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서로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만 아니 봐도 보고싶어지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이 사랑을 해도 서로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정리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보다 더 한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같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매주일 정한 시간에 한달에 몇번씩 해치워버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예배속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이 분명한 것이 예배입니다.

에배속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마다 교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다 한가지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같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생활속에 주안에 거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은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든 이틀이든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금방 예배가 습관이 되고 형식이 됩니다.

그것이 외식하는 예배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현현하심의 간증이 없고 생활의 열매가 없으면 주님을 높이고 경배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높일 이유가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거짓말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높일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주님을 높일 이유가 없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도 거짓말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예배에 주님의 나타나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는 것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떨어져 있을때에 주님을 열심으로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피차에 어떻게 주님과 함께 살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만큼 보고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보고싶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안에 내가 한주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만일 서로 떨어져 있을 때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서로 모래알처럼 따로 노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보고싶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도 보고싶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보고싶지 않은 것정도가 아니라 보기에 역겨운 사람들을 매일 보아야 한다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은 자기 영혼에 유익이 없고 고통이 됩니다.


교회안에 혹시 내가 보고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난다면 그사람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내가 잘못된 사람이든지 둘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떨어져 있을 때에 생각이 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떨어져 있을 때에 별로 보고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사랑이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사랑이 없어도 모일수 있는 종교단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랑이 없어진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어도 죽은 교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교인은 많지만 향제 자매는 찾아 볼수 없는 교회들이 이땅에 수두룩합니다.

설교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설교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는 예배는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니님의 나타나심과 현현하심이 없으면 그것은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배의 필수적인 요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예배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자기마음의 암시와 최면을 거는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즐겁게 하는 찬송을 부르는 것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부르는 찬송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향하여 찬송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찬송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지 예배를 위해서 찬송을 하는 일도 많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먼저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가 날마다 짓는 죄를 속죄하는 은혜입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거룩한 영혼으로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기 시작하면 사랑할수 있는 사람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수록 기억속에 희미해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오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행하시는 이와같은 진노의 재앙의 때에 경건한 형제와 자매들은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부르짖을 때에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새벽에 코로나 안부를 묻기 위해 통화한 미국의 어느 사모님은 사회적인 거리두기의 시간이 너무나 즐거운 것은 바울의 아라비아의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꼭 삼년이 아니라도 얼마를 주님이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아라비아의 시간을 가지면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보고싶은 사랑을 꾹 꾹 눌러 담았다가 피차에 얼굴을 대면할 때에 폭발적인 성도의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아멘!!! 



(*.154.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