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

 

꿈에서 해외여행을 갔다. 이베리아 반도라고 했다. 남부해안의 어느 휴양도시이었는데 아마도 집회를 간 것 같았다. 시간이 되어서인지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보니 어느 꼬부랑 할머니가 나를 찾아 왔다. 한국에서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은 어디 사시느냐고 나에게 물어 왔다. 나는 그에게 그분이 미국의 어디에 사는 것 같다고 말을 해 주었다. 그는 한국여권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자가용으로 나를 태워 교회로 가는데 여러 가지 탄식을 하는 중에 자식의 믿음을 걱정하는 말을 많이 했다. 자식이 믿음도 없고 교회도 잘 나오지 않는 다는 말이었다. 요즈음은 한국도 그렇다고 말을 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믿음이 있다고 짐짓 생각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를 생각해보니 나도 교회를 어려서부터 다녔지만 예수가 없는 가짜로 이십삼 년을 교회를 다닌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지나가는 길에 어느 교회에 여름성경학교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여름성경학교 노래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어렸을 때에 아 아 진리의 성경말씀 배우러 가자라고 목에 핏줄을 세우고 그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여름성경학교는 고사하고 주일학교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나에게 생명을 얻는 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를 가리켜 모태신앙이라는 말하기를 좋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다윗의 시편을 보면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나오는 것이 예외 없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5)

 

모태신앙은 없다 모태죄인만 있는 것이다. 이전에 나와 같이 예수가 없이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교회의 일만 하는 가짜들이 오늘날에 교회 안에 범람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예수를 믿기 보다는 피차에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런 줄로 믿고 생활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가 없는 가짜들도 자기의 정체를 숨기기가 쉬운 곳이다. 오늘날은 귀신에 들린 사람들도 버젓이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본다. 하긴 나에게도 어려서부터 나를 거쳐 간 담임목사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를 믿지 않고도 목사가 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장로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이 교회 안에서도 통하는 것을 오랜 세월동안 보고 살았다. 목회자훈련을 하면서 거기에 왔던 목사님들 중에 구원조차도 받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다가 거기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수를 셀 수가 없다. 어디를 가나 제가 거기 가서 말씀을 듣다가 구원 받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거듭났습니다”, “저에게는 거기가 요한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와 같은 곳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허다하게 많이 만났다. 어떤 이는 훈련을 받은 다음 주일에 강단에 서서 사십 년 목회를 사기쳤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는 사람의 말도 들어 보았다. 물론 강단에서 말 한마디도 못하고 울기만 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전도훈련에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전도를 해서 교인을 모아 교회를 해보려는 욕망의 화신(化身)들이 되어서 왔다. 그러나 주님은 그 훈련을 구원받지 조차도 못한 목사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월이 상당히 지난 지금의 현실을 볼 때에 교회 안에 구원받지 못한 가짜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거기에다 물질가치에 물들은 우상숭배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물질가치로 판단을 하다 보니 그것이 자기 자신의 사유물인줄로 착각을 하여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회적으로도 욕을 먹는 악한 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하고 있으며 교회와 목사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파가 나뉘어 싸우고 쪼개져도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싸우면서 교회 재판에서 지나쳐 세상 재판정에 불신자가 교회를 판단하도록 맡기는 악한 일을 하면서도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오십 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 싸움이 나면 주님을 위해 또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던 믿음 있는 목사님들이 생각이 난다. 이제는 교회 안에 믿음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다운 사람조차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세상은 날로 흉악해지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흉악한 범죄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구실을 못한지가 오래 되었고 오히려 세상과 한 가지로 타락하고 더러운 교회가 되어 세상 죄인들에게도 손가락질과 비방을 받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떤 이는 안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한가지로 다 싸잡아서 그렇게 말하느냐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지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한사람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욕을 먹는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닌 가짜들이 날뛰어도 세상은 그것이 믿는 사람인줄 알고 교회가 다 그렇다고 말하고 욕하는 교회의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뜯어보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주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주님을 안다고 말을 할지 모르나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곳이 오늘날의 교회이다. 또 그들이 모이는 예배당이나 시찰회나 노회나 지방회 또는 총회에서 주의 뜻을 알고 그렇게 행하는 경건한 이를 한 사람이라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있는가?

