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도망간 사람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6~39)


이 말씀에서 도드라지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그리고 약속을 받는 것과 지체하시지 않고 잠깐후면 오시는 주님에 대하여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뒤로 물러 가는 것 그리고 침륜에 빠지는 것과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말들은 다 각기 상관관계에 있는 말들이다. 어느것 하나라도 따로 떼어 놓고는 생각할수 없는 단어들인 것이다.


육십 평생을 살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가져 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들은 참으로 인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에나 생활에나 인격에나 인내가 부족한 것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조금만 참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데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인내하고 기다리면 영적으로 성장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데 인내가 부족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어도 받은 바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히 많이 있다. 그것이 인내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인내를 수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논하지 않고 차치하더라도 단지 사람을 믿는 것도 인내가 없이는 믿을 수 없다. 때로는 자식을 믿는 것은 기다려주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남편을 아이를 부모를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려 줄 때가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전혀 믿을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을수 없는 사람을 기다림으로 인내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인내는 믿음의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곧 인내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내없는 믿음은 믿음으로 성립조차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내가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승리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내는 오래가지 않아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이가 오실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인내로서 기다리는 믿음은 의인이 사는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생활이고 생활이 믿음인 것이 의인이다. 곧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악인이다.

악인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질이 떨어지고 불량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사람을 말한다.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악인이다.

중간상태는 없다. 둘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악인이 되어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인내가 없는 믿음이기 때문이며 그와같은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도 못하고 약속하신 것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와같은 믿음의 인내가 없어서 중도에 탈락하고 배신하고 배교하는 것이다. 가롯유다도 그와같은 믿음 곧 인내하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제자들도 그와같은 믿음이 아니었기에 자기들의 선생님이신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갔다. 다단과 아비람이 인내하는 믿음이 아니었기에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버림을 받았다. 압살롬이 그와같은 믿음이 아니었기에 슬픈 최후를 맞이했다. 아도니야가 인내하는 믿음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이 없어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가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비아달이 이믿음이 없어서 노년에 제사장직에서 쫓겨나서 비참한 황혼을 보냈으며 요압장군이 이믿음이 없어서 마지막 인내를 참지 못하고 모반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다 한가지로 자기들의 욕심과 정욕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약속도 받지 못하고 인내하는 믿음이 없어서 스스로 버림을 받는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이런 믿음은 뒤로 물러가는 믿음이라고 했다. 이런 믿음은 침륜에 빠지는 믿음이라고 했다. 침륜에 빠지는 믿음을 스바냐는 찌끼같이 가라앉는 믿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와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벌을 내리심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2)


시편기자는 악인을 주님이 찌끼같이 버리신다고도 했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시 119:119)


그런이들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는 믿음이요 침륜에 빠진 믿음이다.


그리고 그와같이 뒤로 물러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사람을 기뻐할수 없는 것이라고하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약속하신 생활을 살지 못하고 찌끼와 같이 가라앉아고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진 사람이다.


침륜이라는 말을 '아폴레이아'라는 말로 멸망과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번역본들을 살펴 보면 이 단어를 '파멸', '상실', '황폐', '멸망' 등으로 번역들을 하고 있다. 이는“뒤로 물러가면 파멸이다.”라는 뜻이다.


앞에만 길이 있고 뒤는 절벽이다


성도는 앞에만 길이 있다. 뒤에는 파멸시키는 절벽이요 낭떠러지이다.

뒤로 한발작만 가면 떨어져 버림을 받는 다는 말이 침륜에 빠진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의 믿음은 뒤로 물러가는 믿음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다.


앞에만 길이 있다.

뒤에는 길이 없다.


앞으로 가야 산다

뒤로 가면 죽는다


이것도 둘중이 하나이다.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글나 제자리 걸음을 오래하다보면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뒤로 물러가기가 쉬운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어찌하든지 앞으로 나아가야 나도 믿음으로 살고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남도 구원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가는 믿음은 남은 커녕 자기도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다.


