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착한 행실인가


나는 가끔 목사님들에게 수수께끼 형식의 숙제를 내곤 한다. 주님이 특별히 영감을 주시면 숙제를 내는데 어제는 마태복음 514절부터 16절까지의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에 관한 말씀이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 중에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과 같이 비추이는 착한 행실곧 사람들이 주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인 것을 이방사람들이 알아보는 착한 행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내가 숙제를 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이 방금 주신 영감을 가지고 물어보기 때문에 틀린 답을 내놓기가 부끄러워서 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때는 지금까지 나온 것으로 답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지금까지 나온 지식이라면 내가 왜 물어 보겠습니까?”라고 핀잔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 그런 줄 알지만 마음이 급하고 용감한 몇 분들은 되지도 않는 답을 열심히 낸다. 그 이유는 그 답을 빨리 알고 싶어서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도 몇 분들이 즉시 답을 보내 왔다. 제일먼저 답을 내신 어떤 분은 주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다가 갈라디아서 220절의 말씀을 가지고 내가 죽고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일하시는 순종하는 생활이라고 고쳐서 답을 했다. 어떤 분은 예수의 말과 인격을 보이는 것이라는 답도 있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모습이 들어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답을 했다.

 

예수 본삼아 본받은 예수닮은 행실 말씀이 육신이 되신것처럼 워킹바이블한 인격 즉 말씀대로 사는 인격 팔복이 살아지는 인격입니다

 

그리고 얼마 못되어서 십여분 후에 수정판이 도착을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금이 된 성도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인격에서 나온행실과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을 정복하는 에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행실입니다

 

그리고 또 십여분 후에 재 수정판이 도착을 했다.

 

결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인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와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증인의 행실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종합판이 도착을 했다. 위의 세 가지 글을 다시 실은 다음에 결론을 내리기를 이렇게 했다.

 

하나님의 행실입니다. 하나님이 하신행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받아 믿음으로 사는 행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너무 어렵습니다

“.....”

그때의 제자들은 방금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주님이 하신다면 다 도망가고 한사람도 남지 않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자들이 방금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정답을 알려 드렸다.

 

주님을 따라 가는 행실이 착한 행실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아직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말씀 외에는 제자들에게 달리 하신 말씀이 없었다.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착한 행실이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앞에 말한 목사님이 하신 말과 같은 말을 주님이 제자들에게 했다면 다 도망가고 한사람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주님을 따르는 일이 되는 것은 주님은 아무나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만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착한 행실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자기를 부르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반면에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착한 행실이요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악한 행실이다.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미지근한 마음과 게으른 행실로 주를 따라가는 미온적인 것은 역시 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구원받은 주의 제자가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따르거나 주님을 따르지만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속도가 나지 않고 게으르다면 차라리 안 믿는 불신자보다도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의무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자게에게 맡겨진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주님을 따른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무지몽매한 사람이다. 주의 제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후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 나를 따라오는 착한 행실은 그로 인하여 반드시 친구들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예수를 믿고 내가 변화된 것을 본 나의 옛 친구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어떤 친구는 나에게 이런말도 했다.

 

네가 예수를 안 믿었으면 벌써 자살을 했을지도 몰라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나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을 그 아이를 비롯하여서 나의 모든 친구들이 싫어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 친구들을 만나면 가치관도 틀리고 좋아하는 것도 틀리고 언어도 틀려서 만날 때마다 싸우고 헤어지곤 했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된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피차에 만나지 못하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따르는 주님을 그들은 믿지 않고 나와의 친구관계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십년 이십년만에 한번 연락하고 소문을 통해서 피차에 근황을 간간이 듣고는 있지만 그들은 내가 체험한 예수를 믿음으로 내게 일어난 주님이 은혜로 주신 인생역전을 아직도 좋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믿는 예수를 믿을 생각은 아주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내게 일어난 급격한 변화가 그들에게는 낯 설기도 하고 그런일이 자기들에게도 일어날 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들과 헤어진 이후에 내게 일어난 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속도가 현저하게 나타 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잡고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착한 행실은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나를 만나고 접촉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해내는 이유가 되었다.

주님은 나를 닮아서 완전해지라고 하지 않으셨다. 만일 처음부터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무식하고 연약한 제자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도망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나와 같이 연약한자에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말씀이다. 아기같이 어리고 힘도 없고 연약한 나에게는 그냥 따라오면 된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나의 마음에 안도와 평안을 주는 말씀인가? 죄에도 약하고 시험에도 자주 넘어지고 유혹에도 잘 넘어가는 나에게 주님은 죄를 절대로 지면 안된다” “시험에 빠지면 끝장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널 다시는 안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나를 따라 오너라 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실수하고 넘어지고 두려워하고 떨고 도망을 가도 그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신 것이다.

이은혜를 받고 사는 에드워드 호퍼 목사는 갈길을 모르는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는 생활을 이렇게 찬송했다.(통일찬송가 4213)

 

아기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 줍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 줍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 줍소서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아기와 같이 어린 우리들을 오래 참으심을 이렇게 말한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이 말씀은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슬픔과 좌절에 빠져서 사는 것은 자기의 인내가 구원인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인내가 구원이 아니다. 주님의 인내하심과 오래 참으심이 모든 악한 상태에서 나를 건져 내시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주님이 오래 참으심이 없으면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를 때까지 주님이 기다리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버리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나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부터 믿음의 장성한 사람이 될 때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을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우리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가지 주님이 무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가 연약하여 실패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를 하루에도 열 번 백번을 해도 주님을 따라가는 방향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주님이 다 고쳐 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고 다시 주님을 따르는 궤도로 회복시켜 주시는 책임이 주님에게 있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큰 변화가 아직은 없어도 진보도 아주 더디고 일보 진보 후에 이보를 후퇴하는 생활에 비참함과 참담함을 가지고 마음이 상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그런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가는 행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보기에도 착한 행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저희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지금도 세상 어느 구석에선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슬프고 지친 당신에게서 나오는 주님을 따르는 착한 행실을 비추이는 빛을 보고 싶어 하는 죄인 한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서 숨은 채로 숨을 죽이고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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