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BC 2000년경의 사람이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었는데 그 당시에는 갈대아인은 없었고 수메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수메르인의 우르 제 3왕조 아래 번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버지 데라와 동생 나홀과 우르에서 이미 죽은 하란의 아들, 롯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2~3)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고집 때문인지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떠나지 않고 그냥 강의 상류로만 올라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애렉과 바벨론을 지나서 강의 중상류인 마리를 지나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중의 한지류의 끝인 하란까지 가서 거기에 정착을 한다. 하란 이상은 산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올라갈수 없는 상황에서 하란에 머물러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데라는 우르에서 죽은 아들 하란을 기념하여 그곳의 이름을 하란으로 명명한다. 그는 아들들과 자부들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을 떠나면 죽는 걸로 알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거기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남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사막 길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나안은 사막으로 둘러 싸인 지형이다. )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믿음은 거기까지의 믿음이다. 그는 우르를 떠나는 믿음은 있었으나 하란을 넘어가지 못하는 믿음이었다. 그의 믿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믿음이었으나 여전히 우르의 문명화된 도시 육신의 편안하게 잘 사는 도시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났지만 현실을 무시할수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믿음은 오히려 자식인 아브라함의 앞길을 가로막는 믿음이 되었다. 그의 믿음은 자식에게 장애를 가져다 주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생애를 마감하게 하셨다. 그는 하란에서 205세이 죽었다. 이는 어찌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하여 데라를 데리고 가신 것이다. 데라의 이름은 영어의 "연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delay"라는 말과 어근을 같이 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복의 행진에서 제일 먼저 그의 아버지인 데라는 죽음으로 떼어 놓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한 때에 죽은 의미 있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의미한 것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데라가 죽고 나서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란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1~4)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 그의 조카 롯은 함께 하였지만 그의 동생 나홀은 거기 하란에 그냥 머물러 살았다. 그는 아버지 데라의 뜻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을 했던 데라의 가치관에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형을 따라서 하란을 떠나 갈수가 없었다. 그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이삭도 야곱도 밧단아람에 사는 삼촌을 딸을 취하여 아내를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 던 것과 같이 그도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자기 아버지 데라와 같은 한계가 있는 믿음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죽은 그 땅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는 육신적인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 두 형제간에 심한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떠나고 그는 하란에 머무른다. 이것도 하나님이 그의 약속의 행진, 축복의 행진에서 나홀을 떼어 내시는 것이다. 같은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함께 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제들은 갈라섰다. 그것이 믿음이다.

 

 주님도 이땅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오셨다고 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 12:51~53)

 

그분쟁은 곧 집안의 원수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집안의 원수는 믿음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믿음이 다르면 다투고 싸우며 원수가 되는 것이 집안의 식구들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믿음이 없는 나홀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진에서 떼어 내시는 것이다. 아마도 나홀은 자기의 의지와 결단으로 자기의 뜻으로 아브라함의 행진에서 스스로 빠져 나왔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의 믿음이 '함량 미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진 축복의 행진에서 쫓아 내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도 우르를 떠난  것에 대한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반열에서 멀어지고 떠나감으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칠십오세에 하란을 떠나 일 년만인 칠십육 세에 하나님의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이르렀으나 그의 믿음은 연약하여서 정착 하는 믿음이 되지를 않았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믿음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종교생활에 습관이 배어 가는 악한 상태에 있다. 데라와 나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나안의 축복의 땅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생활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했기 때문에 그도 가나안에 정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도 정착하지 못하고, 육신 때문에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러 내셨던 우르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땅인 애굽으로 갔다. 이전 형편보다 더 악한 형편이 된 것은 그가 먹고 사는 일에 집착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집착을 해야 하는데 먹고 사는 일에 집착을 한 것이 그로 하여금 믿음을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연약한 믿음으로 우왕좌왕하며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는 애굽으로가서 아내를 빼앗긴다. 아내 사래가 그의 미모에 반한 애굽왕 바로에게 시집을 가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다. 버젓이 남편이 있는 아내가 남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다. 그것도 그 나라의 왕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를 책망하시고 그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하시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 주신다. 힘이 없어 현실에 굴복하고 죽을 목숨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빼앗겼지만, 하나님은 사래가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그와 함께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래를 바로에게서 강권적으로 다시 뺏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가피하게 힘이 없어 교회를 떠난 사람을 주님이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자요, 그와 함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이었기 때문이다. 데라는 죽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라면, 나홀은 자기의 의지로 교회를 떠난 사람이며, 사래는 힘이 없어 교회를 떠났지만  하나님이 다시 돌려 주심으로 다시 돌아오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도 많고 많은 것이 여자이었으나 사래와 같은 믿음의 여인은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와서 남방으로 올라올 때에 아브라함을 떠나간 안타까운 사람이 있다. 그는 죽은 동생 하란이 우르에서 낳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에 순례자의 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삼촌과 함께 우르를 같이 떠나 숱한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 할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에도 그는 아브라함과 함게 있었으며, 또 다른 삼촌인 나홀이 아브라함과 다투고 헤어질 때에도 그는 아버지같은 삼촌 아브라함이 옳은 것을 믿고 그를 따라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장애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일의 결국을 돌아 볼 때에 아마도 아내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아서 자기만의 독립된 생활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죽이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떠났을 것이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 13:5~12)

 

