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오면 석가모니를 알 수있다.

알다시피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이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어 왔다.
어떤 이들은 신심을 돋우기 위해서 그 옛날에 도보로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네팔의 룸비니에도 다녀 왔다.
어떤이들은 가다가 돌아온 사람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네팔에 그렇게도 어렵게 온 사람들이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석가모니를 얼마나 알겠는가?
지금도 불교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석가모니를 얼마나 알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명승이라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사람들로부터 불교에 일생을 바친 중들이나 또는 중임을 자처하는 가짜중들까지도 석가모니를 얼마나 알겠는가하는 의문을 지울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에 시계 건전지가 다하여서 건전지를 사려고 시계방에 들른 적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보살몸빼를 입은 60쯤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건전지를 교체하는 시간에 짬을 내어서 젊잖게 물어 보았다.
“저 득도(得道) 하셨습니까?”
이내 부끄러운 얼굴을 하면서 대답을 한다.
“득도는요 무슨? 그냥 따라다니는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저는 득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물었다.
“예? 득도를 하셨다구요?”
내가 천천히 대답을 했다.
“예 저는 득도를 하였습니다. 다름아닌 예수가 바로 도(道)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득도를 하는 것이지요”
그여자의 얼굴이 금방에 흙빛으로 변해서 멀로다할수 없는 험악한 욕을 다쏟아 부었다.
“예수를 믿는 것들은....”
“아주머니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불교는 종교로서는 좋은 종교지만 구원받을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받아 구원을 받으십시오”
끝까지 복음을 다 전하고 시계방을 나왔다.
그리고 불교를 남달리 극성스럽게 믿는 다는 사람이 험악한 욕을 하는 것을 못내 마음 아파한 적이 있었다.

이와같이 평생에 도를 구하고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오늘날도 전세계의 절에서 골짜기 암자마다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고와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법정스님인가하는 분은 죽으면서 자기는 지옥간다고 장담을 하고 얼마전에 죽은 명승은 자기의 말의 업보를 저승까지 가지고 가기 싫다하여 자기가 쓴 책을 다 없애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왜 업보인가? 왜 그책을 없애달라고 했는가? 자기것이 아닌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말을 한것이라는 뜻이다. 나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나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거짓말이요 실상은 그것이 탐관오리나 사이비종교의 혹세무민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무서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앞에 진실해지는 순간에 자기가 한말이나 슨 글들이 자기의 것이 아닌 거짓말인 것을 알고 자기가 한말이나 쓴 글을 없애고 싶었을 것이다.

몇 년전에 네팔에 왔을 때의 일이다.
집회일정을 다 소화하고 마지막날 저녁에 침대에 누웠다.
네팔 사람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본 사원들과 그안에서 종교행의를 하는 이들의 모습과 길거리에서 슬픈 표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군상들과 거기에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소들과 개들 불쌍한 짐승들의 모습들이 눈앞에 지나갔다. 그리고 동역하는 목사님들과 만난 사람들이 네팔에 관해 들려준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다시 생각이 났다. 너무나 헛되고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나라의 인생들의 불쌍한 모습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신 것이 있었다.
“얘 석가모니가 왜 가출을 해서 도를 닦았는 지 그이유를 아니?”
라고 물으시면서 주님은 나에게 왜 이땅이 아직도 이렇게 어둠가운데 살고 있는지와 석가모니의 사건을 연결해서 알게 해주셨다.

