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둥에서 돌아와서


너무나 힘이 들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 일곱 시에 인천공항에 내려서 일단 잠을 한숨 자고 설교준비를 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어 잠이 들었는데 밤 열 시 삼십 분에 일어났다. 그리고 또 글 하나를 쓰고 아침 일곱 시까지 잠을 잤다.


돌이켜 보면 사역이 힘들기 보다 같이 일을 하는 이들이 나에게 더 짐이 되고 힘들었다. 자기중심으로 행정을 진행하여 미스를 내는 것은 그래도 작은 일이었다. 시간만 나면 교만이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눌러 주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어느 목사님의 교만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 영혼이 불쌍한 마음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 다음날 집회를 하여야만 했다. 집회기간도 9박10일로 길었지만 영적인 싸움으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여름전도여행보다 더 영적으로 긴박감을 가지고 사역을 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목회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와같은 말씀을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고 놀라움을 말하던 그 노인목사님을 잊을수가 없다.


그들은 모슬렘을 가장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모슬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모슬렘의 종교적인 태생이 기독교가 타락함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전했다. 모슬렘이 귀신을 무서워해서 밤에도 문밖을 외등으로 훤히 밝히고 방안에 전등을 켜고 잠을 자야 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이 부르는 찬양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적인 행위임을 깨닫고 허탈함 가운데 웃기도 하면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씀을 들었다. 그들이 춤을 추면서 찬송을 뜨겁게 부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찬송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직접 춤을 시연해 가면서 그들에게 부모를 찾아간 자녀들이 부모와 마음에 있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인사도 못 하고 그 앞에서 노랫말로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하면서 노래하고 춤만 추고 그냥 인사도 없이 돌아온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냐고 일러주면서 지금 전 세계의 교회들이 그렇게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허구를 들으면서 허탈함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이사야가 2700년 전에 말씀하고 주님도 이 말씀을 인용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6)


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들의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 외식 덩어리이며 허구임을 알게 되었다.

저들의 예배가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의 예배임을 깨닫고 아파서 회개하고 울기도 했다. 자신들에게는 예배다운 예배가 없었음을 시인하고 울고 회개했다.


저들은 모슬렘의 위협과 그들의 기세에 눌려 복음 전도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한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켜주신 예수를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깨닫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 교회와 같이 복음과 함께 회개가 없어진 인도네시아 교회를 안타까워하면서 자기들이 이 죄용서의 복음을 믿고 죄를 자백하면 교단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형편을 아파하기도 했다. 죄 용서함의 복음이 없는 교회가 되고 회개를 금기시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율법주의에 모슬렘과 비슷하게 죄를 감추는 종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지 않고도 그것은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며 예수를 믿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은 의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만 의원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종교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극한 형편에 빠진 것이다.


회개하고 거룩함으로 살고자 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자르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진리대로 살고 전도한다고 많은 성도를 죽인 카톨릭과 같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었다.

 

저들은 믿는 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처음 들었다고 했다. 요즈음 한국의 은사주의 교회에서 흔히 인식되는 것과 같이 그냥 성령이 자기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성령도 자기들과 같이 기분 내키면 계시고 아니면 떠나가시는 분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이 내 몸을 성전 삼고 내주하시는 진리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들었다.


저들은 분초마다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사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교회를 다니고 교회생활을 하고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인줄 로 알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나 가정이 변화를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살았음을 고백을 했다.


저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와 목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난번 처음 집회와는 달리 그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회개를 배웠다. 죄를 자백하는 시간에 처음 두사람은 입술로 하는 죄자백을 했으나 기도회중에 자기의 죄를 내 놓으라고 가르쳐 줌에 자기의 죄를 아파하면서 자백하는 은혜도 주셨다.


그들은 베드로의 디베랴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의 사랑의 질문을 들으면서 울었다. 그동안은 주님이 자기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곧 주님이 인정할수 없는 주님이 알지도 못하는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에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회를 하지 못한 것을 알고 한없이 울고 회개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놓고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부르면서......

그리고 헤어지기를 싫어하며 “next time"을 연신 말하면서 헤어졌다.


거기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아이같이 주님만을 사랑하는 주의 일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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