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했던 목사님

 

우리 부부는 이전에 다니던 교회목사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모릅니다

 

일전에 어느 목사님으로 부터 그 말을 들은 나는 오히려 내가 놀라서 흠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되물었다.

 

목사님, 그분하고 식사라도 한 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럼 차라도 한잔 같이 하신 적은 있나요?”

아니요.”

그럼 그분하고 무슨 대화라도 해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그런 적도 없는 데요.”

그런데 그분의 무슨 면을 존경한다는 말입니까?”

……

 

그분의 말을 듣고 추리가 되는 것은 그냥 자기가 다니고 있는 큰 교회 목사를 멀리 있어서 알 수 없고 가까이 하지 못하는 신비감에 존경을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상호 피차에 알지 못하는 무지함으로부터 오는 존경이다.

그 존경하던 목사님이 자기들 부부의 결혼 주례를 섰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에는 그 담임 목사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고 싶고 기도부탁을 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으며 부교역자들이 앞장서서 가로막고 못 만나게 했다고 한다. 반면에 돈이 많은 부자들은 언제든지 쑥 쑥 들어가서 만나는 것을 보았는데 사업이 기울고 돈도 없는 자기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대적인 괴멸감을 맛보아야만 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그 목사님 부부에게 그 말을 듣고 그들이 존경했다는 목사님은 내가 오래전부터 잘 파악하고 있는 분이라고 말을 해주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목사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지만 이십년도 훨씬 넘은 옛날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때에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지방으로 교회집회인지 세미나인지를 인도하기 위해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지방으로 가고 있을 때이었다. 나는 성경책을 펴서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열차의 차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나를 보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한번 그러나 했더니 다음에 또 지나가면서 나를 보고 확연하게 비웃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 또 지나가면서 마치 나를 보라는 듯이 비웃으면서 지나가기에 내가 그분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보고 비웃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의 입에서 예의 그 목사님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그 목사님은 그때 당시에 기독교계통의 방송국에서 방송설교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분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요. 그놈 때문에 예수를 안 믿기로 한 사람입니다

……

그놈하고 나는 소위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이거든요. 동네에서 함께 자랐어요. 그리고 교회도 같이 다녔지요.”

……

 

나는 그분에게 아는 것이 없어서 난감한 마음으로 그냥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을 존경했다는 목사님 부부에게 그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감독이 되려면 믿지 않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디모데 전서 37절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분은 믿지 않는 자에게도 증거를 받지 못한 사람이예요.”

……

그런 사람들이 종교인으로서는 진짜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가짜인 경우가 확실하거든요.”

……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연약함으로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도 날마다 주를 닮아서 변화되는 인격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갓 자기를 따라오기 시작한 연약한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도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은 외모로는 완벽에 가깝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고 존경을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다 그를 멀리하고 경멸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교회에서는 몰라서 사람들이 존경을 하는데 가정에서나 동네에서 또 직장에서는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런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5-20)

 

나무를 열매로 아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증거이다.

만에 하나 나무는 속일 수 있어도 열매는 절대로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1-23)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해도 그들 중에 주님이 알지 못하는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 곧 불법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많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곧 가짜들이 많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같은 말씀을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그들의 출처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13:25-27)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말씀이고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가짜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1-2)

 

여기서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9)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니 주님이 어디로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사람만 꼴을 얻는다. 그들은 문이신 예수님 몰래 다 담을 넘어 온 자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너무나 잘 알았고 주님을 주여 주여하고 부르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지식일 뿐이다. 그들이 당한 비극의 핵심은 주님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조차도 알 수 없는 가짜들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높이고 칭찬하고 존경한다고들 법석대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신다.

 

예의 그 목사님은 큰 교단의 총회장도 지내면서 많은 잡음을 일으켰다는 말이 있으며 결국에는 그의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주님에게나 그의 몸 된 교회에 또 생각이 있는 우리에게나 참으로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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