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를 시작함에 부쳐


“처음에는 무엇인가 굉장한 것이 나올것처럼 말을 해서 기대를 하고 들었는데 나중에는 흐지부지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서 허탈감마저 들었습니다”


어느 종말론과 계시록을 잘가르친다는 강사의 요한계시록 세미나를 참석한 어느 목사님의 증언이다. 이말을 들으면서 웬지 옛날의 약장사들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년들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다니엘서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하는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계시록과 다니엘서에 관한 책들과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오늘날 종말론적인 예언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편협된 결함을 어느정도 감지할수 있었다.


우선은 하나같이 교회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는데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지식의 선점적인 우위를 가지고 교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움, 짐승의 표에 대한 두려움과 마지막 환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교회를 몰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권면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1,2)


그런데 오늘날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이단들의 그것과 같이 교인들에게 두려움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것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지 교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이유는 성경의 지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아버지의 뜻과 그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행위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다시오시는 그날은 교회에게는 천국의 혼인잔칫날이다.

그날은 교회에는 더없이 기쁜 날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오셔서 모든 원수를 발등상아래에 굴복시키고 모든 이론을 파하고 대적하는 것들을 파하는 승리의 날인 것이다. 어린양의 신부된 교회가 신랑되신 예수를 만나는 날인 것이다.


만일 어느 신부가 결혼식을 앞두고 그날을 두려워하고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연기되었으면 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신랑을 극히 두려워하는 공포심에서 맞이하거나 두려워 벌벌떠는 모습으로 혼레식을 치루는 신부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마음이 두렵거나 흔들리거나 걱적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은 다 마귀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어두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은종말론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가 세속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가 밝은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볼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전도하지 않는 교회가 열매가 없는 교회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는 교회가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수 있겠는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말한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한 것과 같은 교회의 형편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을 밝은 모습으로 만나볼수 있겠는가?


오늘날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하고 마지막때에 일어날 일들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와같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신부의 모습을 상실한 교회의 형편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봉함된 말씀이다.

아무에게나 알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봉함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온다.

그중에 말씀에 관하여는 이사야가 한번 다니엘에 두 번 곧 합해서 세 번 나오고 죄를 봉함한다는 말은 호세아서에 한번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봉함된 말씀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말한 봉함된 말씀은 주의 제자들에게 봉함하라는 명령이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사 8:16)


그러나 다니엘에게게 봉함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말씀을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령하신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그리고 다니엘은 이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다. 그깨닫지 못한 말씀을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 12:8,9)


먼저 주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봉함하라는 이사야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제자들에게나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이와같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외인들에게는 비밀로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막 4:10-12)


주의 제자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주의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주의 제자는 주님을 따르면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나라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이땅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와 외인의 차이가 무엇인가?


제자는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과 함께 사는 천국생활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인은 주님을 따르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당시에도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과만 있을 때에 그비유를 풀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게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진자들은 망하게 된자들이라고 성경은말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게 하는 영생을 얻는 것이며 복음에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 복음이다. 외인은 이와같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는 어두움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주님을 따르지만 외인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를 다니지만 외인들이있다. 하나님이 말씀의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사람이 목사라해도 장로라고 해도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바보가 아니다. 교회안의 직분이나 일이나 그런 것으로 주님의 제자를 구분하시는 주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날에도 자기들이 한 일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아오는 거짓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또 해야할 일을 아니하고 주의 일을 태만히 한자들에게도 동일한 저주를 말씀하셨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1-46)


이와같이 외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신 적이 없고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울수는 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날마다 주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비밀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주의 제자이며 주님은 그런제자들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서의 말씀을 풍성히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제들중에 봉함된 말씀이다.

 


그러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봉함된 말씀은 무엇인가?

이말씀은 다니엘도 깨닫지 못했다.

다니엘과 같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에게도 깨달음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은 이말씀을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때와 기한에 관심이 많이 있다.

그것을 주님의 때를 잘 기다리기 위함이라고 선의로 해석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때와 기한을 호기심으로 알고자 한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건전해도 가르침을 받는 이들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속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주님도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대한 지식을 주시지 않고 그들의 호기심을 봉쇄하신 것이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주님이 말씀하신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는 말씀이 다니엘서 12장의 이말씀을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말씀은 제자들에게도 봉하여진 말씀이다.

