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오늘의 교회

얼마전에 지방에서 집회를 할 때의 일이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다. 그다음주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하였는데 "흰돌산 기도원에 가면 뭐합니까? 울고 불고 회개하고 2,3일이면 받은 은혜 다 쏟아 버리는데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주님하고 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순간에 교회안에 물을 끼얹은듯한 정적이 돌았다. 그대까지 아멘을 하던 목사님은 아멘을 더 이상 하지 못하였다. 같이 전도를 하는 집사님은 뒷골이 땡기는 긴장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주간에 설날에 흰돌산 기도원을 교회적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광고까지도 여러번 해놓은 터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그장로님은 평생에 남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나 듣기에 거스리는 말을 한마디도 안하고 살았던 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 충격이 컸다. 기도는 계속 되었다.
아버지학교에 갔다 온들 그때 잠깐 뿐이고 변화받지 못하고 옛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방언 받고 은사체험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하고 살지를 못하는데요. 전도를 열심히 한들 내가 주님하고 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하고 살지 않으면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계속 기도는 이어졌다. 교인들이 점차로 장로님의 기도에 은혜를 받기 시작을 하였다. 숨을 죽인 가운데서 탄식에 가까운 아멘이 간간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누가 결정을 하였는지 그기도원에 가는 것을 교회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운 시골의 작은 기도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 주일부터 그목사님의 설교가 '회개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살아야 합니다' 와같은 말씀들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다 오늘의 교회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회들이 거꾸로 된 믿음을 가르친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행위주의를 가르친다. 은혜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범사에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다. 범사를 행하여야 할것으로 가르친다. "예배에 빠짐없이 나와라" "목사님에게 잘해라"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일성수를 해라" "헌금을 해라" "전도해라" "봉사해라" "교회일을 해라" "사랑해야 한다" 심지어 어떤 잘못된 이들은 "일년에 교회에 500번나오기 운동을 하자" 등등 행위를 강조하고 요구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시달릴 때로 시달리고 사람에게 시달리고 마귀에게 시달린채 교회에 나와서는 또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는 일들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잘하는 사람들을 내세우며 은근히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교인들에게 무서운 부담으로 닥쳐 온다. 언젠가 택시기사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이 난다. "제 친구중에 교인들이 있는데요 너무나 불쌍합니다. 일요일날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 가야지요 십일조를 내고요 건축헌금도 내고 그것도 융자해서 내고는 원금이자 갚느라고 쓸 것도 쓰지 못하고 맨 날 돈걱정을 하면서 불쌍하게 삽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말이 영적인 말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사람에게 육신적인 지치고 힘든 모습을 보여준 교인들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 무색해질 정도로 교회안에서 무거운 짐들을 지워주고 있다.

왜그런가? 예배도 기도도 주일성수도 헌금을 하는 것이나 봉사나 전도를 그리고 성도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성경은 의무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대로 기쁨으로 하는 축복이지 의무의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강단에서 그와같은 것들을 의무로 가르치기 시작을 했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왜 그런일이 일어 났는가?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우리가 구한다고 받는 것도 아니요 받고싶다고 받는 것도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교인들의 행위가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닌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강단에서 인위적으로 행위를 강조하고 요구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는 근본이유를 잊어버린채 우선 손쉬운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교인들을 움직여 볼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한국교회에 은혜를 주시지 않는가? 거룩함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왜 거룩함을 상실하였는가 십자가를 상실하고 구속의 은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구속의 은총을 상실하였는가? 날마다 정결케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떠났기 때문이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무시하고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님이신데 그깨끗케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더러움과 죄를 고집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함으로 주님께 가가이 간 사람에게는 주님께로부터 날마다 사랑하는 은혜를 받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명령의 말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날마다 사랑할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기다리고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일성수하라는 말은 헛된 말이 될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감사예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건축헌금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헌금강요라는 것이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는 교만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주께 받은바 은혜가 감사해서 교회의 형편과 필요를 돌아보고 봉사를 하는 사람과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잃어버린 영혼들 곧 이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영혼 사랑으로 전도를 하는 이에게는 봉사해라 전도해라는 말이 우스꽝스러운 말처럼 들리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은혜를 받지 못한 교인들이 쉼게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예배에 참석을 하지 못하고 범사에 열심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가 된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같은 행위를 끌어내기 위해 행위로 말미암는 복을 가르치는 어이없는 일들이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에 편만해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의 시작이었다. "헌금을 하면 복을 받는다" "건축헌금을 하여 복을 받자" "많이 바치면 많은 복을 받는다" "자녀들이 복을 받기 위해 자녀들의 이름으로도 헌금을 해라, 식구수대로 헌금봉투를 마련해라" "전도하면 복을 받는다" "선교하면 복받는다" "교사하고 성가대하고 교회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봉사를 많이 해서 복을 받을 겁니다" "기도를 많이하는 권사님이래서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등등 잘못된 축복을 말하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행위대로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 복을 주신다.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또 복을 받았기 때문에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해 그와같은 것들을 행한다면 자기의 소욕을 채우고 욕심대로 구하는 이방종교나 귀신을 섬기는 무당이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이들은 그것이 잘안될 때에는 그것을 행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거기에서 지나쳐 성경을 억지로 잘못 풀어서 지옥간다는 말을 강단에서 거침없이 함으로 많은 교인들을 두려움가운데에 빠뜨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인들에게 협박을 하고 공갈을 일삼는 일들을 하고 있다.

