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교회음악을 찾아서

"예배분위기가 훨씬 좋아졌지요?"
"네"
교인들이 한사람도 빠짐이 없이 환한 얼굴로 대답을 하였다.

목사님이 병으로 수술하여 유고된 강단을 다섯주째 내려가서 예배를 인도한 결과 에배의 영적인 분위기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좋아 진 것이다.

예배시작부터 거룩하시고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임재가 체험되어지는 영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졌다. 묵도하면서부터 아니 에배전의 찬송가 연주부터 눈물이 고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찬송마다 기도마다 신앙고백도 성시교독도 감사와 은혜의 눈물로 이어졌다. 예배를 인도하는 나도 매주일 눈물이 없이는 강단에 설수 없었다. 다섯주만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예배시간에 시종을 눈물로 예배를 드리는 하나씩 둘씩 교인들이 늘어갔다.

사실 우리는 뜬금없는 복음성가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예배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도 모르고 무비판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백안시하고 우선 교인들이 좋아하고 청년들이 좋아하니까 복음성가들을 교회안에 들여와서 엄숙하고 장엄했던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을 막을수 없었던 교회안의 아름다웠던 영적인 분위기를 망쳐 놓고 시장바닥같이 어수선한 교회로 탈바꿈 된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 어디를 가나 여기저기서 복음성가의 홍수속에 묻혀있다.

뜨겁게 찬양을한다고 하지만 그열기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때로는 춤을 추고 노래하지만 그들의 영적상태나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이 하나님을 찬송할만한 상태가 아니며 춤을 추고 노래할만큼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승리생활을 하는 형편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수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생활을 떠나서는 있을수가 없으며 생활과 괴리된 찬송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이며 생활과 상관이 없는 예배나 기도도 다 하나님을 속이는 어리석고도 자기가 하는 것이 하나님앞에서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짓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필리핀의 어느시골교회에 갔을 때에 예배전에 여자 둘이 앞에 나와서  춤을추면 찬송인도를하고 있는데 복음성가를 가지고 온몸에 땀이 나도록 교회가 떠나가도록 앰프의 출력을 높여 놓고 힘쓰고 애써 찬양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얘 설교말씀을 바꾸어라"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대충 정리해서 설교시간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나누었는데 찬송을 하나님앞에 드림에 있어서 그이유가 있어야한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세가지 이유를 주님이 주셨는데 첫 번째는 구속의 찬송이요 둘쩨는 믿음으로 사는 승리생활로부터 오는 승전가로서의 찬송이요 셋째로는 장래의 승리와 소망을 바라보는 찬송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찬송하기 위해서는 구속함의 기쁨이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 것과 날마다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과 날마다 시간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장래의 소망이 있어야하는 것을 말했을 때에 찬송을 앞에서 인도하던 두여자가 각기 일어나서 울고 통곡을 하면서 자기마음에도 없고 생활에도 없는 찬송을 부름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형제들의 영혼을 더럽힌 사실을 아픔으로 고백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네팔에 갔을 때에 집회전에 기타를 치고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강단에 나가서 그들의 경함과 천박함 하나님앞에 진실하지 못함을 책망을 했다.  "여러분의 영적상태가 춤을 출상태입니까?"
"여러분의 심령이 교회의 모습이 가정의 모습이 이네팔이라는 마라의 교회현실이 그렇게 춤을 추고 즐거워할 상태입니까?"
"......"
일순 모두가 엄숙해졌다. 그리고 그다음 시간부터 조금이나마 진실해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회복하는 복을 주셨다.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찬양인도를 하기 위해 앰프와 스피카를 사달라고 나에게 왔을 때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쉽게 무조건 정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일을 도와주면서 내입을 통해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도사님 복음성가는 교인들의 마음을 띄움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고 찬송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는 것인데 첫부분에는 복음성가를 불러도 나중에 예배시작전에는 찬송가를 많이 부르는 것이 어때요"
"예 장로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말을 하고 돌아서면서 내마음속의 무릎이 저절로 쳐졌다.
"아 그렇구나 내안의 성령님이 복음성가를 그렇게 얺짠아하시고 불편해 하셨던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많은 교인들에게 "복음성가가 더 영적입이까? 찬송가가 더 영적입니까? 어느것이 더 영적입니까?"라고 물으면 지체없는 대답이 나오는데 그것은 물론 "찬송가가 더 영적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왜 교인들이 복음성가를 더 좋아할까요?"라고 물으면 묵묵부답이다. "그이유는 여러분들이 영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육적인 교인이라는 말이지요."라고 말을 하면 뷰그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만다.

