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하시병과 부흥의 실마리

 

이번 여름전도여행은 지난해보다 조금 많은 인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지역 다른 교회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듬성 듬성 보였다. 폭염으로 인하여 밤에만 전도를 나가기로 하고 낮에는 말씀과 대별로 개인간증을 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도 가지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부흥의 실마리를 볼 수 있는 전도여행이 되었다.

이전에는 전도를 배워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여름전도여행에 많이 참석을 했었다. 그러면서 전도도 부담이 될뿐더러 전도도 아니되고 회개와 죄를 자백하는 것은 더욱더 부담이 되어서 각 사람이 큰 갈등 가운데서 그기간이 지나가고 그리고 가지고 왔던 죄짐을 또 다시 집으로 가져가는 모습들을 허다하게 보았다. 그리고 전체 모임이나 기도회에서는 은혜를 받고도 대장모임에서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고통들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주님은 연약한 인도자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로 바꾸어 주시는 은혜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시간들이 전체 모임으로 되었고 전체 모임중에 말씀을 주시고 영안을 열어주시는 은혜가 있었으며 전도를 나갈 때에 기도제목 하나 하나까지 소름이 끼치도록 주님이 직접 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주님은 나에게 미리 이번에 여름전도여행 참석자들에게 질문할 것을 준비시켜 주셨다. 첫시간에 말씀을 전하면서 회중들에게 주님이 시키신 대로 물어 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들의 믿음을 되돌아 볼 때에 말씀에는 몇 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10점이나 될까?”라는 쥐 죽은 듯이 하는 소리들이 여기 저기서 흘러 나왔다. 수우미양가로 매기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모두가 다 당당하게 라고 대답을 했다. 거기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도 자신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기도는 점수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었더니 그것도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전도에 대해서는 물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사실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한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는 거의 모두가 스스로 자조적인 웃음들을 웃고 있었다.

실상을 말하자면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사는 것도 아니요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의 믿음도 아니고 처음 사랑안에 거하는 것도 아니며 죄를 이기는 생활도 살지 못하면서 자기가 받은 구원을 남에게 전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증거하기에는 생활도 자신이 없고 그러다 보니 구원의 즐거움이나 구원의 확신조차도 결핍된 상태에서 자기가 얻은 생명의 확신도 가지지 못하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인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이시대에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 확신이 없는 모습임은 부인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그들은 교회생활을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사람들과의 상식적인 기준에 맞추어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그것이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무지가운데서 살고 있다.

첫시간에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는 이사야서 13절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전반적으로 말씀을 전한 후에 개도 주인을 잃어버리면 주인을 잃어버린 그 자리로 가서 꼼짝하지 않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리고도 주님을 잃어버린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악함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다.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최후의 자리가 어디인가? 주님의 얼굴을 뵈었던 마지막 자리가 어디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최종적인 곳이 어디인가? 그렇게 질문을 하면서 잃어버린 주님을 다시 찾지 아니하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기도제목을 주면서 다같이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에 전하여 준 아람의 군대장관의 말씀이 참석자들의 영혼의 급소를 찌르는 역사로 나타났다. 엘리사가 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는지와 나아만은 자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잠그라는 말이 사람인 엘리사의 말인 줄 알고 노하여 물러갔다가 종들의 간함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함으로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 엘리사를 다시 찾아 오는 이방나라의 장군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다.

 

(왕하 5: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엘리사가 예물받기를 거절하자 노새 두바리에 싫을 흙을 가져가게 허락을 해달라고 하면서 평생에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을 한다.

 

(왕하 5: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앞으로 피치 못하여 짓게 될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을 구한다.

 

(왕하 5: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대에 엘리사는 그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고 명함으로 그가 구한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앞으로 지을죄까지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주어 보낸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인 모르게 나아만을 따라가서 거짓말을 함으로 은과 의복을 받아 온다. 그가 불의한 죄를 지은 것을 아는 엘리사는 그에게 묻기를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지만 그는 딱 잡아떼며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다.

