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해결하는 믿음

 

 본문 : 11:1-46

     

 

1. 들어가는 말

 

나사로는 주님의 친구이었다. 그가 병들어 죽었다.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는데 그런 과정에서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이 크게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산 것이나 병든 것이나 죽은 것이나 차이가 없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자세히 살펴 봄으로 우리의 믿음을 비추어 보고 우리도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받는 은혜를 받고자 한다.

 

 

2. 병든 나사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그의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기별을 한다.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주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이 무슨 이유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기 위한 기회이었다.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지만 서둘러 베다니로 가지 아니하셨다.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며 일을 하셨다.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3. 죽은 나사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은 다시 유대로 올라가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주님은 오래전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지혜를 가르치신 적이 있었다.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님은 지금이 때가 낮 열두시임을 상기시키시면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주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말씀하셨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정오의 빛과 같이 분명하다면 절대로 돌에 맞아 죽을 일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이미 죽은 사실을 말씀 하신다.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아직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병중에 잠이 들어 쉬는 줄로 생각을 했다. 그들은 환자가 잠이 들은 것은 병세가 호전되는 것이라는 상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이 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 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은 사실을 말씀하신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를 믿는 자는 죽음도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살아 날것이기 때문이다.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지금 베다니에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지금 베다니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으로 슬퍼하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나사로가 산 것이나 죽은 것이 주님앞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에게는 생명과 사망이 같은 것이다. 또 주님에게는 거기에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상관이 없다 주님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이번에는 참으로 죽으러 가는 것 인줄 알았다. 방금전에도 죽음의 위협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주님이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시니 이번에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디두모라는 도마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4. 베다니에 오신 주님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그리고 베다니로 오시는데에만 시간이 나흘이나 소요되었다. 주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를 지낸지 나흘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KM 밖에 안되는 근거리에 있었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5. 마르다의 영접

 

예수님이 동네 어귀에 이르렀을 때에 마르다가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주님에게로 쫓아 갔다. 마르다는 믿음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체질이라기 보다는 부억에서 일하고 그것도 아주 열심히 분주하게 일을 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보다는 먼저 주님앞에 나아 온 것이다. 마리아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그는 경쟁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투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자기가 마리아보다 먼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사실을 마리아에게 숨기고 주님께 달려 온 것이다.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맞는 말이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주님이 병든 자를 고치시는 많은 역사를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 자기 오라비를 살려 주실 것을 구하지 않았다. 단지 주님이 무엇이든지해 주실 것만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한계가 있는 믿음이었다.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믿음은 지금 믿음이 아니라 나중믿음이었다.

그런 마르다의 비현실적인 믿음을 주님은 도와 주신다.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말씀은 번역이 잘못되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죽었었어도 살겠고이다. 그것은 죽어도는 아포드네스코는 부정과거이다. 이말씀은 나사로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과거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나사로가 나를 만났을 때에 영적으로 죽었었던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나를 만나서 믿음으로 다시 살아 난 것이다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번역이 많이 잘못 된 것이다. “살아믿는은 현재분사로서 현재 진행형이다. “죽지인 아포드네스코도 역시 부정과거이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내안에 있어서 계속 살고 있는 자와 계속 믿고 있는 자는 결코 영원히 죽지 않게 된 것이니라로 번역을 해야 한다.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세상에 오시는”(코스모스 엘코마이)에서 엘코마이는 현재분사이지 미래가 아니다. 그리고 엘코마이는 온다는 뜻도 있지만 나타난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나타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자신을 지금 계속해서 나타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신앙고백과는 다른 믿음을 가진 것이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부활시에 주님이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심을 믿은 것이다.

 

 

6. 마리아의 믿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리아가 집에 앉아서 무엇을 했겠는가?

