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기념하는 어리석음

어떤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로님 어느 세차장에서 만난 사람이 그러는데 자기를 부흥팀 팀장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1907년 평양부흥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영국웨일즈에서 대규모 집회를 한다고 그러는데 어떤거예요"

이제는 찬양팀의 이름도 부흥팀으로 바꾸는 것이 유행인가보다. 이름만 바꾼다고 부흥이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부흥을 기념한다고 교단마다 단체마다 떠들썩하는 소리들도 들려 온다. 부흥을 이벤트화하여 자신이 부흥을 아는 목사요 부흥을 말하는 자요 부흥에 앞서가는 남다른 목사라는 것과 그런 목회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애써 부각하려 하는 시도들은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당사자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고 엎드리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 영혼의 정결함과 그로인한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임을 믿는다.

물론 그와같은 사람들이 악한 마음으로 그런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알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행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대로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것보다는 100년전에 주님이 마음을 다해 거룩하게하신 이땅의 교회를 100년동안 우리가 더럽히고 그의 이름을 땅에 떨어지게 만들고  이방인들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한 죄를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이 더 우선되어야 하고 마땅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흥은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흥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요 죄를 깨닫는 것도 성령의 전권적인 역사요 우리의 행위를 아파하며 긍휼히 여겨 주심을 간구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지 인간의 마음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다짐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어린양의 피로서 정결케 하시는 것도 주님의 전권적인 역사이다. 그런면에서 "부흥이여 다시오라"라는 프랑카드나 세상축구장에 걸려 있던 문구와 비슷한 "Again 1907"을 되뇌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부흥의 개념자체를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성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면서 부흥을 기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을 이용해서 교회를 크게하려는 욕심에서 떠나지 않는한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하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부흥을 기다리는 것도 부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우리가 그아들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자신의 영혼과 주의 몸된 교회를 망쳐 놓고 더럽힌 장본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어디 감히 교만한 마음으로 부흥을 달라고 말하며 부흥이 무슨 삼일운동이나 광복절처럼 기념할 것으로 여기느냐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경멸히 여기는 죄이다. 우리는 에스라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앞에 떨어야 한다. 자기의 행위와 죄를 인해 종일토록 부들부들 떨어도 시원치 않은 죄인들이며 은혜를 받고도 그은혜를 죄로 갚은 악함을 통회하고 자복해야하는 것밖에는 없는 존재들이다. 주님이 그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것들은 다시 정결케 해주시도록 그의 자비와 불쌍히 여겨주심을 입을 닫고 참담한 심정으로 엎드리는 것이 오히려 맞는 행위가 될 것이다.
에스라가 백성들과 조상들의 죄를 아파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은 것을 기억하라.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스 9:5-7)

그러므로 부흥을 오리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흥을 오라고 할수 있는 심령이 되는 지를 하나님앞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부흥을 기념하는 자들은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과 같이 죄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선지자의 무덤을 쌓는 외식하는 죄에 들어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흥을 말함으로 자신의 죄와 불경함을 감추려는 어리석음과 거짓을 버리라.
    
나에게는 이땅의 거룩한 부흥을 오랫동안 기다려 오면서 부흥을 말하는 것도 부흥을 설교하는 것도 부흥에 관한 기록을 하고 글을 쓰는 것도 부흥을 경험하는 것과는 바꿀수 없는 것을 주님이 알게 해주셨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는 부흥을 경험했는데 누구는 부흥을 기념이나하는 값싼자리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누구는 부흥을 경험했는데 누구는 부흥을 노래하고만 있다면 그것도 허무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누구는 부흥을 경험했는데 누구는 부흥을 연구하고 책으로 쓰고 글로 쓰기만 한다면 물론 그것이 값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당사자에게 부흥이 임하지 않는다면 또한 헛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말며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거룩한 부흥이 오지 않는다면 적어도 주님이 그시대의 교회를 교인들과 사역자들을 돼지취급을 하는 것이며 개취급을 하는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이와같은 거룩한 부흥을 내영혼이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삶을 내몸이 살아보지 못함을 아파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오늘날의 교회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은 성경의 기록을 보아도 교회사를 보아도 거룩한 부흥은 그부흥을 기념할 때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기의 행실과 악함을 비췸을 받아 깨닫고 자기 죄를 아파할 때에 거룩한 부흥이 임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한 것이다. 미스바의 부흥이 느헤미야의 부흥이 에스라의 부흥이 히스기야나 요시야의 부흥이 무슨 부흥을 기념할 때에 일어났는가? 상고하여 보라.