석가모니는 네팔의 시골의 룸비니라는 곳은 작은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네팔사람들은 지금도 일년에 이백육십일 이상을 제사를 드린다.  
일년에 절반이상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신도 다양하여 어떤이는 일억도 넘는 수의 신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팔백만의 우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본인들가운데 그와같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네팔을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우상에게 절을 하고 비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요 그것은 개인적인 욕심과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왕자이기에 모든 제사의식에 참여를 했던 싯달타는 범인과 같은 사람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종교의식을 행하고 소원을 아뢰고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더러운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도 더러운 일인데 소위 신이라고 모신다면서 그 신을 향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종교를 만들고 신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왕자로 있는한 또 왕이 되어서 그와같은 더러운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제사를 년중으로 드려야한다는 것에 욕지기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날 집을 나가 도를 깨닫기 원하여 묵상을 하던중에 보리수나무밑에서 깨달은 진리가 인간의 행복은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와같은 더러운 욕심과 정욕이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하고 가정을 병들게하며 인간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온다고 진리를 깨닫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마음을 비운다는 말도 나온 것이다. “무심(無心)”이라는 말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우리는 싯달타라는 한청년의 깨달음이 참으로 귀한 것이고 정욕을 쫒아서 세상풍속에 떠내려가는 삶을 사는 인생들중에 그와같은 사람을 찾을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은 진리에 가까운 것이지 진리는 아닌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진리의 부분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인간의 상태를 알게하는 진리는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문제인 정욕을 이기는 진리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의 문제적인 측면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해답이 되는 진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힘으로 욕심과 정욕을 이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억제할수 있고 이길수도 있지만 항상 이길수는 없는 것이고 영원히 이길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불교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우는 것은 인간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해도 안되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중들은 산으로 들어가서 정욕과 욕심으로 사는 속세와 단절을 하고 금욕생활을 함으로 도의 경지에 이르려고하지만 그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이룰수도 없다. 그이유는 속세에 한발짝만 들이면 보고 듣는 것을 인하여 욕심과 정욕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리고 죄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 57: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그래서 불교는 자신의 수양의 힘으로 욕심을 없애려고 하고 정욕을 지우려고 애쓰는 종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욕심을 이길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나 노력으로 자기의 욕심을 이길수도 없고 없앨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음이 참으로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성도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이 우리의 정욕을 다스려 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내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로 나의 정욕과 욕심이 다스려 지는 것 그래서 욕심은 일어나지만 그욕심을 이기고 조절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그것이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네팔에 와서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소가 지나가는데 이나라 사람들은 소가 신성한 신이기 때문에 소가 지나 간 다음에 사람도 지나가고 차도 지나간다. 어떻게 보면 이나라는 소뜻대로 움직이는 나라같은 생각이 든다.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이 자기들을 힘들게하고 어렵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 이나라사람들의 정욕으로부터 만들어진 신인 것이다.
자기들이 만들은 신에게 매여 사는 것이 이방신을 섬기는 불쌍한 인간의 모습이다.

세상신은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존재하신다. 곧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죄를 이기도록 도와주시고 욕심과 정욕을 이기고 살도록 도와주심으로 욕심과 정욕에 매여 살지 않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인간은 영적으로 죽고 육체만 남았을 때에 인간이 영을 버리고 육을 택한 그육체의 정욕에 끌려사는 죄의 종노릇을 하는 생활이 시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극복할수 없는 저주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하는 데 어둠이 눈을 멀게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찾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면한 저주만을 해결하고자하는 급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것이 수많은 우상들의 출현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리고 그신을 빙자해서 자기를 얽매는 규율들을 만들어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남의 몸을 괴롭게 하지만 그만큼 죄를 이기고 정욕을 이기는 인격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이세상 죄인들의 비극이요 슬픔인 것이다.

그러한 죄인들에게 가장 급한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잃어버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절대로 돌아올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아들을 보내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온인류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어버렸던 생명을 찾아 주셨는데 그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그생명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 성령이다.
오직 성령으로만 우리안의 날마다 순간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욕과 욕심을 이기고 다스릴수 있다.
성령으로만 몸의 행실인 정욕을 이길수 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와같이 비교종교론적으로 복음을 풀어가면서 말씀을 전했을 때에 네팔의 목회자들 70여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약간은 경이로운 얼굴을 하면서 말씀을 들었다. 시간마다 전하여진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의 말씀과 하나님앞에 죄를 자백하는 강력한 회개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들은 수많은 세미나를 참석을 했지만 그많은 것들을 다 통털어도 이와같은 말씀을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 마음속의 것을 체면 때문에 절대로 내놓지 않던 네팔사람들이 박은영사모님의 간증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마음속으로부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간음죄도 간음죄지만 여자들이 무시받는 문화에서 아내를 때리고 욕한 죄들이 자백이 되어지고 남편을 미워한죄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한 죄들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죄를 자백함으로 받는 속죄함의 기쁨을 경험한 이들은 이와같은 진리가 있는 것조차도 몰랐다고 하면서 집에 돌아가서 반드시 죄를 자백하겠다고 교회에 돌아가면 반드시 회중앞에 죄를 자백하겠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죄를 품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와 다스림가운데 들어갈수 없으며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은 역사로 금년에도 풍성한 은혜를 네팔교회의 참으로 영적으로 불쌍한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린다.  
(*.90.22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