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는 커녕 불신자들의 손가락질과 비방이 난무할 될 정도로 도덕적으로 아주 낮은 수준에 있다.

하나님의 눈을 만족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눈에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도 불합리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지 못한 것들로 가득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전에 교회안에 있던 진실한 사람들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 주님을 닮고 경건한 인격으로 살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되고 오늘날 그와같은 성도들의 모습을 하나라도 찾을 수 없는 교회가 이땅에 부지기수로 많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시 12:1)

 

교회를 보면서 이와같은 시편기자의 탄식을 하던이들 조차도 이제는 교회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고 말았다. 경건한자들이 끊어진지가 오래고 충실하고 신실하던자들이 없어진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십년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안양의 어느 목사님이 훈련을 받았는데 그훈련을 받기전에는 날마다 목회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한다. 전도사출신인 사모님은 교회를 개척하고 일년도 안되어 일백명이상모이는 그야 말로 통속적인 수준에서 하는 말인 목회가 성공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그와같은 말을 하는 것을 참지 못해서 어느날 별르고 별러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때에 그목사님이 사모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교인 일백명중에 주님께 헌신된 사람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말해보시오. 한사람도 없잖아요? 이게 목회입니까? 목회가 아니지요. 나는 주님앞에 양심상 이런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

 

사모님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전도훈련을 받고 교인들이 훈련을 받고 와서 무서운 죄들이 쏟아져 나왔다. 죄를 자백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목사님은 목회를 그만두려고 했던 마음을 접고 다시 목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들은바가 없어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교회 현실에 이와같은 일은 “아 그런 일도 있구나. 그런 목사도 있고”라는 식의 하나의 해프닝정도로 사람들에게 가볍게 흘려 들을정도의 말밖에는 아니될 것이다. 그와같이 한국교회에는 짙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다. 교회를 하고 목회를 하는데에 있어서 세상가치관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단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교인수를 세고 비교하는 일은 어쩌면 이제는 애교있는 정도의 일밖에는 안된다. 강단에서 성령하나님께 받지도 않은 말씀을 전하고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 일은 그래도 잘해볼려고 했던 추억이라면 이제는 강단에서 탐욕과 정욕에 속한 세상의 말들을 하고 심지어는 희롱의 말이나 누추한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교인들은 교인이 많이 모이면 무엇인가 있는 곳이라며 아무 생각도 없이 규모가 교회를 다니며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 생각하시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주님을 따르고 본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자는대로 하면서 정기적인 예배와 종교적인 모임과 활동에 참석하는데에 힘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인격은 아니 변하고 생활도 변화되지 못하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를 다니지 조차도 않는 이들보다 낮은 도덕적인 수준을 가지고 살면서도 뻔뻔한 모습으로 살고 어떤이들은 교회와 가정, 교회와 직장 곧 교회와 세상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잘 감추고 외식함으로 이중적인 생활에 성공함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교회에서는 가정에서의 죄와 불의를 감추고 행동한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을 감춤으로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자 한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행실을 세상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인격이 형성조차도 되지 않는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목사님 인격이 없는거 잘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교인들과 제직들을 만나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도 주님을 닮은 인격이 아니면서도 신학을 하고 교단적이고 종교적인 조건만 갖추고 설교를 잘하면 목회를 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지가 오래 되었다. 물론 그들중에는 인격적인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리고 그들중에는 세상사람들의 기준으로 볼때에도 인격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한 그들중에는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수는 지극히 적은 수이며 성경을 평생에 단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야말로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아픔의 현실이다.

 

주님이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겠다는 사람들에게 “너희중에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렇다고 그들을 목사가 아니다 목회를 그만두라고 할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목사들이 그렇다면 교인들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내가 다녔던 교회도 눈이 먼 교회요 흑암의 교회이었던 것이 중등부 회장을 하고 고등부 회장을 하고 청년부회장을 할 때까지 내영혼이 죽은 사실에 깨어 있는 사람이 교회안에 아무도 없었다. 목사부터 주일학교 교사까지 영혼에 눈이 멀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부터 50여년전의 일이라면 그때보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할수 없이 타락한 지금의 교회 현실은 어떠하겠는가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문자그대로 암흑기를 맞고 있다.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크게 하고 교인들을 눌리고자 하는 방법으로 복음전도를 천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이것은 중대 범죄이다.