나중에 주님앞에 갔을 때에 부흥을 경험하지는 못하고 기념이나하다 온 자신의 모습밖에 없을 때에 주님앞에서 그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정작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은 경험하지도 못하고 부흥을 노래하고 부흥을 기다리고 부흥을 말하고 강의 하고 설교하다가 주님앞에 가는 것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주님앞에 나왔던 서기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너에게서 멀지 않다"는 말만 듣고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나 문턱앞에 와있던 사람이나 불행하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만일 눈꼽만큼만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부흥을 기념하고 말하고 노래하는데에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행위를 조사하며 자기 죄를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무가 되 그 와 동행하며 사귀는 거룩함에 있는 것이다.

여러달전에 공원에 운동을 하러 갔을 때에 어느 키가큰 남자가 자기부인과 함께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허 저자를 만났네 저자를 만났어" 내가 쓴 책을 손에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20여년전에 같이 전도를 하던 장로님이었다. 외침전도를 먼저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전도여행을 갔다 와서는 침실까지도 거룩해져야한다는 고백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부부와 함께 공원에 있는 등나무 밑으로 가서 두시간이 가깝도록 교제를 했다.

"장로님이 20년전에 가르치신 거룩함의 말씀이 이제 새록 새록 떠오릅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요즈음 주님이 하루에도 수십번씩을 "거룩해져야 한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신단다. 죄로 더럽혀진 교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하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헤어졌다.

얼마전에 어느 집사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이번에 일이 잘되었는데 어렵게 어렵게 되어지는 가운데 주님이 세가지를 정리해 주셨다고 한다. 첫째는 텔레비전을 끊고 한참 자라나는 아들에게도 말씀을 읽어주는 가정이 되었으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신문을 안볼수 없는데 신문도 믿음으로 끊게 해주셨다고 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전심으로 주님께 향하는 거룩함을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더란다. 그리고 어느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얘 손가락 끝까지도 거룩해져야 한다."라고 하시기에 자기가 이메일에 들어오는 스팸메일을 열어보고 마음으로 눈으로 죄를 지은 것을 주님이 책망을 하시면서 그죄를 끊어주시는 은혜가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후로는 그런것들을 보아도 열어보고 싶은 마음조차 가지지 않게 하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어떤 집사님은 일년만에 만났는데 내가 근심하며 상담을 해주었던 것들은 교만함으로 듣지 않았었는데 지난 한해동안 일생의 그런 고통이 없을 정도로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힘든가운데서 평상시 장로님이 들려주시던 자기의 현실에 속한 말들을 주님이 생각 나게 해주시면서 달포전에 주님앞에 자기를 포기할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 했다. 이제는 사업이 방대하고 바쁘지만 아침 저녁으로 골방에서 몇시간씩 기도하는것과는 바꿀수가 없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하루종일 주님이 말씀하시고 음성을 들려 주시며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할수 없는 교착상태에 있던 사업이 다시 열려지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았다는 간증을 했다. 일년전에는 자기말만 하고 돈이야기만 하던 사람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님이 거룩한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있음을 실감한다는 말을 하고는 헤어졌다.  

요즈음에 만나는 사람들중에 이와같이 거룩한 생활을 살고 있는 실제적인 영적생활(real christian life)을 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을 본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그의 백성들을 그의 거룩함으로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 아직은 멀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의 일을 쉬지 않고 계심을 알수 있다.

지난해 제주도에 갔을 때에 아침운동을 하며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멀리 수평선에 큰배들을 보았다. 그배들은 움직이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얘 멀리 있는 배는 가고 있지만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 아직 부흥이 멀리 있기 때문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것처럼 보일수는 있어 그러나 지금도 나는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단다." 전날밤에 교회생활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상담을 하였던 터라 그주님의 음성이  심령 깊숙이 파고 들며 눈물이 났다.

부흥은 하나님의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기념할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는 요란함과 어리석고 천박한 행실, 방자함을 버리고 보다 영적으로 진중해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거룩한 부흥을 다소곳이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받을 거룩한 도구로 준비되어지기를 구하고 사모하는것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부흥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를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2-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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