물론 그들 중에는 이게 아닌데하는 의식과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주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는 많이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목사는 교인들을 즐겁게 하려하고 장로들이나 교인들은 주님의 뜻은 제쳐두고 목사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이 문제에 있어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1-23)

 

21절의 말씀은 22절의 그 날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날에 어떤 사람들을 단호히 떠나보내신다고 했다. 그들은 보통 교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며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책도 쓰고 부흥회도 했던 선지자노릇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귀신들도 좇아내고 많은 능력도 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겠다고 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노스코인데, “그노시스가 지식을 아는 것을 말하는 반면에 이 단어는 인격을 아는 말에 쓰인다. 여기서 이 말씀에서 이 단어는 친하다라는 뜻이 가장 적합한데 그것은 인격은 친한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사람이나 한번 보아서 아는 것이나 만나서 아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인격으로 볼 때에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아는 것은 친해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사람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함께 살고 친해졌을 때에 진짜 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도무지는 히브리어로는 우데포테결코” “전혀”, “절대로라는 뜻으로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친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너 나하고 전혀 안 친하잖아? 그런데 왜 나를 아는 것처럼 부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과 친하지 않고 그날에 단호히 거절을 당한 이유는 21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여 주여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는 않았다. “라는 단어는 나의 주인또는 나의 왕이라는 뜻으로 나를 주관하시는 이를 부를 때에 쓰는 칭호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불렀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는 않았던 말하자면 불순종의 자식들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시제이지만 그것은 죽었을 때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고 오신 나라가 천국하늘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즉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그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도 쭉 하늘나라 밖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면서 천국에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입으로는 그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외모로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아직도 하늘나라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많이 볼 수 있듯이 이율배반적인 생활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천국은 말뜻 그대로 하늘나라이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를 믿는 즉시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죽은 다음에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줄로 믿고 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 무지한 결과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이 마치 죽어야지만 현실이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은 것은 예수를 믿으면 죽어야지만 덕을 보는 것인가? 살아서는 교회 다니는 것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인가? 아마도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열악한 생활 또는 영적으로 내용이 없는  전무한 생활을 살면서도 이렇다 할 아무런 의식이 없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 것을 알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하고 요행을 믿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이 만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을 해보라.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은 고사하고 성경말씀도 모르고 살지 않는가? 기도생활은 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상호관계가 성립이 되는 기도생활이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거의 모든 교인들이 거의 모든 성직자들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전도는 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을 하면서 살지만 한 번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장례식을 치루는 사람들 가운데 99.99%라 해도 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게 살면서도 교회 안에서 성직자고 장로요, 집사라고들 서로 불러주고 대답을 하고들 있다. 그러니 주님이 바보가 아닌들 그런 사람들을 아는 체나 하시겠는가?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자기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 수가 없다. 구원받은 성도는 받은바 성령으로 사는 하늘나라를 오늘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사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바 된 자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5-6)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언어도 하늘의 언어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으로 대화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산다. 그 언어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12:22-24)

 

그렇게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은 인격도 하늘나라의 인격이요, 성품도 하늘나라의 성품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생활 속에 보여 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기들의 일행은 말로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로 전도를 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이렇게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고쳐 주시는 생활을 사는 통치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요, 하늘나라는 삶의 질, 곧 영적인 생활 하나님과 함께 사귀고 동행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44년 전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살아서 날마다 인격이 변하고 성품이 변했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달라질 만큼 나는 말씀으로 고침을 받아 날마다 변했다. 그리고 일 년 남짓 지나서 직장에 들어 갈 때에는 밤낮으로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살았기 때문에 회사복도에서 큰 소리로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을 매일 부르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왜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곧 하늘나라를 구분해서 쓰고 있을까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행사를 하면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을 해주셨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오늘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도 안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도 모르고 교회생활만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교회 안에 천국복음이 사라지고 교회복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와 같이 수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도 알지 못하고 가짜로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많이 모이는 것이 부흥이라는 말에 속아서 살아 온 것이다.

부흥은 각 사람 속에 성령을 주심으로 그 성령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사는 것이 부흥의 시작이다. 부흥은 단체적이고 집합적인 것이 아니라 부흥은 가장 개인 적인 것이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실 때에도 불이 뱀의 혀와 같이 갈라져 각 사람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백이십 명의 제자들 위에 불이 각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은 불길의 갈래가 일백이십 갈래가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각각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을 살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게 된 것이다. 모든 부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데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글을 읽는 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며 그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고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사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있는 곳에서, 곧 가정과 직장과 길거리에서 살기 시작할 때 가정이 거룩해지고 교회가 거룩해지는 그리고 사회가 거룩해지고 세상이 거룩해지는 부흥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 순간 한 순간 주와 동행하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은혜가 각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기를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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