머리되신 주님의 뜻때로가 아니라 “내마음대로 목회를 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의 프로그램들은 영혼을 살리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청년들에게 오락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전락이 되었다.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것도 그들에게 커피를 주고 사소한 선물꺼리를 줌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하는 아주 불쌍한 전도를 하며 주님의 복음을 이쑤이개나 휴지나 사탕이나 강냉이 같은 싸구려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리고 서로 교인들을 빼앗아 오는 쟁탈전을 벌이다가 이제는 신천지같은 악한 이단들에게 교인들을 뭉텅이로 빼앗기는 일을 당하면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교인들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통째로 빼앗기는 일을 당하면서도 아픔이 없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목사가 되어서도 여호와증인을 이기지 못하더니 이제는 신천지의 거짓말을 이길수 없는 목사들도 많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실 이와같은 일은 어제오늘에 일어난 일이아니다. 이와같은 일은 이미 예고된 일이다. 1938년 신사참배를 결정함으로 한국교회는 영적인 간음을 하고 신앙을 배교한다. 1907년부흥을 전후하여 일어났던 순수한 믿음은 사실상 그때까지만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루고 순교를 당하는 진실한자들을 외면하고 모른척할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신고하고 그들을 원수에게 잡아준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 13:9-13)

 

 

그때 당시에 깨어 기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언한대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는 두동강이로 나뉘어 졌다. 그리고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독재정권과 혁명정부가 교차되는 가운데 경제개발이 일어나고 나라가 근대화가 되면서 교회가 한 일은 영혼들로 침륜에 빠지도록 수수방관 한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970년초에는 동네마다 “개인제단”을 쌓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것은 영락교회를 비롯해서 서울의 큰교회들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성도의 교제가 희박해진가운데 교인들이 주일오후에 모여서 따로 예배를 드리며 안수기도를 받고 예언기도를 받으면서 영적인 목마름을 해소하고자하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하나의 부작용으로 역사할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람을 통해서 만나려고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은사주의의 폐단을 불러 오고 헌금으로 인한 갈등을 겪으면서 영혼들은 더 피폐화 되어 가는데에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다.

 

 

여러차례에 결친 5개년 경제개발의 결과로 나라의 경제가 조금씩 좋아지면서 오히려 물질가치관이 교회안으로 밀고 들어 온다. ‘잘살수 있다’라는 설교를 하는 교회가 큰교회가 되고 그렇게 듣기 좋은 설교와 희망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는 교인들이 늘어난다. 그러면서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이 믿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인격을 본받는 공동체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집단적인 종교행위를 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조직의 모습으로 굳어져간다. 체육대회와 교회건축을 위한 바자회다하여 장사군들을 교회안으로 끌어 들이고 주일날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일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말그대로 그리스도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중심의 교회로 변모해가고 도시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이기회를 놓칠새라 이에 편승해서 개발지에 빚을 내어서라도 땅을 얻어서 예배당을 지으면 교인들이 몰려 들어오고 돈도 넉넉하게 들어 온다는 사상을 받아 들이게 된다. 그때즈음에 목회자들사에에 나온 말이 “돈놓고 돈먹기다”라는 노름판의 용어가 부끄러움 없이 교회안으로 들어 온다. 교회가 재산이 많아지고 소위 부자가 되면서 교단에 돈이 돌기 시작하자 교단장이 되려는 욕심들이 표출되면서 교단장 선거때마다 막대한 선거자금이 도는 악한 일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경건한 사람들이 탄식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교단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금권은 이제는 교단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교단이 그에 속한 정치목사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위에 감히 군림하는 무소불위한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개교회별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조직화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조직안에서 서로 당을 짓고 그파벌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님이 기름부어 세운 종들을 매장시키고 죽이는 일들을 서슴없이 하게 되었으며 진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력의 행사앞에 경건한자들이 숨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아파트와 신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에 예수전도협회가 복음을 전하는 세미나를 시작한 것이 어떤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심령을 회복하고 회개하고 거룩함을 다시 찾아서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하여 진실한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고 순수성을 회복하여 목회하고 전도하는 데에 도움을 받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전도훈련을 자기의 목회에 이용하고 교인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참석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교인들을 훈련에 보내어 회개하고 깨지는 것을 즐기면서도 심령이 깨어지고 이전에 없었던 은혜를 받은 그들을 지속적으로 은혜아래 살게 도와주지는 못하였다.

