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몸에는 복원 작용(redintegration)을 하는 기능이 있다. 이는 과도한 운동이나 노동으로 체력을 낭비했을 때에 그것을 회복시키는 본성이기도 한 것이다. 몸에 특별히 고장이 나고 병들었을 때에는 물론이며 이를테면 잠을 자는 것도 그와 같은 복원작용의 하나이며 배가 고픈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그와 같은 작용의 일환인 것이다. 그러나 몸도 너무나 병이 깊으면 복원능력을 상실하고 그냥 꺼져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던져지는 것을 본다. 자동차도 커브 길에서 복원력을 상실하면 사고가 난다. 배도 커브를 틀다가 복원이 되지 않으면 침몰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으로 목이 마를 때가 있고 배고플 때가 있으며 영적으로 병들었을 때에 고침을 받고자 하는 복원력이 작동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도 몸과 같이 병든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적응을 하고 영적인 깊은 잠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의식은 있으나 그 상태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월호를 보라! 복원력을 상실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참상을 불러왔는가? 그러니 교회도 영혼도 복원력을 상실하면 얼마나 무섭고도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겠는가?


일전에 어느 집사님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영적인 점이 전혀 없고, 그래서 자기의 영혼이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자기가 그 교회를 나오면 교회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고 어려워지므로, 인간적인 의리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하겠다는 사정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못하여서 그 교회의 목사가 강단에서 음란한 말을 해서 교회를 나왔는데 어디 갈 교회가 없어서 무적의 신세가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은 그 교회에 있을 때도 그렇고 나와서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인데 자기의 영혼이 복원을 할 아무런 동력을 얻지 못한채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외국에 사는 어느 목사님이 귀국을 했다가 출국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분은 옛날도 그랬지만 나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속사포식으로 급히 말을 했다. 그 말의 내용은 자기가 여전히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었으나 내가 듣기로는 같은 마음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는 말들을 했다.


그분은 자기가 여전히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것은 그분이 이십여 년 전에 훈련을 받을 때에 내가 한 말이었다.

“여러분 여기에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여기 오지 않을 정도로 주님하고 잘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전도협회는 망해야 합니다. 교회가 살면 협회는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그 말을 집중을 해서 들었고 그 말의 뜻은 모르고 그냥 오지 않으면 잘되는 것인 줄 알고 다시는 훈련을 오지 않기로 하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모님이 다시 한 번 훈련을 받고 오더니 이전에 훈련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도 안 되겠다 싶어서 그 후부터는 월요성경학교부터 매번의 훈련을 빠짐없이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성장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전도를 하기 시작을 했는데 현지인들이 전도에 참여하면서 전도가 불이 붙었다고 했다. 그리고 전도하는 현지인들의 수가 제법 모여졌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기도 중에 "'Resign"이라는 단어를 음성으로 주셨다고 했다. 그 말은 “그만두라”는 뜻이다. 그래서 전도를 한날에 그만 두었더니 현지인들이 와서 당신이 시작 해놓고 나도 이렇게 전도를 하게 하고, 왜 그만두느냐고 항의를 하곤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도를 쉬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전도는 행위가 아니다. 전도는 생활이다.


행위는 은혜가 없어도 할 수 있으나 생활은 날마다 새 은혜를 받아야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된다. 그 목사님이 전도를 그만둔 것도 주님이 또 그만하라고 하신 것도 어느새 전도가 행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따라서 전도를 하는 사람들은 전도가 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하면 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는 그의 가지라고 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다.

그래서 가지인 우리가 나무인 주님 안에 잘 붙어 있어야 열매를 절로 맺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주님은 이제 세상에서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밤이었다. 그리고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그의 제자들에게 부어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아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어느 목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태권도 사범인데 은혜를 받아서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의 냄새가 물씬하게 풍겼다. 의복도 연예인처럼 입었다. 그의 말이나 말투 그리고 자세나 태도 표정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세상의 태권도 사범들 중에도 좀 더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전도를 잘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가 질문하면서도 무엇을 묻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냥 대답해 주었다.


“주님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의외의 표정을 지으면서 놀란 듯했다. 왜냐하면, 그도 통속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질문에 내가 전도하는 방법을 내놓을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재차 질문했다.


“주님하고 살아요?”

“네.”

“주님하고 사는 게 무엇인데요?”

“주님이 나를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듯했다. 실제로도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주님이 나를 살아 주시다니요?”


그리고 그는 더듬다가 말도 못하고 당황한 채로 대화는 끝이 났다.


