again 계속 다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안식, 받아야 할 안식 즉 완전한데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생활의 결과, 성장의 결과로 7절 8절에 축복과 저주를 말하고 있으며 9절부터는 완전한데 나아가는 데에 대한 격려, 즉 인내로써 이것을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다 라며 인내를 격려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인내를 모델로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이것을 받을 수 있다. 이 믿음에 성장한 분량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1-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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