 

 

예수전도협회의 사역과 역사가 이와같은 오늘날 교회의 타락을 일시 지연시키는데는 일조를 하였지만 전체적인 타락을 막는데는 역부족이었던것이다.

 

 

몇몇 일부 교단에서 이유빈 장로와 협회에 대한 종교적인 시기심으로 거짓말로 훼방하고 악한 말을 하여 공격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 일어 났다. 어떤 교단은 흠을 찾을 것이 없자 신학이 다르다는 궁색한 변명을 가지고 자기 교단의 목회자들로 참여금지를 명하였다. 그러나 이유빈장로는 신학을 한적이 없으며 신학교 문앞에도 가지 않은 사람이다. 목사가 텔레비전을 보지 말고 경건생활에 힘쓰라고 하였다하여 세상문화를 부정한다는 비방을 하기도 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께만 하면 된다는 궤변도 늘어 놓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성경도 부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거짓말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들이 한 거짓말들이 이십년이 가깝도록 무식한자들의 입에 아무생각없이 회자가 되고 인터넷에 떠돌음으로 이 순수한 주님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다.

 

 

그와같은 상황에서 믿음이 굳세지 못한자들이 교단의 훼방을 받고 사람들의 비방이 두려워 진리를 떠나가고 침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와같은 와중에서도 예수전도협회나 아직도 전도하는 분들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고 목회를 하고 있으며 주님의 역사는 막히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는 정작 나의 마음속에는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왔다. 지난 오랜 세월동안 내가 사역한 일이 다 소용이 없는 일과 같이 여겨지고 낙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교회현실이 더욱더 타락으로 치닫고 복음도 거룩함도 없고 영적인 찬송가를 버리고 혼적인 복음성가를 부르며 인간중심의 교회로 타락해가는 날이 갈수록 어둡고 악한 상황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흔적은 하나라도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인본적이고 세상적인 말들과 용어들 멘토니 리더쉽이니 뭐니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용어들, 그리고 그와같은 가치관이 오늘날의 교회안을 더욱 더 혼란으로 몰아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아 이렇게 끝나려는가보다.”라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한국교회는 지난 십여년동안 캐톨릭에 교인들을 너무나도 많이 빼앗겼다. 그리고 신천지라는 이단에게만 수십만명의 영혼들이 낚아 채어 감을 당한 현실이다. 교회밖에서 교인들을 모으는 바리새인의 전도를 하는데 힘쓰다가 영적인 힘이 모자라 교회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조차 복음을 전하지 못한나머지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 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는 영적으로 무능한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가하면 종말론을 가르치지 않고 또한 어떤 이들은 이론과 지식으로만 가르침으로 신천지와 다른 여타 이단들에게 교회안에 까지 들어와서 대담하게 교인들을 낚아채 가도 손을 놓고 바라볼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오늘날 거룩한 생활과 열매 맺는 복음으로 다시오시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교단은 무소불위한 힘을 가지고 막대한 재정을 가지고 교회위에 군림을 하고 전도를 훼방하고 회개를 거부함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교회안의 영혼들을 이단들로부터 지켜주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다른 방면에 힘을 쓰는 어리석은 모습가운데 주저 앉았다. “노희의 돈을 쓰지 못하는게 병신”이라는 말을 하면서 국내로 해외로 목회자들은 놀러가는 일을 당연히 생각을 하고 비행기를 타면 대중가요를 부르고 누추한 말과 행실을 하면서 교회안에서의 외식에서 해방된 해방감(?)을 누린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렇게 병들어 간다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은혜를 알고 복음을 아는 이들이 잠을 자고 있는 현실이 가장 뼈아픈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할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가? 그은혜를 받고도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행위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보려고 하며 율법을 가지고 교인들을 다스리는 잣대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벌인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도 어찌할수 없는 길로 들어간것이라고 치부를 하자 그러나 신실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와 같이 주저 앉아 있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다.