전도는 주님하고 사는 생활의 결과이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는 것을 보라 주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어 모든 시간과 인격과 생활이 공유되어야지만 전도를 할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예로 말한 협회에 훈련을 받으러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은 그와 같이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생활하는 생활을 살라는 권면이었던 것이다.


어느 간사가 지방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와서는 거기 목사님들의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지금도 계속 전도를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나에게 그리 탐탁한 말이 아니었다. 주님도 전도를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관심은 주님 안에 계속 머물러서 주님과 동거하며 잘 살고 있는가? 날마다 새롭게 은혜를 받으면서 줄기이신 주님과 하나된 생활을 살고 있는가이지 전도를 하는 것이나 열매를 맺는 것이나 교인들이 얼마나 등록을 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도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전도를 하는 것이나 열매를 맺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노력하거나 힘을 쓰거나 할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전도가 안 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도 안 일어 나는 것이다.


주님 안에 항상 거하는 성령이 항상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전도를 해도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악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냥 해온 것이니까 그만두지 못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앞에 목사님처럼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닐 수는 있으나 그와 같은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목사님의 경우와 같이 주님은 그런 전도는 하지 말라고 말리신다. 어디 전도뿐이겠는가? 기도도 행위가 되고 예배도 행위가 되고 찬송도 마음에도 없는 찬송을 부르는 행위로서 부르고 성경공부나 말씀을 듣는 것도 심령으로 들어와서 회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 머리로 들어가 깨달음만 늘어나서 교만해지고 말씀을 자기를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이고 말씀으로 남을 재단하고 자르고 공격하는 일들이 다 행위이기 때문에 나오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복원 능력이다.

영적인 복원 능력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믿음의 훈련과 축복을 받고 돌아왔으나 자기가 주님에게 서원한 대로 벧엘에 가서 살지 않고 벧엘보다는 수월한 세겜에서 살았다. 그것이 결국 그의 딸이 세상의 죄에 노출되게 해서 그의 아들들로 죄를 짓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자기의 안위도 흔들리고 모두가 다 죽게 될 처지에 들어갔다. 그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고 자녀들과 함께 벧엘로 올라갈 때에 하나님이 주변 마을들에게 야곱의 아들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임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위기에서 건져 주신다.


야곱은 벧엘의 서원을 잊어버렸으나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야곱은 세겜에서 살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야함을 알고 계셨고 야곱을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건들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자기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음으로 자기가 가장 비참했을 때에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복원작용이요, 복원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필요 이전에 하나님의 필요이다.


그래서 협회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훈련을 스무 번을 받고 수십 번을 받았다 하더라도 은혜를 상실하였으면 복원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필요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필요임을 아는 사람은 순종하는 것이다. 야곱과 같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래야 하고 얼마나 더 그래야 하는가 하면서 지긋지긋함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자주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겜사람처럼 사는 내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줄기이신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가지의 비참함을 알고 있는가?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나의 모습이라면 내가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주님이 회복을 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은혜를 잊어버렸다면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눈물을 잃어버렸다면 눈물을 회복해야 하고 기쁨을 잊어버렸다면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전도를 하지 않고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전도를 중단했다면 어찌하든지 다시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나를 더 이상 버려두지 아니하시도록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면 그것이 예배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생활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가?

기도 생활이 없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그것이 기도를 하고, 하지 않고 하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생활이 문제인 것을 아는가?

전도를 못하고 열매가 없고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것도 전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는 '생활의 문제'인 것이다.

영혼이 병든 것도 생활의 문제이다.

가정이 병든 것도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주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도 부모가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수전도협회를 오해했다.

전도를 가르쳐 주는 데인 줄 알고 전도를 해서 교회를 크게 하는 데에 이용하기 위해서 협회를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랐다. 이 집회를 통해서 목사나 평신도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집회에서 전해지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전도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못 살았음을 원통해 하고 아파하며 회개했다. 왜냐하면 전도하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생활을 주님이 보여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복음은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거짓말과 악한 말의 무수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이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이 복음은 아무것도 금지할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이 왔음은 아는 증거 중의 하나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예외 없이 다 믿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냐 말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이제야말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기름을 준비할 때이다. 이제야말로 십 년 전, 이십 년 전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받고 영혼을 복원하는 은혜를 받아야 할 때이다.


아무쪼록 이번 11월 3일부터 있는 제직 훈련에 많은 사람이 와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벧엘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복원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함께 합심해서 기도하고 함께 참석해서 함께 은혜를 받읍시다.

심령마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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