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작

 

이십여 년 전에 전도훈련을 하면서 집회 중에 거듭나는 일들이 몰수히 일어나고 훈련받은 사람들이 도시마다 전도를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일이 어떻게 될까하는 기대감에 협회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이런 저런 질문을 할 때에 우리의 사역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한말이 아니라 전도를 하는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곧 주님의 역사라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인식 때문이었다.

또 훈련을 받은 이들은 훈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기운에 전도를 했지만 내가 전도를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자기들의 내면에 은혜를 상실하여 전도를 하지 못하고 또 타락한 교회의 현실 속에서 전도를 훼방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일식간에 전도할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는 믿음의 토양이 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옛날에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열심히 주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갔던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7:11-13)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 자신을 은휘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19:38)

 

그들 중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서 그 집에 부딪힐 때에 무너짐이 심한 그런 믿음이 아닌 믿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6-27)

 

그러나 나는 전도부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이십삼 년 동안을 예수를 믿는 성도인척하고 살았던 생명이 없는 종교인에게 어느 날 주님이 찾아 오셔서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고 일 년 육 개월을 세상과 끊고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성경을 읽고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깨달아지고 그리고 한 말씀씩 순종함으로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배워서 직장에서도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통해 열매를 맺다가, 사람의 칭찬과 눈에 맞추어 사는 종교적이고 인본적인 교회의 환경 속에 차츰 익숙해지려는 찰나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시고, 죽음 앞에서 주님과 계산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그런 교회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장에 그다음 주일부터 다친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서 전도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조차 전도를 싫어하는 종교인들의 핍박을 무수히 받으면서 축호전도와 노방전도 그리고 여름전도여행을 하게 되어 목회자 전도훈련과 제직전도훈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열매를 맺는, 전도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거듭나자마자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아서 주안에 거하는 생활부터 배운 것이다.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일들이 나타났다.

오늘날의 교회는 전도에 관한한 거꾸로 접근을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종교인들로 가득한 교회로 전락하게 된 주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붙어있지 못한 가지가 말라비틀어지면서도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지 못하여 주 안에 거하지 못하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를 열망하고 주 안에 거하지만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도록 농부 되신 아버지가 날마다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지 않은 더러운 가지들이 전도를 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은 비단 전도만이 아니라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설교나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성경공부는 하지만 한 말씀도 순종하지 못하는 머리로 들어가는 지식만 취하는 것들, 그래서 교회 안에서만 예수 믿는 사람들처럼 위장을 하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과 언행심사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주와 동행하는 주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노아의 교회에서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6:9)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행하는 생활을 명령하신다.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1)

 

내안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나와 동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안에 거하라는 말씀보다는 조금 못한 것이며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심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7:11)

 

이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받아서 성령을 물 붓듯이 쏟아 부어 주심으로 이 땅에 주와 동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하나가 된 성도들이 예수의 권세로 세상을 정복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그림자와 모형에 지나지 않던 구약교회가 주와 하나가 된 성도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이 된 것이다. 교회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하고 사는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열매가 항상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내가 하는 말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 교회를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면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고 근신함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일보다는 자기의 심령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일갈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6:24-25)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자기를 속이는 칭찬에 속지말라고 경고하신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26)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7)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7)

 

요한의 때에 교회는 채 일백 년도 되지 못하여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요한 계시록의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 요한은 95년경 계시를 받기 전에 처음부터 들은 것을 잃어버린 병든 교회에 처음부터 들은 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하여 요한복음과 서신서를 89년부터 93년 어간에 기록을 한다.

 

며칠 전에 사석에서 어느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다.

요한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이지요?”

그 목사님은 전도를 하는 분이기 때문에 당장에 이러한 대답이 나왔다.

복음이지요.”

그게 아니예요.”

그는 순간 어리둥절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일 3:11)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

그건 그냥 머릿속에 있고 입술에 있는 복음일 뿐이지요.”

