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야할 소경과 소경 되어야 할 자들

강의 : 이유빈 장로(요한복음)
정리 : 고병훈 집사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장 에서도 역시 주님은 같은 맥락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영적인 시력(Spiritual sight)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일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제자들은 이 소경의 소경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 소경이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또 자기 죄 때문인가? 라고 물어보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태어나기 전에 무슨 죄를 짓는다는 말인가? 이정도로 제자들도 주님과 보는 눈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소경이 고침 받음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세상에 나타내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예수)를 보내신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드러난 것이 17절 이하에 소경 되었던 자가 대답하기를 “선지자니이다” 그리고 이후에 주님 앞에서 “내가 믿나이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믿은 사람의 신앙고백,” 결국 이 소경이 다니면서 신앙고백 하는 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을 하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는가? 그리고 신앙고백하는 것을 듣는 이들이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때는 또한 얼마나 영광이 나타나겠는가?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영광이 나타날 수 가 없다. 그래서 그 현장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이 소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이 나타나고 흑암의 권세가 고꾸라지는 것을 주님은 이제 바야흐로 그와 같은 역사가 나타날 것을 보면서 전망하면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사야 35장4절부터 6절까지 말씀을 보면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라고 하셨는데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라는 말은 구원의 날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다.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 소경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다시 얘기해서 이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를 통해서 자기가 메시야인 것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1장4절에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다시 말해서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인자도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돌이켜 지난 일을 전부 생각해보면 그때그때마다 선하신 주님이 좋은 것을 주셨지 나쁜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밀아다.

어느 분이 간증을 들었는데 사업을 잘 하다가 망했는데 자기를 망하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다가 보니 간염에 걸리고 나중에 간경화가 되어서 시골에 가서 요양을 하는데 어느 날 참새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새를 잡아서 새장에 넣고 새와 시간을 보내는데 없던 새가 있었으니 감사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열린 문틈으로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다. 친구처럼 지내던 새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슬프던지...그런데 새가 오랫동안 날아보지 못해서 멀리 날지를 못하는데 잡으려고 쫓아가면 또 날아가고 잡을만하면 또 날아가는데 그러다보니 그 새가 교회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렸을 때 교회 다녔던 생각이 나면서 발이 움직여지지를 않고 거기서 회개가 터지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러다면 이 참새가 날아가 버린 것이 이분에게는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세상에 영적인 시력을 회복시키시고 빛을 비춰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영적인 시력을 회복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낮에도 밤처럼 지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낮에도 밤처럼 지내는 교회가 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을 행하지 않는 교회는 낮에도 밤처럼 지내는 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이 4절과 연관된 말씀들이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 소경은 즉각적인 순종을 했다. 이 사람은 육신적인 소경인데도 즉각적으로 순종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요 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 9: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요 9: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여기서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자기 병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했다.

(요 9: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요 9:13)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요 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주님이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소경도 고치시는 이유는 중에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 없는 안식일, 주님이 없는 안식일에 대한 허구를 깨우치시고 영적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주님을 잃어버린 안식일은 의미가 없는데 이유는 주님 자신이 안식 그 자체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에게로 가는 것이 안식이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기전까지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주님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만드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365일이 안식일이다. 날마다 하루 종일 주님 안에서 쉬는 것이 안식이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의무로 안식일을 지켰다. 다시 말해서 신앙고백으로서의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데 율법적 의무로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이다. 또 이 사람들은 신앙고백보다 율법을 크게 여겼다. 신앙고백보다 율법을 크게 여김으로 인해 주님보다 율법을 크게 여겼으며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율법에 비중을 크게 두었다는 얘기다.

(요 9: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요 9: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 9:17)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종교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를 보면 영적인 사람은 안식일을 누리는 사람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이말을 자세히 보면 영적인 소경들이 이제는 육신의 소경에게 견해를 물어보는 일이 일어났다. 종교적인 소경들이 소경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대답은 ‘선지자니이다’라고 주저 없이 대답을 했다. 이사야서 42장5절에서 7절에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사 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빛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고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이 유대인들이 이 말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어도 주님을 하나님으로 알아 봤을 것인데 알아보지 못했다.

(요 9: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는 것이었다. “땅에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늘” 이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늘의 일을 말하면 너희가 어찌 믿겠느냐?” 영적인 소경은 땅에 일도 믿지 못하고 하늘의 일도 믿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 9: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바리새인들도 이제는 이와 같은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하려고 애를 쓰는데 부모까지 동원하고 종교적인 무언의 압력까지 부모에게 행하면서 자기들에게 유익되는 말을 하게 해서 예수를 부정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요 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 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 9: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유대교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기위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출교하기로 결의했다는 말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신데 예수와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타락한 종교가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요 9:24)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하나님이 누구인가? 예수다. 바리새인들이 소경 되었던 자에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는데 소경되었던 자가 영광을 돌리는데 바리세인들이 원하는 대상에 맞추어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 돌리는 것을 30절부터 33절까지 에서 보게 된다.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욕심 때문에 주님에게서 나타난 능력자체와 사실 자체까지도 부인하려고 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모습까지 보게 된다.

(요 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 말은 그분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당신들은 말 가지고 하지만 그분은 능력가지고 하시는 분이다. 라고 하는 말이다.

(요 9: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들은 스스로 자처하기를 모세의 제자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상 그들은 모세의 제자도 아님이 분명한 것이 요한복음 5장 46절 47절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리세인들이 말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하자 소경되었던 사람이 그에 대해서 말을 한다.

(요 9: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는 말속에는 당신들은 전문가들인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 다는 말이냐? 라고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여기에서는 바리새인들도 아멘을 했을 것이다. 이유는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말끝에는 아멘을 못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대적해야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드러나게 되면 자기들의 종교적인 입지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인 동의는 하면서도 진짜 육신을 입고오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분이라는 것에 해서는 그들이 동의를 하지 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락한 교회는 원칙적인 동의, 즉 말씀대로 설교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살지를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의 위치와 입지와 종교적인 기득권을 사랑했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 9: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9: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소경 되었던 사람은 여기서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생도 얻었다. 36절에 그가 누구시오니까 38절 마지막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을 했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가려내려 오셨다는 예기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를 가려내려 오셨다는 말이다. ‘보지 못하는 자’를 30절에 ‘이상하다’를 연결해서 보면 왜 이상한지를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인 이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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