그는 자기 삼촌보다 자기가 더 잘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잘살기 위해서 삼촌에게는 황무한 땅을 남겨 두고 자기의 눈에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요단들을  택하고 동편으로 가서 살다가 소돔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보고 듣는 것으로 인하여 그의 영혼을 상하게 하였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벧후 2:8)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의 관영하여 그 성을 엎으실 때에 롯은 사랑하는 아내도 모든 재산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4~26)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 주셨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였고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수가 없는 자리에 버려진 것이다. 지금까지의 믿음의 연단이 고난의 순례자길이 무색할 정도로 육신적인 결정을 하고 삼촌을 떠나갔는데 그가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롯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단지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카 롯으로 인하여 슬퍼하시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롯을 건져 내신 것이지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롯은 믿음도 팔고 축복도 받지 못하고 남은 날들을 실의에 차서 술로서 보내었던 것이다. 그가 딸들과 동침하여 낳은 아이들이 각각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다. 제발로 자기의 뜻을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나간자들에게는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롯과 같이 육신적인 이유 때문에 정욕 때문에 혈기로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은 다 롯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혹시 해를 당하지 않는 것은 롯과 같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해를 받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도 없고 상속자도 없어서 롯을 자기의 후계자로 생각하면서 온갖 사랑과 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조카가 만일 죽으면 그상심함이 어떠한지를 아시는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충격을 덜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상심한 마음에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두고 살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축복을 약속하실 때에 다메섹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결정을 한 후의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올 때에 가나안 땅에 거의 다 들어 올 무렵에 다메섹에서 엘리에셀을 종으로 삼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롯이 자기를 떠나자 이제는 자신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2)

그러나 엘리에셀도 하나님은 떠나 보내야 할 사람이었다. 그도 아브라함을 만나기 전에 믿음이 아닌 세상 가치를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아브라함을 떠나갔다. 그는 믿음으로 살수 없기에 하나님이 내어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축복에 약속의 행진에서 여러 사람이 떠나갔다.

그런 가운데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의 꼬임에 빠져 실수를 하고 만다. 그것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도 10년이 되었다. 아브람함의 나이도 석양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에 사래의 꼬임에 빠져서 애굽에서 데리고 온 종인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인줄알고 기뻐하며 그에게 온갖 사랑을 다쏟아 붓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을 주실 때까지 여든여섯에 낳은 그 아들을 귀히여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준비하셨다. 이스마엘에 열네 살이 되던 해에 하나님은 이 가정에 이삭을 선물로 주신다. 이삭이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서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고 아브라함에게 강청한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창 21:10)

종의 아들은 이삭과 함께 유업을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신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창 21:11~12)

 

그리고 아브라함을 위로하시면서 그도 한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 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창 21:14~20)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내어 쫓으신 것이다. 롯은 자기발로 걸아 나갔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내어 쫓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어 쫓으셨기에 함께 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이것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나갔던 롯과는 다른 것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내어 쫓으신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브라함의 교회를 떠나갔다. 

 

오늘날도 데라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믿음이 자라기도 전에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도 전에 이 땅에서 죽음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데라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홀과 같이 영적인 사람과 다툼으로 자기 스스로 결정했다고는 하나 하나님게는 버림을 받은 고집센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상실하고 믿음의 약속에 축복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다. 또는 롯과 같이 엘리멜렉과 같이 이스마엘과 같이 떠나고 쫓겨나는 일들은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쫓아 내신 것이지만 롯은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다. 교회를 떠나는 것도 하나님이 쫓아 내신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지만 자기 발로 스스로  걸어나간 롯에게는 패가망신만이 있었다. 교회를 자기의 정욕과 자기의 당한 형편을 벗어나기 위해서 제 발로 걸어나가는 것은 저주를 받는 일이다. 거기에서 더 악한 것은 사람을 따라서 교회를 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을 짓밟고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악한 것이며 그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이신 성령을 욕되게 하는것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28~31)

 

 

지금까지 주의 일을 한지가 사십 년이다. 그 사십 년동안에 많은 사람을 주님이 붙여 주었고, 또한 떠나갔다. 혈육의 동생들이 같은 믿음으로 살다가 더 이상 같은 믿음이 지속이 안 됨으로 떠나간 일도 있었다. 같이 일하던 동역자들도 많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떠나갔다. 훈련을 받고 전도를 하던 목회자들도 무수히 붙여 주었지만, 또한 무수히 떠나갔다.

그들 중에는 돈 때문에 떠난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이들, 곧 적지 않은 이들이 함께 일하던 간사들에게 시험을 당하여 떠나간 사례도 있다. 어떤 이들은 순수한 목사님들을 상대로 예수전도협회를 이용하여 그들만의 조직체를 만들려는 수작을 하다가 쫓겨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정욕 때문에 떠나갔다. 어떤 이는 핍박이 무서워서 도망을 간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는 교단의 핍박을 피하여 떠나가서 신학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어떤 이는 배은망덕하여 악하게 하고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으며 어떤 이들은 죽어서 같이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실수를 하고 쫓겨난 사람들도 있었다.

 

쫓겨났든 떠나갔든 죽었든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서 신학을 한 어떤 이는 생활이 평탄치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악을 행하고 떠난 사람들이 집도 날리고 사역도 날리고 사모가 일을 나가서 벌어 먹어야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적지 않이 망하고 저주를 받은 것도 보고, 되고 있는 사실이며 근근이 목회를 하는 이들도 있고 그들 중에는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세상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나는 믿는다. 단지 그들이 같은 믿음으로 이순례자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의외의 사람들은 아직도 함께 이 길을 가며, 예수의 고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형제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주님이 새롭게 하시는 일과 역사를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비밀이 간단하고 명료하게 풀리는 것을 보면서 이 전에 은밀하게 요한계시록을 못하게 저해하려던 간사들이 협회를 나간 것을 두고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이 귀에 쟁쟁하다.

  

“장로님 그사람들이 나간 것은 스스로 나간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어 보내신 것이 확실하네요”

“.......”

“그들이 나간후에 되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지요....”

“.......”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일에 쓰임을 받는 반열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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