……

생각은 하지만 행함이 없는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요한은 교회가 영지주의자들로 들끓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아는 것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바울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다.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행함이 없는 그런 것들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귀신도 그런 믿음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9-20)

 

야고보 장로는 이 말씀을 하기 전에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4-17)

 

사랑이 없는 복음, 사랑이 없는 믿음이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의 영이요,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지금도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고 여전히 경건치 않은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구원이라면 17장에 할례의 언약을 받은 것이 교회생활의 시작이다. 그리고 22장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케다는 비로소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이다.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은 그들을 삼년반 동안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사람을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안에 거하는 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그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가르치심에 일일이 순종하여 성령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각 사람이 성령으로 살 때에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게 되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고 거처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주님의 성령론이다.

그러나 이 귀한 주님의 성령론도 종말론의 폐해 속에 지워져 버리다시피 한 것이 지나간 이천년의 연약한 신학의 모습이다.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예외 없이 14장에서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처소를 천당으로, “내가 다시와서는 재림이라는 고정관념에 파묻혀서 이 세장의 성령론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을 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본다. 그래도 비교적 건전하다고 생각되는 매튜 헨리조차도 이것을 주님의 재림으로 연결해서 해석을 하는데 이는 얼토당토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문맥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주의 말씀으로 보나 주님이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을 쓰신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19)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6:16)

 

그것은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그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7)

 

수많은 옛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바랬던 것과 같이 지극히 거룩한 곳에 기름부으심이 임하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씀하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부지한 사람들은 주안에 거하는 생활, 주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주시는 생활을 살지 못하여 열매가 없는 암울한 종교생활에 빠져 들어 간 것이다. 이것이 요한이 서신서에서 그렇게도 경고한 영지주의자들이 모습인 것이다.

 

지난해부터 주님은 주안에 거하는 생활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되는 생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다. 그러면서 지난 이십 년 동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밖으로 드러내 주시는 은혜가 임했다.

특히 이번에 있었던 훈련에서 간증 강사들을 전원을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슨 전도의 큰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생의 시작부터 잘못된 사람들이었다. 결혼도 잘못하고 아이도 잘못 기르고 가정도 엉망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이 잘못 살았던 것만 간증해도 큰 은혜입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간섭하심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같이 사는 식구들로부터 변화되었다는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초등학교 아들을 하나 두도록 정상적인 부부생활도 못하던 젊은 엄마이었는데 날마다 주님이 동행해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일마다 때마다 염려마 내가 해줄게하시면서 여러해 동안 주님이 차근차근히 고치시는 은혜를 간증하고 완악한 남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처가식구들에게 자기 아내가 많이 변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초등학교 아이가 부모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정서가 불안하고 산만했었는데 아이의 정서가 안정이 되고 엄마가 변하는 것만큼 변화되는 은혜도 받았다는 간증을 했다. 그런가하면 교육을 받기 위해 우연히 동행했던 몇 살 아래의 사람이 언니처럼 살고 싶다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으며, 아이 때문에 만난 혼술하는 세 사람의 어머니들에게 자기도 혼술했을 때의 심정을 고백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산다는 간증에 세 사람이 다 울고 감동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이십년이 가까운 결혼생활에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신혼 때는 주말부부요, 그러다가 별거해서 오랜 세월을 살고 이혼까지 하려는 중에 길에서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듣고 거듭났는데 그 후로부터 주님이 날마다 간섭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가운데 남편과 같이 살게 되고 그 남편이 여러해 동안 아내가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고 지난 가을에 교회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다가 어느 날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을 했는데 아내가 간증한다 해서 들으러 와서 주저앉아서 이틀을 은혜를 받고 마지막 날에는 일도 있는데 안 가고 말씀을 듣고는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큰 은혜가 임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다른 집사님은 이십여 년 전에 신혼 때에 전도훈련을 받고 이이들의 이름도 전 씨인 자신의 성을 따라서 전하리”, “전도해”, “전세계라고 붙이고 전도를 하다가 쉬고 있으면서도 때마다 은혜는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해마다 있는 제직훈련이나 여름행사에 빠지지 않았으나 은혜를 받으면 몇 갑절이나 악한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격렬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은혜를 받아도 즉시즉시 싸우고 하는 자기들의 모습이 하도 악하고 증오스러운 나머지 같이 죽자라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온 부엌칼날을 딸이 놀라서 손으로 잡고 피를 흘리는 일이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 자기들의 모습을 한하고 살았다. 이년 전에는 여름전도여행에서 전에 없는 은혜를 받고 돌아 와서 이틀 만에 큰 싸움을 하고 이렇게 살 바에는 인천대교에서 같이 빠져 죽자를 외치던 집사 부부였는데, 이번에 남편에게 간증을 하라는 말을 듣고 부인이 자기야 간증할 것 있어?”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딸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맞아, 2017년에는 아빠 엄마가 안 싸웠잖아라고 하는데 돌아보니 지난 한 해에는 싸움을 싸우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나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일 년 전에 어느 날도 아내가 막 대들며 험악한 말을 했는데 그날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그 아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가 임하면서 아내와 싸우는 일이 없어졌는데 그것은 어느날부터 인가 주님이 자기를 상대해주시기 시작하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동행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가출을 하던 큰아이가 보이지 않는 힘에 다스려지는 일이 일어나고 그 아이가 얼마 전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주님이 아이와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일이 신병교육대에서부터 일어나고 신병교육대에서 상관들에게 사랑을 받는 은혜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고물 사업을 하면서 매달 수입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에 시달렸는데 어느 날 집회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에 강단에서 나오는 말씀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다면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서라도 건져다가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마음속 깊숙이 들어오면서 그때부터는 물질걱정이 없어졌으며 그 믿음 그대로 주님은 항상 넉넉하게 채워 주신다는 간증을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집사님은 처가에서 아내가 귀신들렸다고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불 가운데 건져주심과 같이 건져 주시고 아이들을 낳고 아름다운 가정을 사는 은혜를 간증하기도 했다.

