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침과 문제해결의 비밀

부흥이 가까이 오면서 참으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무슨 부흥을 기념한다고 하는 자들의 준동과 부흥을 이벤트화 시키는 이들의 어리석음이라 하겠다. 어느 지방에서 집회를 할 때에 교회당에 크게 ‘1907 부흥이여 다시오라’는 프랑카드를 붙인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말씀을 전하는 중에 “글세 우리가 부흥을 오라 가라하는 것이 하나님앞에서 합당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옛적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게 해달라고 일사각오로 기도하고 매어 달리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고 자기의 죄를 아파하기를 독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아파하고 슬퍼했던 교회의 거룩함을 지극히 일부분이라도 안다면 부흥을 기념하는 정신없는 일이나 이벤트화하는 장사꾼같은 일들과 부흥을 오라고 부르는 진리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앞에서 부적절하고도 부끄러운 모습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리고 부흥이 가까이 오고 있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보면서 안타까운 사실은 그동안 진리를 지키고 지금껏 믿음을 지키며 핍박과 고난을 받아오던 신실한 종들이 진리를 떠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신실한 주의 종들이 병고와 생각지 못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악한자들은 더 악하여지고 강퍅한 이들은 더 강퍅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영적인 소경은 더 눈이 멀고 영적인 귀머거리는 더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말씀과 정반대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인들은 좁은 문을 쉬이 버리고 넒은 길로 몰려가고 있으며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함에 이의를 달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되었다. 영혼이나 영적인 것에 관심이 사라지고 정결함이나 거룩함의 개념이 전혀 없이 살고 있다. 예배도 신령함이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새벽이 가깝고 어둠이 깊을수록 교회안에 인간의 것들이 판을 치고 인간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세속이 교회안에 가득히 들어와 있으며 주님이 심지 않은 것을 교회안에 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다 뽑아 버릴 것들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현상들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두가 오히려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분한 마음을 불러일으킴으로 성령의 강력한 감동으로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역사한다.  

그가운데서도 병고를 당하는 신실한 종들이 주님앞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역사를 체험하고 병고침을 받으며 부흥을 하루속히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이다.

암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투병을 하는 종들 사모님과 전도자들, 교통사고로 큰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을 비롯해서 꼭 질병이 아니더라도 가정의 크고작은 문제들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목회가 안되고 전도가 안되는 것까지도 우리는 이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성경은 이유없는 어려움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잠 26:2)

우리는 히스기야의 고난을 통해 그가 어떻게 병고침을 받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히스기야를 말할 때마다 단지 그가 기도해서 병고침을 받고 그리고 십오년의 생명의 연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만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또 히스기야는 우리에게 그이상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문제해결을 믿음으로 받는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히스기야는 병고침을 받고 하나님을 찬송을 했다. 그의 찬송속에 비밀이 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생존 세계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사 38:10,11)

먼저 히스기야는 죽음을 아파하면서 이땅에서 주님의 임재를 다시 보지 못함에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주님과 함게 살고 영적생활을 했기 때문에 단지 육신이 죽는 아픔만을 가지는 일반사람들과 다른 것은 다시는 생존세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의 덧없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같이 나를 떠나 옮겼고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사 38:12,13)

그는 아무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하나님앞에서 육체가 아무것도 아님을 슬퍼했다.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승리를 맛보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와 그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주를 앙망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그의 육체의 생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영적인 아쉬움 때문에 일찍 죽음을 슬퍼하였던 것이었다.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그는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앙망했다. 육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앙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하는 것을 바라본것도 아니요 오직 고난 때문에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 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했는데 눈의 시력을 잃을 정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병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삭감이 될까봐 두려워하였고 건강할 때보다 주님을 더 앙망하고 바라보았다.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라는 말씀은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지나쳐서 이것이 나에게 눌림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혹시나 앙망하지 못할까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심령에 눌림이 되었다는 말이다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라는 말씀은 이와같은 질병과 곤고가운데서도 굽히거나 변하지 않고 더욱더 주님을 앙망하도록 도와 달라는 말이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사 38:15)

그는 자기에게 죽을 병이 임한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또 주님이 그렇게 되게하신 것임을 믿었다. 그래서 죽을 병이 들었어도 그는 주님을 신뢰했다. 그는 이전에 죽음의 고난에서 주님이 자신을 건져주심을 체험했으며 그보다도 더 큰 은혜는 영적사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 곧 육체의 질병에 일언반구 할말이 없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육체의 질병의 고통가운데서도 영혼의 아픔을 아파할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영혼을 아파했다.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을 아파했다. 영혼의 정결함과 거룩함으로 더 살지 못한 것을 아파했다. 그래서 그아픔으로 각근히 행하되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하나님앞에 말했다. 각근히라는 말은 하나님앞에 유연하고 부드럽게 행하겠다는 말이다. 연하고 부드러운 살과 같은 심령으로 살겠다는 자기 심령의 부흥을 구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죽음의 질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심령이 교만하여 지고 굳어진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 인가 뻣뻣하고 굳은 목으로 하나님앞에서 살았음을 깨달았다.