이는 마귀의 궤휼이다.
이는 성경진리를 거스리는 것이요 거꾸로 가는 것이다.

내가 할수 없는 것을 주님이 해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범사를 내가 해야한다면 은혜가 필요할 리가 없고 주님의 십자가도 소용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도말하는 것이요 교인들로 교회로 십자가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요 거꾸로가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의 행위만 남아 있는 교회가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예배의 행위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도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도를 하고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를 많이하는 사람이 영광과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기도는 나의 무능함을 주님께 아뢰는 것인데 그렇다면 기도를 많이할수록 하나님앞에 무능함이 많은 사람인데 어찌 칭찬을 받는 자리에 들어갈수가 있는가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봉사도 성령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곧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하시는 은혜로 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알게하는 봉사를 하라고 했는데 행위로서의 봉사를 하니 칭찬을 해주어야 하고 칭찬을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기까지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오늘의 교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 교인들의 종교적인 열심에 야합하여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는 거짓말쟁이들은 또 어떠한가? 헌금을 하는 것도 행위로 전락이 되어버린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자연스럽게 교회안에 자리를 잡고 헌금을 많이하느냐 적게하느냐가 믿음의 척도로 떠오를 정도로 타락한 교회가 된 것이 오늘날 모두가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교회를 크게하는 것도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기때문이라기 보다는 큰돈을 만질수 있는 목회자가 성공한 목회자라는 사상이 팽배하게 들어섰기 때문인 것이다. 외형으로 건축을 크게 잘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교단에서도 대접을 받는 길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이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교단에서 감투나쓰고 교회들을 그리고 동료목회자들을 좌지우지하는 어찌보면 세상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쥐꼬리만한 더러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져서 너도나도 총회장이 되겠다고 감독이 되겠다고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이 아니라 주님과 거꾸로가는 넓은길로 앞다투어 가고 있어 주님과 원수되는 길로 달음박질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니 누가 이와같은 유혹을 물리치고 골방에서 하루에도 여러시간씩 주님과 만나는 경건생활을 하겠는가? 목사가 될 수록 말씀을 볼 시간도 기도할 시간도 없어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말이 아닌가? 교회가 커지면 건축과 운영에 힘을 쓰고 마음을 쓰는 것만큼 한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는 마음을 찾아볼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교인들의 행위를 충동질하여 교인수가 많아지고 교회가 커지고 재정이 풍부해 졌으니 그 공을 하나님께 돌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 "훌륭한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부흥시켰으니 교회를 마음대로 요리하시도록 맡겨드렸다"는 방송에 나온 어떤 어리석은 장로의 말은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사람의 노력과 열심으로 이루었으니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 과실을 취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들과 같이 그소출을 요구하는 종들을 때리고 핍박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죽인 자리에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소유의식, 교권주의로 말미암은 기득권을 가지고 많은 의인들을 괴롭히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니 자기자식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자 하는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많은 영혼들을 상하게 하고 어린 영혼들을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그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깊은바다에 빠뜨리우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 세상에서나 방송에서 '교회세습'이니 하는 말을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김일성부자세습에서 그말이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사랄에게 마음대로 세습을 한다는 말인가? 그런말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런말이 나오게 된 것도 앞서말한 교회가 사람중심의 교회로 전락한 것을 보는 세상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내용과 책임에 있어서는 교회가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과 정욕으로부터 자기자녀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것은 세습이라 말할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은 세습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뿐이다.

아무튼 이와같이 율법주의가 앞서 말한 순서대로 오늘날의 교회를 망가뜨려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 없음을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에 연단이 된 어떤 유대인들로 인하여 갈라디아니즘이 판을 치고 있었던 초대교회와같이 오늘날에도 교회안에 율법주의가 창궐하고 있다. 갈라디아니즘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그후의 생활은 율법을 지켜야 그구원을 보존해갈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흠없이 점없이 보존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도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를 씻으시는 보혈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서신서마다 율법주의를 경계한 것은 율법주의 곧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반대로 십자가의 은혜의 필요성을 교인들에게서 지워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우리가 행위로 할수 있는 것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겠는가? 내육체의 행위로 할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내가 할수 있는데 열심히 하면 되는데 믿음은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역사도 필요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필요 없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할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여약함을 깨닫게 하고 범사를 행할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율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구할것이 없는 죄인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로는 철저한 실패밖에 한 것이 없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 율법이며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없이는 도와주심이 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율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인들이 불쌍한 것은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너무나 잘알고 육신으로 실패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와 은혜를 받고 겨우 구원을 얻었는데 율법의 행위를 강요받으며 그것을 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공갈하고 협박하는 일을 일삼는 가운데 온갖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종교생활을 하며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어느 누구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혹 천사라할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준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요 그가하는 말은 마귀의 말이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우리의 육체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 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죄인됨을 율법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그다음단게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앞에 인도되어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피로써 죄사함을 받고 씻김을 받게 하는 것이 율법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요 가짜요 속이는 말이다. 왜 오늘날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는가? 율법을 말하기 보다는 행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때에 순종할수 있는 은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저 갚없이 주시는 것이다. 당신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인가 행위가 필요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목이 말라 은밀한 골방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는가? 아니면 오늘도 사람들앞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보아주는 행위에 목이 마른 사람인가? 어느반열에 서있는가?