듣고 보니 하나같이 잘못된 인생, 잘못된 결혼, 잘못된 가정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평소에 내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악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고 또 훈련도 받아서 전도도 했지만 생활은 변함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과 방불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삶 속에 찾아 오셔서 세밀하게 손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일을, 어떤 이는 이십 년, 어떤 이는 십년 또 어떤 이는 오 년을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 무엇인지 주와 동행하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해준 간증들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전도 간증을 화려하게 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 존재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주시며 그들의 삶 속에 미세하게나마 날마다 일해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신 것이다.

이렇게 지난 번 훈련을 치루면서 나의 마음에 이전에 없던 빛이 비추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 주님이 오래전에 그렇게 아직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기다렸던 일이 이것이구나.”

이 일을 통해서 집회 때에 은혜를 받고 떠들썩하게 회개하고 요란하게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남들이 모르게 고쳐 오신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이것이 잘 알지도 못한 채 기다려 왔던 진정한 부흥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와 같은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생활이 변화된 사람들이 처처에 더러 더러 있음을 주님이 보여 주셨다. 지나간 오랜 세월동안을 주님은 그렇게 조용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은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 속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심을 따라 이렇게 조용히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나는 안변했는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배당을 크게 지은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방황을 하고 있는 내식구들의 영혼에는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다. 이제는 주님이 나와 동행해주시고 그 주님의 말씀을 한 말씀 한 말씀 순종하는 진정한 부흥을 사는 성도들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바꾸는 부흥이 일어날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 부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가장 조용하게 시작되고 진행되는 부흥이다. 이와 같은 부흥이 각사람 속에 일어나고 각 가정마다 일어나고 교회마다 일어나도록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요한이 그렇게도 간절하게 바랬던, 처음들은 복음인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고 성도마다 빠짐이 없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와 같은 내면적인 부흥이 한 사람 속에서 조용히 시작이 될 때이다.

 

(*.154.7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