 

 

이번 여름전도여행에서 나에게는 큰 충격이 있었다. 2대 대장은 맡았던 박진성목사님이 둘째날에 나에게 당신이 맡은 대의 보고를 했다.

 

 

“장로님 골방을 하는 이들이 있나해서 손을 들라고 했더니 우리대에서 두명만 손을 들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질문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 마음에는 이 말만 들어 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역한 것이 아무효험이 없어 보인 것들이 마귀의 공격이나 훼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골방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보여 주시기 시작했다. 전도훈련을 받고 전무한 은혜를 받고도 윤아무개 목사의 기도원이나 또 다른 전도프로그램이나 또 다른 집회와 세미나로 달려간 목사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전도협회도 아니다.

다른 여타의 세미나가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회복되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단독으로 만나는 골방이었다.

목사들만이 아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날마다 골방을 가지지 않는 심령은 죄도 세상도 못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골방이 없는 심령은 병들 수밖에 없다.

골방이 없는 목회도 병이 들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가정도 꾸려가지 못하고 자기 아이들의 영혼도 건사하지 못한다.

 

오래전에 큰교회목사가 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그교회는 교단안에서 물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목사는 훈련을 받는 중에 “이런 순수한 복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던 목사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고등학생 아들을 중고등부 훈련에 보내었는데 세상말로 양아치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안으로나 밖으로나 황폐화된 아이였다. 그아이는 목사인 자기아버지의 교회안에서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그아이는 아버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찬 아이였다. 오죽하면 자기 수하에 있는 부목사를 보내어 감시를 붙였는데도 그아이는 집회중에 도망을 갔다. 그아이는 자기아버지가 주님을 닮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닮을래야 닮을수 없는 가정생활에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찼던 것이다.

 

 

어쨌든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각사람의 골방의 부재에서부터 온 것이다.

 

 

골방은 무엇인가?

 

 

골방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골방은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시는 맞춤의 시간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의 얼굴을 뵈오며 주의 음성을 듣는 곳이 골방이다.

하나님앞에 나의 영적인 현실을 보이며 나의 형편을 아뢰고 도우심을 구하는 곳이 골방이다.

일용할 양식을 받아서 그말씀을 가지고 살며 연약함을 아뢰고 도우심을 구하는 곳이 골방이다.

 

 

말하자면 골방은 한영혼의 영적인 상황실이다.

 

 

영적인 양식으로서의 말씀이 잘 공급되고 있는지 그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고 있는지 성령의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서 잘 살고 있는지를 상황을 파악하고 영적인 실태와 현실 그리고 다가올 위기와 믿음으로 준비시키는 일들을 하나님이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시간이 골방인 것이다. 그러므로 골방이 없는 사람은 이와같은 영적인 경영을 절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농사와 같이 영혼도 경작을 하는 것인데 이와같은 영혼의 경작이 성립이 안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역의 특성상 이슬로 농사를 짓는 곳이다. 요단강가에 심긴 나무들은 항상 풍족한 수량을 맛보고 있으나 여타지역은 아침 저녁으로 내리는 이슬로 작물들이 자라는 곳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것을 받아서 모든 작물들이 자라고 반면 번개와 함께 내리는 소나기인 봄비 그리고 늦은비는 와디라는 건천을 통해 일순간에 빠져 나가기 때문에 농사에 도움이 되지만 일시적인 도움이 되고 항상 도움을 줄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을 하자면 골방은 이슬비와 같은 은혜가 임하는 곳이다.

교회는 이슬들이 모여서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곳으로 요단강과 같은 은혜가 있는 곳이다. 교회는 은혜 받은 성도들이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모여서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소나기는 교회 부흥회나 세미나에서 일시적으로 집중적인 은혜를 받는 곳이다.

