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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면서 어느 목사님이 말했다. ?

 

“장로님 실토를 하자면 저는 신천지에도 갔다온 적이 있습니다. 이십여년전인데 그때는 이만희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가르쳐 주는데가 없어서 갔는데 별소득이 없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이 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

 

“그리고요 이아무개 목사인지 하는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잘가르친다고 해서 갔었는데 내일은 무슨 기가 막힐 것이 나올 것처럼 해서 하루가 지나면 아무것도 없고 또 그날도 내일은 기가 막힌 것이 나온다고 하여서 기대를 하면 실망을 하고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맞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자기도 체험했다는 말이다.

 

그말을 들으면서 마치 어렸을 때에 약장사들의 행습이 떠올랐다.

약장사들이 무엇인가 신기한 것을 보여줄것처럼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 두고 마지막에는 자기들의 목적인 약만 팔고가는 허탈한 모습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는 또 누군가가 말했다.

“그사람들이요 자기들을 가리켜 자칭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나 관련하여 종말론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둡게하고 오히려 교인들을 두려움가운데 빠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확실하지도 않은 가설을 가지고 사실인것처럼 말하고 자기들이 지식을 선점하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뽐내며 교만함으로 거드름을 피기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의 신랑인데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천국의 혼인잔치인데 그혼인잔치를 두려워하고 무섭게 만드는 것이 그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그이아무개라는 목사에게 요한계시록을 배우러 간 목사님이 거기에 갔더니 초대교회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아니 목사님 전도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초대교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잘못된거 아닙니까?”라고 했더니 그분이 말하기를 “ 아 그러지 않아도 제가 전도를 좀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답을 하더란다. 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전도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행위가 아니다. 전도는 인격이요 생활이다. 두달란트받은 사람의 생활이고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의 인격이다. 주님과 회계해야하는 장사요 영적인 영리활동이다. 내가 주님을 따라 그의 제자로 사는 것이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는데에 유력해야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또 오늘날의 현실이 이단들이 이땅에 편만한 거짓선지자들이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를 가지고 종말론으로서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고 그것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말론을 알고자한다.

 

그런데 종말론을 잘 안다고 주님을 남들보다 더 잘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종말론을 잘가르친다고 주님을 잘 만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은 그런말을 하신 적이 없다. 종말론을 잘아는 사람을 주님이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신실한 종이 칭찬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종말론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정욕이요 종말론을 지식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지식의 욕구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그것은 혼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통해 무슨 신비한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은 교만이요 패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동안 종말론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과 종말론에 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주님을 잘 기다리는 그의 신부인 교회로 준비를 잘하게 하였다기 보다는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종말론으로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는 이단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을 하는것이 결코 지나친 지적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주님은 요한에게 말씀을 지키는 생활의 중요성부터 말씀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말씀을 지키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말씀대로 살는 것이 성도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것이 성도요 하나님나라에 속한자로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요 하나님의 통치와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인격으로 오늘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성도들이 이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이다.

당신이 오늘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했다면 교회생활이 무의미한 것이다.

당신이 오늘도 세상에서 어제보다 하나님나라의 생활에 더 익숙하여지지 못하였다면 교회생활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당신이 오늘도 세상사람들에게 빛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끼치지 못하였다면 교회생활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요 그것은 혹시 잘못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데에 말씀이 필요하고 그래서 오늘주시는 말씀을 우리는 일용한 양식이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기 위해서 받은바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데 내힘으로는 순종도 안되고 살수가 없으니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데에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잘못살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면 나를 보고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우리는 전도라고 한다. 전도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거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요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기 위해서 영의 양식인 말씀이 필요하고 그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기도로 도우심을 구하고 잘못살고 죄를 지었을 때에 즉시 하나님과 화목하고 관계를 정상화 하기 위해 회개가 필요하고 죄씼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복음전도와 열매를 맺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백성이라면 전도를 아니할수 없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면 열매를 아니 맺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종말론이다.

이론인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론을 생활하는 것이다.

지식의 종말론이 아니라 인격이 종말론적인 인격으로 사는 것이다.

종말론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굳이 지식을 구하지도 않고 지식을 구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종말론을 가지고 남들을 위협하지도 않고 두려움이나 동요되는 마음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의 종말론이나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에 앞서 우리는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을 오해하는 이유는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지식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도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을 병적으로 높이고 자신이 종말론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단들이나 거짓선지자들 잘못된 교파들 몰몬교나 안식교나 신천지나 하는 것들이 다 하나같이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베드로의 종말론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마수를 뻗어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베드로는 말세를 당하는 성도가 어떠해야함을 우리에게 잘 일러 주고 있다.