 

(왕하 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하여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들어 그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겠다고 저주를 받는다. 이방인인 나아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문둥병도 고치고 구원도 받고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사유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으나 엘리사의 종자인 게하시는 자기가 당장에 지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스스로 죄를 감추고 회개하지 않고 죄용서받기를 구하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아 패가망신하였다.

 

전도여행을 온 사람들로 가득한 그 자리에나 또 온세상의 교회마다 오늘날 게하시와 같이 지은죄를 용서받지 못함으로 영혼에 문둥병이 걸려서 회개할 줄 모르고 죄사함 받을 줄을 몰라서 영적인 문둥병자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회개할 줄 모르고 일상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을 줄 모르는 게하시병을 고치시는 은혜가 급속히 그 자리에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게하시병은 회개를 거부하는 병이다. 게하시병은 회개를 할 줄 모르는 병이다. 게하시병은 회개하는 믿음을 배우지 못한 병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이 온전하지 못하고 은혜를 자주 상실하며 회복하지 못하고 그 영혼이 깊은 수렁에 빠져서 건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이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전도를 못하는 병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이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자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때문에 앞으로도 죄를 짓는 생활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하나님이 용서하심을 믿고 용서해주실 것을 간절히 구했다.

그러나 게하시와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며 육신으로 죄를 안 짓고자 노력을 하지만 그 역시 연약한 육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죄를 안 짓는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믿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시인하면 큰일이 나는 것은 그들의 율법을 믿는 믿음이 다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유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며 인간의 의지와 열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가 없다고 감히 말하고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를 서슴치 아니하며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는 것을 경멸하고 히스테리칼하게 그것을 금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를 믿을 때에 한 번 회개했으면 됐지 무슨 회개를 계속하느냐고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회개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해서 죄를 짓고 회개를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회막으로 나가서 제사장에게 죄를 고하고 어린양의 피로서 속죄를 하라고 가르친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킨 것이 아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지 못해서 속죄의 제사를 날마다 또 때마다 드렸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유월절 어린양을 믿음으로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 때의 일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을 간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여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 그렇다면 주와 함께 있을 때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한 그들의 믿음은 어디로 가는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대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네 형제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말한 것인가? 하루 일곱 번이라도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는 말씀이 불신자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씀인가? 형제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 말씀들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는 날마다 죄를 안 짓고 사는가? 그렇다면 교회안에 죄를 안 짓는 거룩한 사람들만 있는데 왜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교회안에 있는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함을 받고 있는가?

 

주님은 이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제자들을 보전(保全)해 주실 것을 구했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하시고 지키셨다. 이제 주님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심과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주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주신 은혜는 보전의 은혜이다. 보전은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make whole”이다. 그 말은 손상을 전제로 한 말이다. 죄를 지음으로 영혼이 더러워 졌을 때에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하여 회복을 시켜 주시는 것이 보전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죄를 짓는다.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죄를 짓는다. 내가 원치 않아도 세상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온다. 그래서 죄를 짓는다.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죄가 눈보다 더희어졌네는 예수를 믿기 전의 죄가 아니라 예수믿고 나서 날마다 짓는 죄를 말한다. 그것은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고나서는 죄를 깨닫는 것이나 회개하는 것이나 용서받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지어도 죄인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 전에는 회개할줄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지어도 용서받지도 못한다.

예수믿기 전에는 죄를 지으면 또 다시 되풀이하여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지은 죄로 인하여 상응하는 댓가로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나서는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

예수를 믿으면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

예수 믿고 나면 죄를 짓고도 무엇이 죄인줄도 모르지만 죄를 알게 해저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같은 죄를 안짓게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

예수를 믿게 되면 내가 죄를 지을 때에 그죄의 값을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갚아주신 사실을 믿는다.