예수전도협회의 세미나나 집회 사경회나 전도훈련은 다른 어느곳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은혜가 있는 곳이다. 다른 어느곳에서도 그와 같은 역사를 맛볼수 없는 은혜를 공급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소나기와 같은 은혜로서 그 은혜를 받은 목사와 성도들이 교회에가서 그것으로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절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를 건천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올때만 물이 흐르다가 비가 그치면 그물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그것이 내인지 땅인지 분간이 안되는 것과 같이 비가 내렸었는지 아니 내렸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음과 같이 아무리 기가 막힌 은혜를 받고 울다가 졸도를 하고 말할수 없는 충격적인 은혜를 받았어도 또 교회에 돌아가서 찬송소리가 회복이 되고 눈물로 예배를 드리는 역사가 일어났어도 일주 또는 이주 잘해야 한두달 안에 그와같은 은혜가 사라지고 이전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가 분간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바싹 마른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건천은 흐르던 물이 마르고 나면 어디가 내인지 땅인지 분간이 안됨과 같이 세상사람들의 생활과 인격과 다를바 없이 짜증을 내고 혈기부리고 경솔하고 생각없는 행동을 하는 데로 다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예수전도협회의 집회나 모든 한시적인 특별집회는 나의 모습을 깨닫고 잘못 살은 것을 회개하고 충격을 받으면 그이상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주님과 함께 날마다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은혜를 받으며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는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골방에서 주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며 세상에서 죄를 짓고 패배하는 삶을 사는 생활이 습관이 되는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침마다 골방에서 받은 은혜를 세상에 가지고 나가서 그은혜를 유지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다. 그리고 세상은 직장이나 일터만이 아니라 가정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은혜로 싸우면서 사는 세상의 현장중에 중요한 현장이다. 길거리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살고 아침에 주신 은혜를 유지하면서 그때 그때 세상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더하면서 살고 그은혜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자기전에 하루를 살은 것을 돌아 보고 영적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잘못 살은 것을 회개하고 지은죄를 내어 놓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용서를 받으며 잘한 것은 더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기도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날도 그렇게 살고 또 그다음날도 그렇게 살면서 어제보다 은혜가 더하는데 은혜가 떨어지지 않고 주일날이든 교회에 모이는 시간에 교회에 나올 때에 살면서 받은바 은혜가 촉촉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면 그와같은 심령들이 모여서 은혜의 강물을 이루는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처음믿은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받은바 은혜를 보고 본을 받으며 그렇게 살고자 결의하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는 곳이다. 그렇게 은혜를 유지하고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교회로 오는 사람들의 정점에 목회자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은 목사는 어느 누구보다도 골방에서 은혜를 많이 받아야하고 생활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싸워 이기며 승리생활을 통한 은혜가 충만 해야만 교회를 항상 은혜가 충만한 요단강물과 같은 교회로 이끌어 갈수 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언제부터인가 이나라 교회안에서 골방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기 시작을 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골방을 목말라해야 하는데 교회생활을 목말라하고 교회를 경영하는 것을 힘쓰는 나머지 자기 영혼을 위한 골방을 점점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일반 신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골방을 하면서 날마다 주님께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고 사는 독자적인 인격들을 거의 찾아 볼수 없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교회에서 은혜를 받는줄로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골방도 없고 골방에서 받은 은혜로 사는 생활도 없기 때문에 골방에서 받아야 하는 것을 교회에서 받는줄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목사는 설교를 잘해야 하고 목사는 은혜를 끼쳐야 하며 교인들이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것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올 때뿐이며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 낮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이 하나님과의 유일한 접촉 창구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부인할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인기가 있고 설교로 교인들을 끌어 모으는 일들이 일어 나고 설교를 못하면 교인들에게 불신임을 당한다. 주님을 닮은 인격이라도 설교를 못하면 행세를 못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전도를 하지도 않으면서 열매도 없으면서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교인들이 늘고 줄어 드는 관건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교인들이 늘지 않으면 목사를 내어 쫓고 내어 쫓지는 않아도 온갖 스트레스에 협박까지도 일삼는 일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사들은 남의 설교집을 베껴야지만 설교를 할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교회를 프로그램이나 흥미위주로 끌고 가는 인본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인들이 좋아하면 복음성가도 부르고 교인들이 좋아하면 야유회도 가고 교인들이 좋아하면 운동회도 하면서 교회는 점점 세속화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리고 전도는 교회교인을 늘리기 위한 천한 수단으로 전락을 시킴으로 지상명령을 무력화하고 그명령을 하신 주님을 모독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다가 교회는 온갖 육신적인 프로그램들과 행사로 교인들의 육신적이고 혼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시녀가 되어버린지가 오래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할수 있는 것들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교회의 본분을 잊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점차적으로 인본적인 모임과 조직으로 전락이 되어 온 것이다.