사랑의 하나님 날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난과 질병 그리고 아픔을 주시고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곧 우리의 교만함이다. 심령이 살짝이나마 굳어지고 눈꼽만치 티끌만큼이나마 주님을 멀리하여 무디어졌고 영적감각이 둔해질 정도로 높은 마음을 가지고 교만하여졌기 때문이다. 예배 한번을 드려도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혹시나 하나님이 안 만나주시면 어떻게하나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들어오던 그 연하고 부드러운 심령이 굳어지지 않았는가? 말씀한 구절에 찬송가 한소절에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던 연하고 부드러웠던 심령이 어느새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전도나 설교를 할 때에도 분반공부나 속회, 또는 구역을 인도할 때에도 주님이 혹시 나를 안써주시면 어쩌나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떨리는 심령으로 마음속으로 간구를 그치지 않았던 그심령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어느새 예배전문가가 되어 있고 설교전문가, 심방전문가, 전도전문가가 되고 성가대를 하고 봉사하고 교회일을 할 때에 습관을 좇아서 하는 시술자들이 되어있지는 아니한가? 주님의 권능과 역사로 주님을 등에 태웠던 어린 나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태우듯이 주님을 태우는 일에 습관이 되어버린 어미나귀와 같이 교만하고 굳은 심령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주님이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시고 쓰시지도 아니하는 전문가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사오니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히스기야는 이와같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종신토록 죽을 때까지 연하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온유한 심령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령의 생명도 마음을 졸이며 심령의 아픔을 가지고 각근히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에 있음을 말하면서 내심령이 살아야겠기에 그것이 하나님앞에서 모든 것이 우선하기 때문에 이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이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 주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단지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의 기도제목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기를 간구했다. 심령의 생명을 회복시켜주시기를 먼저 구했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임을 하나님앞에 고백했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병이 낫기를 원한다. 단지 육체의 건강만 회복하기를 염원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일에 일반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앞에 자기 영혼의 회복을 구했다. 병만 나아가지고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그의 원하고 구하는바가 아니었다. 언젠가 미국에서 의사인 장로들에게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여러분들이 환자들의 육신의 병만 고쳐주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들이 고침받은 육체를 가지고 또다시 죄를짓는 삶을 시작할 것이요 당신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건강해진 육체를 가지고 죄를 짓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에 마귀가 기뻐하는 대상이 될 것이요.”

질병가운데 있는 이들이 살기 위해 병이 낫기 위해서 하는 투쟁은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하다. 좋은 의사가 있다면 땅끝까지라도 찾아간다. 좋은 약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아까워하지 않고 사서 먹는다. 할수만 있으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병이 낫기를 원한다. 수술도 여러번 하기도 하고 자기의 몸을 파괴하고 부수는 듯한 항암치료도 받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와같은 일에 더 열심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와같은 육신의 생존욕구에 영적으로 살아 남고자하는 영적인 생존욕구가 앞선 사람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치료의 비밀이 있다. 영적으로 사람구실을 하고 영적으로 하나님에게 이전과같이 쓰임을 받고 영적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육신이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에 지나는 것과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다. 똑같은 원칙이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에도 있다. 이모든 것은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곧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의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사는 인격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의 의가 인격과 생활속에 나타나는 것이 영적인 생존욕구가 우선되는 기도가 되어야 육체에 속한 것은 거저 덤으로 주신다는 말씀이다. 수술하고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것보다 그것도 해야 되지만 그러나 말씀보고 기도하고 주님을 눈이 쇠하도록 바라보고 앙망하며 주님의 임재를 다시 찾지 못할까봐 영혼의 스트레스를 받고 압제를 받는 간절함이 하나님앞에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침받게 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심보다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하나님앞에 한사람구실을 하며 사람답게 살기를 간구하는 열심히 앞설때에 주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그는 죽을병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자기 영혼의 평강을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육체로는 크나큰 고통을 당해도 내영혼을 사랑하시고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기 위해 이와같은 죽을 병을 주신 것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질병을 주신 것은 주께서 그의 어린양의 피로써 정결케하신 나의 영혼을 더럽힌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에 그죄를 용서하시고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정결케 하시고 그죄를 등뒤로 던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유하시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정결함과 심령의 평안으로 하나님앞에 이전과 같이 사람답게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히스기야는 믿었다.

오늘날 이 믿음이 질병을 비롯한 크고 작은 모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오 주여 질병과 고난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오늘 이 시간에 이 믿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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