 

그러므로 회개를 부인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성적인 게하시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 병에 걸리면 구원의 확신도 없어진다. 구원의 즐거움은 물론이다. 자신의 영혼이 정결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성경을 읽는 것도 꺼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기도를 해봐야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안되면 지금 나의 생활속에 안계시는 하나님을 누구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실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기를 꺼리고 전도를 안 하다 못해 전도를 훼방하고 반대하는 일들을 벌이는 것이다. 이와같은 것을 도표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구원의 확신 사죄함의 확신 생활의 확신 증거의 확신

 

생활의 확신은 주님과 함께 사는 확신이요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도와 주심의 확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생활의 확신이다. 승리생활의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그의 생활속에 있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증인의 삶을 살고 에수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함으로 권하며 전도할 수 있다.

그런데 생활의 확신은 날마다 짓는 죄를 주님께 자복하고 용서를 받아 영혼의 청결을 유지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죄사함의 확신이다. 죄사함의 확신이 없이 일상에서 자신의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자기가 받은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리고 구원의 즐거움도 없어지고 사라짐으로 아무런 기쁨이 없는 종교생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지을 때마다 그 죄를 사함받고 용서받는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만 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죄많은 세상에서 더럽혀지기 쉬운 우리의 영혼이 죄를 지을 때마다 즉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게 함으로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죄짓기 전의 상태로 돌려 주신다. 그것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어린양의 피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피없이는 존립도 유지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시며 구하신 보전의 은혜이다. 사실 어느 기계나 전자제품이나 또는 자동차나 구입을 했으나 자꾸 고장이 나고 쓸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수리를 해야 하고 수리를 맡겨도 AS가 안되면 그것을 산 것을 후회하게 된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자기의 영혼이 죄를 짓고 또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때 그 때 그 때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혼이 회복되는 보전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구원받은 사실을 의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말씀을 보고 깨닫고 순종하며 기도하여 응답과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면서 옛날에 선교사님과 함께 교제할 때에 들었던 단어가 생각이 났다. “AMEND”라는 단어인데 고장난 것을 고치고 수리한다는 뜻이다. 그선교사님은 그 때에 나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수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은 빌딩이나 기계나 수선유지비라는 예산을 책정을 해서 운용한다. 고장 날 때에 그것을 고치고 고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어리석은 인간들도 무엇이 고장 나면 고치고 수리하고 그것은 정상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하고 돈을 쓰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이세상에서 연약하여 죄를 짓고 넘어질 때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죄를 짓는 연약한 믿음을 고치시고 처음 구원받았을 때의 영혼의 최상상태를 유지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안에 그가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계시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를 보전하시는 은혜 곧 수선유지하시는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다.

 

사실상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사라지고 전도도 하지 못하는 영적인 불구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여름 전도여행을 하면서 주님이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각사람이 게하시의 병에서 벗어나서 지은죄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나아만장군이 받았던 사죄함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 각사람의 영혼이 소생하고 각각의 영혼이 소생하면 그들이 속한 가정마다 주님이 함께 계시고 다스리시는 부흥이 오고 그런 이들이 속한 교회에 부흥이 오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부흥은 모여서 집회를 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속에서 크고 작은 죄를 지을 때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의지함으로 죄사함을 받는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순간 순간을 주님과 함께 살고 동행 할 때에 부흥이 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더러워진 영혼을 씻김받지 못하여 주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한 생각이 들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도 없는 불신자같은 이들로 가득히 채워진 교회같지 않은 교회들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가? 예수를 믿어도 가정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없이 율법주의자들의 정죄가 가득하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 가정은 얼마나 많은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당신 한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한사람이 일상에서 날마다 짓는 죄를 주님의 은혜로 씻김받아 거룩한 영혼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살기 시작할 때에 그사람의 영혼도 살고 가정도 살며 교회도 살아나고 그로 인하여 이세상에 갈길을 잃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도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부흥이 각사람속에 일어나도록 각각 간절한 기도로 부르짖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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