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예배가 예배인가?

 

요즈음 목회자들 사이에서 온라인 예배가 예배인가 아닌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다고 한다.

우리 어렸을 적에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과 예배를 보았다"라는 말로 피차에 논란이 오고갔을 때도 있었다.

이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께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자녀가 아닌 사람은 예배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자녀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신 대화는 우리에게 예배의 정의를 분명히 해 주고 있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수가성 여인은 예배의 장소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주님은 그에게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신 관계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그의 자녀가 될 때에 예배가 성립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예배의 절대 조건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말하자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이요, 헛일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수당이 나온다면, 그리고 자신이 드리는 예배가 가짜 예배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장에 바로 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헛된 것인 줄 알면서 그것을 계속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 수당보다도 또 거액의 금전적인 보상보다도 더 귀한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주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의 조건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어서 예배의 내용도 말씀하셨다. 예배의 조건이 충족되어도 예배를 드릴 내용이 없으면 헛된 예배가 된다. 헛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를 말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예배의 내용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성령으로 에배를 드리는 것의 반대는 육신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시간에 몸만 교회에 와서 앉아서 예배에 참석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예배의 두 번째 내용은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진리(眞理)의 한자풀이는 참 진, 다스릴 이는 말 그대로 진리로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지식은 듣고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가르치는 것이지만 진리를 내가 다스림을 받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생활이 있어야 그 생활의 열매 곧 변화된 생활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진리로 다스림을 받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의 각각의 육체 속에 임하시는 것은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와 같이 예배의 필요충분조건인 하나님의 자녀가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는지를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은 받으시는데 우리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아니 받으시는지도 모르고 목석과 같이 짐승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절을 해도 내가 절하는 것을 상대방이 받는지 아니 받는지를 아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에 어떤 직원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상대방이 받든지 아니 받든지 상관이 없이 인사를 막하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아니 받으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상관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일방적으로 거듭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무래도 비정상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절대 조건은 자녀가 아버지께 드리는 관계적인 것과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가 예배가 되기 위한 우리 편에서의 조건이다. 그러나 예배가 예배가 되기 위한 하나님 편에서의 조건도 중요하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지만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예배가 예배가 되는 하나님 편에서의 조건은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야지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현현하심의 은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의 내용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쉬운 말로 하면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이 반응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심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이며 그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현현하심이 응답으로 나타났다. 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제사장들의 제사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엘리야의 제단에는 여호와의 불이 임했다.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이며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아오는 것이 예배를 드리러 나아 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자녀들 가운데 현현하심이 있는 것이 예배이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다.

 

(19:16)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9: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직장에 다닐 때에 외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왔다. 우리 부서는 이손님들을 맞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부서이었는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과 국내의 귀빈들을 맞이할 때에는 의전”(儀典)을 갖추어야 한다. 그 의전의 문제는 골머리가 아프도록 신경을 써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으로 오신 이에게 큰 실례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회사에 큰 불이익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주일 매 예배시간마다 의전을 갖추어 하나님을 맞이하고 알현하고 뵈옵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한번쯤은 머리가 아프도록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확신이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예배를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실정상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위하여 교회에 나오지 말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정부의 시책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배로서의 관계적인 조건과 내용적인 조건 그리고 예배에 현현하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예배로서 모든 조건이 결여된 것이다. 그중에 하나라도 예배를 드리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영상이다.

그것은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구경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성경말씀을 뒤로하고도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서 성립조차 안 되는 것이다.

행여 텔레비전이나 유투브나 다른 동영상류를 보는 것 중에 하나로 온라인 예배를 보고 구경하는 일이 될까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스운 생각을 한 번 해보자.

만일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나 바알선지자들이 온라인으로 대결했다면 하나님의 불이 임하여 제단의 제물을 태우는 일이 일어났겠는가? 그것은 상상하는 것조차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예수님도 굳이 성육신하실 필요도 없이 온라인으로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온라인으로 가르치시고 온라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도 온라인으로 재림하신다면 죽은자며 악인들을 어떻게 심판하시겠는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일이 있기 전에도 큰 교회에서 하는 영상예배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하는 방송설교의 치명적인 약점이 그와 같은 것이다.

성도간의 교제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통도 없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그냥 교인들을 조직 속에 많이 묶어 두고자 하는 교회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은 교인하나 얻기 위하여 바다로 육지로 다니다가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고 주님의 책망을 들었는데 그것을 교인들을 많이 모으기 위한 비정상적인 전도라면 영상예배는 교인들을 교회라는 조직 속에 묶어 두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자하는 비정상적인 교회활동이다.

 

또 방송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으로 설교하는 목사와 교회를 홍보(PR)하고자 하는 것과 교인들을 자기교회로 끌어 모으고가 하는 측면이 큰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며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것(self promotion)며 성교자를 교만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시청자들로 말씀을 듣기만 하고 즐기게하고자하기 때문에 더 악한 일이다.

그것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종교인들만 양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을 순종하여야하는 부담을 가지고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듣기를 즐기고 판단까지 하는 아주 위험하고 불경건한 일로 인도되시도 한다.

그것은 듣고 순종하는 생활이 교회에 모여서 피차에 서로 확인이 안 되고 확인할 수도 없는 껍데기 종교인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각 지체간의 영적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성도의 교제를 파괴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교제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인들 간에 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성립이 필요 없는 종교인들을 만들고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것은 한 영혼의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성장을 저해한다.

믿음은 서로 본을 받고 본을 보이면서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각자의 믿음을 보여주는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여서 드리지 않는 예배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어떤 시골교회는 몇 주 쉬고 다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지 말자고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부쳐 드리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코로나사태로 인하여 교회를 다니는 것이 번거롭고 번폐스럽기 까지했던 가짜들이 드러나는 경우이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일들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예배는 주의 자녀들이 모여서 성도의 교제를 통해 각각의 아버지에 대한 간증을 공유하며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그들에게 같은 아버지를 높이고 그 아버지께 경배하고 그 아버지의 나타나심을 받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이번 코로나사태로 드러난 것은 모여서 예배를 드리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나 별반 다른 점을 교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이 받으시고 나타나시는 현현하심의 예배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의 관계와 내용이 무시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 결과 예배가 아닌 예배를 드린 것이 이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집에 있고 또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결코 부족함도 못 느끼고 영혼의 불편함도 별로 없는 그런 상황 속으로 들어 가 버린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 옛날에 죄인 중에 괴수인 수가성 여인도 주님에게 예배를 배운 관계가 있는 예배, 내용이 있는 예배를 교회마다 성도들마다 드리는 신실한 교회와 성도가 되는 일이 속히 회복이 되도록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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