주님의 말씀과 그의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을 하면서 자기 오라비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마르다가 와서 그에게 주님이 오신 사실을 알려 주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주님께로 달려갔다.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주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시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만나던 그 자리에 서 게셨다.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모셔 들이지 못한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나의 문제에 접근하심을 막는 것이다. 주님은 마르다는 믿음으로는 그 마을에 들어 가실수가 없었다. 마르다는 행동은 민첩했지만 믿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믿음보다 행함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런 믿음은 주님을 가로 막는 믿음이요 주님의 역사를 더디게 하는 믿음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열심과 행위가 믿음을 앞서기 때문이다.

오라비가 죽은 것은 현실이지만 마르다의 믿음은 미래형 믿음이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마르다와 같이 미래형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리아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착각을 했다.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주님앞에 나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주님이 나사로와 함께 계셨다면 나사로의 병을 고치시고 그가 죽지 않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가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늦게 오셨고 죽어서 장사를 지낸지 나흘만에 베다니에 도착을 하신 것이다. 마리아도 울었다. 유대인들도 따라 울었다. 우리도 무슨 문제가 닥치게 되면 우는 것 외에는 할 일이 별로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힘이 없는 연약함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연약함이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그러나 주님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그것은 엠브리마오마이 호 프뉴마이다. 프뉴마는 영이다. 엠브리마오마이는 화가나서” “분개하여서라는 뜻이다. 그것은 영적인 분함을 말하는 것이다. 에스겔도 이와같은 분함을 경험하였다.

 

(3:14)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

 

근심하고 분한 마음마르 헤마 루아흐로서 화나고 분한 영이라는 말이다. 곧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의 히브리어 표현을 에스겔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심령의 통분함이 없이는 성령의 충만함이 없다.

 

 

8. 나사로를 살리심

 

마리아는 울었지만 마르다와는 다른 믿음이다. 그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마르다와 같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다같은 속다르고 겉다른 이중적인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오라비가 나중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겠다는 미래형믿음도 말하지 않았다. 마리아의 믿음은 현재형 믿음이다. 그믿음이 주님을 자기들의 문제인 나사로의 무덤을 찾게 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오신 것은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능력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은 것이다. 마르다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지만 지금 자기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지는 않은 것이다. 마리아의 믿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문제를 찾게 한 것이다. 나의 문제를 주님이 통분히 여기고 나의 문제를 주님이 찾게 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음앞에 그렇게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믿음을 보고 슬퍼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는 줄 착각했다.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주님은 또한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다.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33절의 엠브리마오마이와 같은 단어로서 심령의 통분히 여기신 것이다. 주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틀린 믿음이 또 다시 주님의 역사를 가로 막았다. 주님의 역사 바로 직전에 가로 막는 일을 한 것이다.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 앞에서 자기 오라비의 초라하고도 절망적인 죽음의 현실을 내어 놓은 것이다.

마르다는 자기 오라비의 죽음을 직면하기를 두려워 했다. 오늘날도 자기문제를 직면하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마르다는 무덤속에 파묻어 놓은 자기 오라비의 문제를 다시 대면하기를 무서워했다. 그는 그의 두렵고 무서운 문제 저 넘어 오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이 있는 자만 보는 것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주님은 마르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그 책망은 마르다의 믿음을 도와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주님은 믿음이 연약한 마르다도 사랑하셨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돌이 옮겨진후에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죽음앞에 떠는 무리들의 믿음을 위한기도이었다.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를 불러 내신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무덤에서 불러 내신 것이 아니다. 죽음에서 불러 내신 것이다. 주님은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님이시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8. 맺는 말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병들어 죽은 나사로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마리아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비록 문제를 당하여 울었으나 그의 믿음으로 주님이 나의 문제를 찾게 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마리아와는 달리 마르다와 같이 현재적인 믿음이 아니라 미래적인 믿음 곧 현실성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입으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주님의 부활도 믿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또 마르다를 위로하러 왔던 많은 유대인들과 같이 남의 문제를 가지고 울어는 주지만 자기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와같은 불신자들인 유대인들이 믿는 가정의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일로 인하여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을 믿는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 다른 주의 제자들의 믿음이 더하기 때문에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154.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