최근에 나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비통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다. 어떤이들이 작당을 하여 교회를 나갔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남편이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이었으며 그들중에 어떤이는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요 어떤이는 가끔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최근만이 아니라 여러해 동안 시험에 들어서 믿음의 인내를 가지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남편을 구원하지 못하였거나 남편을 믿음으로 감화시키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식구들에게 교회를 쉽게 버릴수 있다는 인식을 안겨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낮은 도덕적인 수준에 있는 부류들도 의리를 지키는 것을 귀히 보는데 사람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니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쉽게 버리고 배신할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남편에게 보여주는 것 이상의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다시는 없을 것이며 자라나는 자식들에게도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교회를 저버리는 것이 백만마디의 말이 필요 없는 헹위로 나쁜 본을 본받게 하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나 있는지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그들의 가족들은 생각할 것이다.


"아, 교회도 힘들면 저렇게 버리는 것이구나!"

"엄마가 믿는 예수는 그런거구나!"

"그것은 동네 깡패나 술군들사이에도 있는 의리만도 못한 것이구나!"


그러나 당사자가 받을 영적인 위해(危害)를 생각한다면 그것들은 오히려 덜 중요한 일이다.


장본인들의 영혼을 생각할 때에 “크고 붉은 용”의 낯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일천이백육십일을 양육을 받아야하는 것이 정상적인 교회인데 교회를 버리고 주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사람의 결국이 어떠하며 그심령이 어찌 되겠는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움에 그 영혼이 불쌍하여 잠이 오지를 않는다. 어떤 권사는 세상친구를 끊으라는 말이 못마땅하여 하더니 다른 일로 핑계를 삼아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어떤이는 자기의 믿음이 없는 남편이 떠나자고 하여서 떠난 사람도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경우에서도 알수 있듯이 롯이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롯의 처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다. 그들의 결국을 보면 알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롯이 그의 처의 강권함을 물리칠 믿음의 인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저버리고 잠깐후면 아자비와 함께 받을 약속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 패가망신을 하였던 것이다.


간사출신이라고 하여  협회에서 하는 행사에 모든 회비도 안내고 특권(?)을 누리던 간사출신의 목사가 있었다. 그의 건들거리는 모습이 그렇고 교만한 모습이 그랬다. 말씀도 안보고 기도도 안하고 남에게 받은 컴퓨터로 교회에서 스포츠나 본다고 믿음이 없는 사모에게 질책을 받고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동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앞에서 사모에게 “이런 사람이 목사라고”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모를 이기지 못해서 오전예배때에 강단에서 광고한 것을 사모의 저항을 받아서 말을 바꾸는 등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사역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년 초에 목회자 훈련을 하는데 그런 모습으로 훈련분위기를 한껏 흐리기에 따로 불러서 목숨을 걸고 사모하며 은혜를 받든지 그러지 못할 것이면 집으로 가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더니 의외로 후자를 택하여 짐을 싸들고 인사도 아니하고 도망을 갔다. 그리고 지금껐 아무런 소식도 들을수가 없다.


언젠가 그런생각이 났다.


그사람이야 말로 용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로가도 시원치 않은데 나의 낯을 피하여 도망을 갔으니 어디로 갔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그만이겠는가? 그동안에 용의 낯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가서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구가하고 살은 사람들의 현실이 어떠하겠는가?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친구들의 위로를 구하며 교단의 위로를 받으려고 진리를 떠나기도 하고 세상에서 상식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서 핍박과 고난의 자리를 떠나서 간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용의 낯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주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주의 낯을 보고 살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데 주님의 낯을 피하고 교회의 낯을 피하고 진실하고 가난한 성도들의 낯을 피하여 간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큰 붉은 용의 낯”을 대하면서 세상의 카테고리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잘못 도망한 사람들의 결국이 되는 것이다.

뒤로 물러가면 침륜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도망가야 살수 있는데 뒤로 도망간 것이다.

앞으로 도망가야 식구들도 살릴수 있는데 뒤로 도망간 것이다.


그래도 희미하나마 소망을 가져 보는 것은 어느 한사람이라도 절벽으로 떨어지다가 중간에 걸려서 천신만고 끝이라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올라와서 앞으로 나아가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의 발자국을 다시 디디며 살게 되는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지울수가 없는 것은 왠일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62.163.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