아버지의 권한에 두신 말씀이다.

 

주의 제자들은 주님이 언제와도 상관이 없다. 항상 깨어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날과 시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항상 오늘이라도 주님을 만날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가 아닌 외인들은 때와 기한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주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정욕대로 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이 말한 때와 요한이 그의 계시록에서 말씀하신 때를 알고자 한다.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의 때를 알기 위해 그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주님은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도 외인들에게는 알려주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때와 기한은 제자들에게도 봉함이 된 말씀이다.

이것을 알려고하는 것이 교만이요 날수를 계산하는 것이 악한 일이다.

지금이 어느때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허락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아는 것이다.

주님은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일곱교회에 보내시는 편지를 통해 날과 시를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형편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260일이라든지 1290일이나 1335일이라는 수는 봉함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니엘서에도 일수를 년수로 헤아릴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에레미야의 예언에 칠십년은 상징수가 아닌 실수인 것이다. 이와같이 예언서에는 상징수와 실수를 번갈아가면서 쓰셨다. 상징수와 실수를 번갈아 쓰신 이유는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기 때문에 인간이 숫자로는 하나님의 때를 헤아릴수 없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말씀하신 세대로서 분별할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우리는 교회의 현실을 분별할줄 알아야 한다.

나 개인의 영적인 상태를 분변할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느시대를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주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는지 아니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에 나왔는데 아직 아니 나타난 것처럼 교회를 착각가운데 빠뜨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지금 우리는 첫 번째 짐승의 시대를 넘어 두 번째 짐승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마귀는 첫 번째 짐승과 두 번째 짐승의 정체를 철저히 가리우고 있다.

그것은 신학자들에게나 주석가들에게도 가리워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리워진 사실이다. 

 

그것도 짐승의 정체가 요한 계시록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에 의해 가리우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것을 말하면서 교인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있다. 짐승의 표를 가지고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그짐승의 표를 누가 받느냐가 중요한데 그표를 받는 행위에 치중함으로 교회를 미혹하게 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얼토당토 않은 것은 어떤이들은 교인들에게 마지막 환란을 강조하면서 비상식량과 은신처를 준비하라고 하여 어떤이들은 누룽지를 준비하고 어떤이는 집에다가 지하실을 파는 어리석은 촌극을 벌리기도 한다. 그들에게 속아서 누룽지를 준비한 어느 목사에게 “그건 육신을 준비하는 것이잖아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했더니 단번에 잘못된 것을 깨달은 적도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수법이 아니다. 마귀의 오래된 수법인데 오래전에 미국의 몰몬교가 교회안의 가짜들 곧 종교인들을 미혹할 때에 그와같은 방법을 쓴것은 조금만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다 알법한 일이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에 대한 숟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들 그리고 신학적인 오류들이 나온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들, 하나님의 나라를 살지 못하는 이들,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알게하시지 않는다. 그들이 혹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하나님이 두려워하시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다니엘서와 요한 게시록의 문헌들을 수집을 하고 연구하면서 한국의 신학이 미국도 그렇지만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주님의 제자의 관점을 상실했기 때문에 극히 미미하고 적은 부분이지만 중요하고도 영적인 연구들을 무시하고 편협하고 경솔하게 치우친 자료만을 가지고 공부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학적인 관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씀을 알면서도 세대를 분변하지 못하는 지식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도 강단에서 깨닫고 순종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들은 말씀 배운 말씀 읽은 말씀만을 가지고 전하며 교인들의 영혼의 양식은 주지 못하고 혼적인 만족과 위로만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인들에게는 봉함되었으나 주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는 주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헤치려는 교만과 어리석음가운데 빠지지 말고 이세대를 분변하고 자기의 영혼을 살피고 일용할 양식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듣고 받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몸된 교회 신부된 교회에 명하신 말씀대로 성령의 권능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하는 지식의 욕구를 가지는 것도 교만이요

가르치려는 것도 교만이다.

내가 무슨 말씀을 안다고 자부하는 것도 실상은 무식한 것이요 교만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한말씀도 깨달을수가 없다.

그래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각사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개인적인 은혜가 임하고 그것을 순종하는 개인적인 은혜가 임하여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은혜를 받아 교회가 변하고 이나라가 변하여 주님이 다시오시는 영광스러운 때를 기다리는 이나라의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