이모든 것이 한사람 한사람의 골방의 부재로부터 나온 결과물들인 것이다.

 

 

교회는 은혜를 받는 곳이라기 보다는 생활속에서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곳이다. 사람이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은혜를 서로 나누면서 본을 보이고 본을 받으며 주님을 따라가는 곳이며 피차에 주께 받은 바 신령한 것을 나누어주고 받는 곳이 교회이다.

 

이로 볼 때에 교회를 타락시킨 것은 세상이 아니다. 골방을 잃어버린 세대가 교회를 물없는 우물로 만들고 물없는 시내로 만들어 버림으로 타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교회가 그은혜를 머금을수 있는 영적인 환경이 아니되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은혜는 있으나 지속적인 은혜의 공급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된 것이다.

 

 

이와같은 것을 돌아 볼 때에 예수전도협회가 아무리 수고하고 힘을 써도 한사람 한사람이 골방을 외면하면 한국교회는 살수가 없다. 이유빈 장로가 30여년전에 전도를 시작하고 이십여년동안 전도훈련을 하고 영혼들을 깨워서 돌려 보냈으나 그때 받은 은혜를 간직하지 못해서 전도는 커녕 받은바 십자가의 은혜와 눈물을 상실하고 직장에서 직장인으로 학교에서 학생으로 가정에서 주부로 세상사람과 별반다를 것이 없는 생활인으로 전락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국에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두룩히 찾아 볼수 있는 현실이다.

 

 

우리 주님은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찾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뜻을 알고도 그대로 행치 않은 사람들은 많이 맞겠다고 말씀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그러므로 이제 이나라 교회가 살길은 한사람부터 골방을 시작하는 길밖에는 없다. 교회에 속한 한영혼 한영혼이 살아나야 교회도 살아 날수 있다.

 

한영혼 한영혼이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고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남긴 것을 가지고 또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얻은 영적인 탈취물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서로가 생활속에서 받은바 은혜를 나눌 때에 교회가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몸의 한세포 한세포가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하듯이 한지체라도 상하면 몸이 온전할수 없는 것과 같이 한영혼이 골방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고 그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생활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싸워 이기는 승리생활을 하느냐가 교회가 강건해지고 강한 교회로 세상에서 역사하는 교회가 될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에 만났던 어느 집사님은 자신이 가정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졌던 영적권위를 상실한 것이 골방을 멀리하고 주의 얼굴을 구하지않았기 때문이라며 골방을 다시 하기로 결단을 하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며 보던 것을 끊고 여러 가지 분산되게 하는 것들을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늦었다고 생각이 되는 지금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해야 한다. 식구중에 아무도 방해할수 없는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 장소가 없다면 산으로 가든지 주님처럼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면 날마다 매일 매일 주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는 골방이 시급히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시간을 정할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밤에도 시간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어제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지난 집중코스에 참석을 했던 어느 권사님은 자기를 집중코스에 데리고 간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에 골방을 시작하였는데 골방을 가지지 않고는 그날 일을 아니하기로 결단을 하고 골방을 가지지 않으면 가게에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이글을 일고 있는 당신도 주님이 한적한 곳 한적한 시간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주님이 한적한 곳에서 나혼자만을 단독으로 만나시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기다리시고 사모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당장에 골방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쪼록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부터 라도 잃어버린 골방을 수축하고 다시 골방을 시작함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받아서 그양식으로 살면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며 교회를 풍요롭게 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영적으로 살찌게하는 역사를 목격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기를 원한다.

이땅의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각사람이 골방을 가지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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