 

(벧후 3: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 둘 곧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과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다시 기억나게한다고 말한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3절에서 말세에는 기롱하는 자들 곧 속이는자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말하면서 그들이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겠다고 했다.

자기의 정욕이라는 말은 지식의 욕구로 성경을 본고 가르치는 것도 포함이 되는 말이며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이며 그말씀으로 사람들을 혹하게 하겠다는 말이다.

혹하는 말씀은 없다 순종하는 말씀뿐이다.

말씀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수 없다.

하나님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알신앙이다.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요 그의 말씀은 순종의 대상일뿐이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기롱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한다.

주님이 강림하심의 때를 가지고 혼란스럽게한다.

그때는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다.

아들도 모른다고 했다.

때를 알려고 하는 것이 교만이다. 때를 계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니엘도 다니엘 12장에서 때에 관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말씀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두 번이나 명령하시고 말씀하신다.

다니엘도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는 단 말인가?

다니엘에게도 알려주시지 않은 말씀을 알겠다는 말인가?

마지막때까지 간수되고 봉함된 말씀의 봉함을 스스로 뜯겠다는 것인가?

이는 반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때의 테스트스톤(test stone-시금석)은 나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 보는 것이다.

내영혼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의 때가 가장 잘보인다는 말이다.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베드로는 어리석은 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서 때를 분별하고자하는 어리석은자들을 책망한다. “조상들이 잔후로부터 만물들이 그대로 있다하니”라는 말은 태양도 달도 땅도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세상을 보면 망할 것 같지도 않고 끝날것같지도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만물의 모양이나 환경으로 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멸망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노아시대에는 물이 넘침으로 멸망했지만 이제는 불로서 온세상을 사르실 일이 남아있음을 베드로는 일깨우고 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면서 베드로는 주님의 날자계산은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계산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이들이 주님이 더디 언다고 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사 한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기다리신다고 말한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래서 곧 주의 날이 도적과 같이 올것이며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 없어지고 모든 체질이 불에 타서 녹아지고 없어지며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겠다고 말한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이는 아무도 부인할수 없는 진리이다.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종말론은 주님이 오실 때가 언제인가 보다는 주님이 오실 때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함에 강조점을 둔다.

 

주님이 오실 때에 어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느냐 곧 거룩한 행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다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의의 거하는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본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을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고 권능으로 살며 땅끝까지 사는 사람들에게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때에 그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명한다.

두려움은 평강의 반대이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시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 사람들 곧 구원받지 못한 가짜들이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라 부르는 자들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평강가운데 기다리는 것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1,2)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주님이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다.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나같은 것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만일 1973년에 주님이 오셨다면 나는 전혀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고 지금쯤 지옥불에서 고통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래 참으셨다. 주님은 지금도 참으신다. 아직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오시지 않으신 것이다.

 

이와같은 것들이 바울이 주님이 주시는 지혜대로 쓴 글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모든 편지에도 이와같은 사실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런데 무식한 자들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억지로 말씀을 푸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어려운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억지로 풀기보다는 그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도 멸망길을 가고 다른이들도 멸망길로 인도한다.

 

 (벧후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다.

바울이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에 미리 알았다

모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법한자들 곧 정욕대로 기롱하는 자들 말씀을 억지로 푸는자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 그들에게 미혹을 당하는 것은 굳센데서 떨어지는 것이다.

굳센 믿음이 연약해 지는 것이다.

 

굳센데서 떨어지면 마귀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는 것이다.

마치 사자가 무리에서 떨어진 먹이감을 노리듯이 마귀의 공격권에 들어가는 것이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그의 종말론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한다.

 

하늘이 떠나가고 땅의 모든 체질이 불에 녹아지더라도 그런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처럼 어느 행성이 지구를 들이받아 멸망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권면이다.

 

그리고 오직 한가지 일만 있다.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이다.

그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것이 종말론을 사는 생활이다.

생활하는 종말론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간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어제보다 오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이 더하여 가는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구속의 사랑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자라가는 것은 계속동사이다.

 

그리고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다. 들어서 아는 것도 아니요 공부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생활로 아는 지식이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인격으로 아는 지식이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의 사랑을 받음으로 아는 지식이다.

그지식이 자라가는 것이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이다.

 

구속의 은혜에서 오늘도 자라가고 주님과 함께 살아서 생활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다시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이요 생활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종말론이다.

베드로의 종말론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의 종말론도 다니엘의 예언도 알수가 없고 오히려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의 반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무법한 자들이요 기롱하는 자들이다.

 

이와같은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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