어떤 여집사가 전도자에게 상담을 하는중에 "나는 이혼을 할 겁니다. 어린 딸이 불쌍해서 15년동안 이혼을 못했는데 더 이상 남편과 살수가 없습니다. 밤마다 욕을 하고 행패를 부립니다." 전도자가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요 교회생활도 잘하고요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주님이 짝지어주신 남편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에수를 믿는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여인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한참을 울고나서 말을 했다. "저 오늘 저녁에 제가 제남편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니요 사랑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예요 제가 오늘 저녁은 꼭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고 사랑하겠습니다." "아니요 당신은 절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전도자의 단호함과 확신에 찬 말에 그여집사는 주눅이 들려서 물었다. "왜요?" 전도자가 말을 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할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저에게 남편을 사랑할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여집사는 전도자와 함께 간절히 주님의 마음과 살을 달라고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것일 이길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저는 못해요 제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주님 흉폭한 제남편을 보고도 사랑할수 있는 은혜를 주세요"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항상 그렇듯이 5층 집을 향하여 올라오는 남편은 3층부터 아내의 욕을 큰소리로 하면서 올라오기 시작을 하였다. 여집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 졌다. 아파트 문을 열어주자 아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큰소리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 다라 그남편의 모습이 그리도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을 했다. 주님의 역사가 일어 난 것이다. 주님이 이자매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남편을 안고 거실로 인도하여 양말을 벗기고 발을 씻겨주고 부드러운 말로 사랑을 고백했다. 남편이 어리둥절하여 내심 당황을 하는 눈빛이었다. 그날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지나갔다. 남편이 일시적인 것이겠지하며 그아내의 진정성을 의심하였지만 그래서 날마다 더 흉하게 대했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아내를 보고 3개월만에 마음이 녹아져서 교회에 나와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강력계 형사였는데 지금은 아주 어려운 일 곧 흉악범을 체포하러 갈 때는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고는 나가곤 한다고 한다. 이와같이 가정이 회복 되었다. 이전에도 15년동안 남편을 사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만 남편을 사랑하려 하였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는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만을 거듭한 것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행위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기보다는 먼저 우리마음에 그행위를 하고싶은 소원을 주시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고 전도를 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고 헌금을 하고 싶은 소원을 먼저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이시지 소원도 주시지 않고 행위만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교인들에게 뜬금없이 행위를 요구하는 이들은 주님의 일꾼이 아님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궤휼의 역군이요 속이는자요 자기들도 은헤를 받지 못해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애꿋은 교인들을 율법의 행위로 못살게 구는 것이다.  

지금부터 100여년전에 영국의 스코틀란드에서 어느 자매가 부흥회에 참석을 하여 자기의 영혼의 상태가 너무나 참담하여 괴롭고 고뇌스러운 표정으로 말씀을 들었다. 말씀을 다 듣고도 은혜를 받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가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나도 은혜를 받고 싶은데 잘 안되요 어덯게 하면 좋아요?" 그때 그목사님이 말하기를 "자매여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성경을 일고 기도하세요."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불행히도 그자매는 글을 읽을줄을 모르는 불쌍한 자매였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목사님 나는 읽지도 못하고 기도도 못해요. 오 주님 나있는 이모습대로 받아주시면 안돼나요" 그리고 그녀는 주님을 만났다. 나중에 어떤 여인이 그녀의 간증을 듣고 찬송을 작사하였는데 그찬송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349장 찬송이다. "내모습 이대로 주받으옵소서 날위해 돌아가신주 날 받으옵소서....."
1절에보면 예수 나의 주여 내가 부르짖나이다 나를 도와주시지 아나히시면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내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고 거저주시는 주님의 구원을 내게 허락하시옵소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그렇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은혜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모두 율법의 굴레를 십자가로 벗을 때가 왔다. 더 이상 사람의 말이나 속임수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십자가로 돌아가자. 사람에게 실망당하고 타락한 교회에게 실망을 당하고 율법의 행위에 실망을 당한 나자신에게 스스로 실망을 당한 우리들을 주님이 지금 부르고 계시지 아니한가?

지금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은혜를 주실 때이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55.185.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