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기도는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좋은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주의 뜻을 잘 분별해야 된다. 그 말은 제멋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주님의 뜻대로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의 뜻을 제쳐두고 제멋대로 또는 나름대로 그리고 사람을 따라서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아 영영한 수치가운데 들어갔는데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시대가 뒤숭숭해서 만 가지 이단들이 처처에 흉용한 시대도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지금처럼 교회안에 조차도 사마리아의 믿음으로 또는 종교인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함이 최고조에 달한 때도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일년내내 설교에서 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는 목사들도 적지 않으며 교회에서 죄를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으며 지옥을 말하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목사들도 부지기수이다. 강단에서 예수를 말하지 않고 아버지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말하는 목사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 더욱더 심한 것은 모든 하나님의 좋은 호칭을 묻어 버리고 그 분” “ 또는 지극히 높으신분으로 표현하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어느 목사의 지적과 같이 미국의 목사들은 한 주간 내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교인들을 만족 시키는 교회로 만드느냐에 마음이 더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목사들도 아니 전세계의 목사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뿐 아니라 불레셋 사람들과 같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 불신자들인 세상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나에 더 신경을 쓰며 세상사람들의 평판과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교회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교회가 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와같은 일은 어지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의 유다의 영적인 지도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가하면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주님을 가리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지폈다고 욕을 하기도 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대놓고 귀신이 들렸다” “사마리아 사람이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러니 그들은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진실하게 믿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들의 아비가 아브라함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고쳐서 말씀을 해 주셨다.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와같이 오늘날도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함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온갖 불의와 악행으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가리켜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라고 하신 책망이 오늘날에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멀리 가 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연말마다 드려지는 송구영신예배만 하더라도 우리의 어렸을 적이나 젊었을 적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슬그머니 교회안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송구영신이라는 말도 세상으로부터 온 말이며 그것은 성경의 진리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세상은 옛것이 가면 새것이 온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의 말과 같이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새것이라고 해야 죄인인 인간은 그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재주밖에는 없다.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낡은 것은 헛된 것이라고 전도서는 시작부터 말한다.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늘도 땅도 만물도 다 새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해를 보냄으로 무엇인가 새로움을 찾으려는 것은 영생이 없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죄인들이 해마다 치루는 일이지만 여전히 송구(送舊)가 안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서 새 피조물이 되는 영신(迎新)이 되면 옛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보내 버리신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을 체험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교회는 송구가 필요 없는 것이며 영신도 주안에서 다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주를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송구영신을 머리로 생각만 하는 불구자들인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이 일어나야하는 것을 의식으로 알고 있지만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생각으로만 송구영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은 그것이 더 무식한 일이 되는 것은 생각도 아니고 느낌이나 기분으로만 송구영신을 하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자들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82:5)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그러나 송구영신예배가 교회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문제는 이방인들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교회안에서 버젖이 행하여 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빠진 송구영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세상사람들 조차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예수인지 산타인지 헷갈리게 만든 마귀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1, 예배는 복을 받는 도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대한 오류는 예배는 복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인가?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 기본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알지 못하는 신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모세는 마귀에게 제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바울도 귀신에게 하는 제사는 이방인들이나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다.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를 의심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받지 못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앞에 간구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을 했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대상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 예배를 드리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년도 000초에 예배를 드리느냐가 하나님에게 받으심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정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는 예배이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산제사는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산제물이다. 이 말씀은 날마다의 생활을 예배로 드리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영적인 예배라는 말이다.

2. 영적인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다.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은 푸뉴마로 성령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은 알레데이아로 진리를 말한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아는 지식의 정도가 있어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육체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상대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 없는 육체는 상대하시지 않는다. 상대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앞에서 진노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육체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무서운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오는 것이다.

또한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지식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과 상대된다.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며 진리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지식은 순종할 필요가 없지만 진리는 순종하는 것이다. 지식은 그것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되지만 진리는 반드시 따라서 살아야 한다.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진리를 믿음으로 순종하는 영적인 생활이 있는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고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며 그 하나님을 알고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몸만 교회안에 앉아 있고 마음은 세상에 가있는 사람의 예배나 교회안에서 하나님이나 예배나 모든 것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방법과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육체의 복을 받기 위하여 그것을 목적을 삼아서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는 우상숭배이며 그것은 자기의 정욕과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예배이다.

많은 목사님들이 말하는 것이지만 안수기도를 하고 싶지 않아도 교인이 원해서 해줄 때가 있고 교인들이 원해서 예배의 형식을 바꿀때도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교회에서 안드리면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우리 목사님은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가라는 교인들의 의구심 때문에 마지 못해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일도 있었다.

또 그와같은 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헌금을 거두려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미신보다도 더 악한 일이며 무당들의 수준에서나 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패역하고 악한 일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거들떠도 보지 아니하신다. 거들떠 보지만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노하신다.

교회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주변의 교회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가히 그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교인들에게 복을 준다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복권판매업자인것처럼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과 말씀뽑기인지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운거리로 전락을 시키고 송구영신때에 헌금봉투에 소원을 기록해 주면 그것을 가지고 담임목사가 일년내내 기도를 해주겠다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 이는 거의 사기꾼수준이라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느 진실한 목사는 일년내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기록된 기도의 제목이 자기의 소원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에 본 것이지만 강단에 교인들이 송구영신예배때 낸 헌금봉투가 쌓여 있었는데 봉투만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먼지도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교회 목사님이 과연 날마다 교인들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고 해도 문제인 것은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거절하시고 아니 받으시기 때문이다.

 

3. 기도는

 

기도는 내욕심을 채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그것들은 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기도이며 기도는 성령을 구하는 것이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으로 사는 생활 곧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살면 무엇이든지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고 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먼저 성령을 받아서 주안에 거하면 그 결과로 말씀이 내안에 거하게 되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응답을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도 일으킨다.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게 말씀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신속한 것이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4.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함

 

날마다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사는 것은 내가 무엇을 구해야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그것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아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성령이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성령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구하시는 지에 민감한 사람은 동일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한다. 그것이 응답을 받는 기도의 비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신 다고 한 것이다.

 

(6:32)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사도의 권면을 진실함으로 받을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앞에 구해야 할 것이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자기 몸을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아버지께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

 

1)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다.

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말씀에 순종할 때에 연말연시가 진리로 밝아지는 것이다.

연말연시만이 아니라 날마다 날이 지고 뜰때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을 사는 은혜를 받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욕과 욕심으로 어지러운 연말 연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나님을 나에게 가까이 하려는 시험에 빠지지말라.


그것이 우상숭배사상의 핵심이다.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은혜를 구하고 받자.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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