사실 복음성가는 혼적인것이요 육적인 것이다. 교인들이 영적생활을 상실하고 생활속에 믿음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다 싶이 하면서 긍리찬송은 물론이고 회개찬송조차도 할수 없는 영적상태가 되면서 예배시간에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지조차도 못하는 영적 공허함가운데 들어 가면서 실감이 없이 힘없는 찬송을 입으로만 달싹거리는 어려운 예배분위기가 된 교회의 모습을 끌어올리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래서 복음성가는 인간중심의 가사고 스스로 위로하는 가사들이며 혼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자하는 가사들로 이어져 있으며 곡조도 슬프고 청승맞고 처량맞은 자기들의 패배의 삶과 죄를 짓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슬픔과 패배감을 달래주는 세상곡조로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개중에는 영적인것들도 있다하지만 그것은 거의 찾아볼수 없는 극소수일뿐이요 인간적이고 인본적이고 혼적인 것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인들은 아무리 그런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땀을 흘리고 불러도 때로는 감동에 눈물을 흘려도 성령이 주시는 영적인 감동과 눈물이라기 보다는 자기연민으로부터 나오는 자기가 너무나 불쌍해서 흘리는 혼적감동의 눈물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영적인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도 안부르면 교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도 복음성가를 선호하는데에 한몫을 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나마도 복음성가로 교인들을 띄워주지 않으면 침울하고 까라앉은 영적상태 곧 하나님이 없는 교회와 하나님이 없는 예배의 실체가 드러나는 좌절감과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복음성가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적인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는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안부를수가 없는 것이 복음성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또 청소년들은 찬송가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문화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세상문화에 가까운 복음성가가 더 친숙할것이라는 논리도 그와같이 복음성가만을 부르게 하는 일들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앰프스피카의 괭음속에서도 청소년들의 입술을 보면 그것조차도 부르지 않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왜그런가 그것은 그들의 삶이 찬송은 고사하고 노래조차도 부를수 없는 심령상태임을 발표하고 그것을 숨길수 없이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성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이 아니요 차라리 영적패배와 실체를 시인하고 그것이 거룩함을 상실한 죄과로부터 온것임을 회개하고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거룩함을 회복하고 그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인 생활이 우선 회복되면 그와같은 땀내나는 인간적인 헛수고같은 노력이 불필요한 그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로 성령으로 찬송을 부르는 살아있는 교회로 회복되는 것이 영적인 순서인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와같은 혼적인 노래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백성들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차라리 우상숭배찬양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되지 않을 것은 우상은 하나님을 상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곧바로 우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 항상 진노하셨다. 우상이 무엇인가 인간의 탐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육에 치우치고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죄에 빠지면 자연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제사가 지겨워지고 찬송이 예물을 드리는 것이 지겨워진다. 왜냐하면 심령 깊숙히 하나님이 아니받으신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백성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반드시 우상을 섬기는 일을 벌이게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인데 죄로인해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그의 자녀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방적인 종교행위에 빠지는 것이다. 예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인간중심의 일방적인 것들을 하나님이 받으실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일방적인 것은 악한 것이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요 진리를 저버리는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리를 왜곡하고 율법을 인본적으로 뜯어고치고 찬송을 자신에게 찔리고 아픔이 되는 것들을 거두어 치고 하나님이 없어도 스스로 위안할수 있는 가사와 곡조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성가의 시작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내내 이천년 교회사 내내 있어온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아론을 충동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 그대에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산에서 내려보낼 때에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뛰어 놀았다고 했다. 먹는것도 마시는 것도 뛰오 노는 것도 자기들을 위한 것이요 자기위안을 위한 것이라는데에 악함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배반이라고 말슴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내려오면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다.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7-19)

저들의 찬송은 떠드는 소리요 싸우는 소리같은 것이요 사람의 노래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받을수 없는 것들이었다. 여호수아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던 모세의말을빌리자면 하나님의 교회는 십자가군대기 때문에 항상 두가지 찬송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는 승리의 찬송이요 하나는 이기지 못했을 때에 부르짖는 회개찬송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드려지는 승리찬송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드려지는 회개의 찬송 두가지의 찬송이외에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이 부르고 인간중심의 찬송은 사람의 노래소리지 하나님이 받으실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다섯주를 돌아보면 그이전에도 주일낮에 예배를 설교하기 위해 몇 번 갔던적이 있었는데 그런분위기였던 것 같다. 예배전에 찬양단이 찬양을 인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첫주와 둘째주에는 자연히 찬양인도가 없어지고 내가 예배전에 찬송을 인도하고 예배를 시작했다. 복음성가는 물론 부르지 않았다.

셋째주에 목사님 딸이 반주를 했는데 너무나 도망가듯이 반주를 해서 천천히 반주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교회당에 들어오면 누가 들어와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 있는 영적인 분위기로 만들어가는데에 전심을 다해야함을 가르치고 예배당에서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금했다. 할말이 있으면 귓속말로 하게 했다. 그러면서 영적인 분위가 조금씩 잡히는 것을 볼수가 있었다.

그러는중에 넷째주에 갔을 때에 예배당에 들어서자 마자 반주자가 복음성가를 반주하고 있었고 몇몇 교인이 그것을 따라서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곡은 아주 관능적이고도 세상적인 곡조로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 흥분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중지를 시켰다. 예배가 시작이 되려면 아직도 3,40분정도 시간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있는 곳에서 반주자를 앉혀 놓고 교회음악을 말하기시작했다. 나는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문외한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드릴줄 알았기에 음악은 예배를 돕는 것이 되어야하지 에배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예배를 돕는 음악이 어떠해야 되는 것을 하나님 어느정도 가르쳐 주신 것들이 있었다.  

먼저 예배시작전에 찬송을 연주하는 것은 장엄하고 엄숙한 영적인 분위기를 창출해서 교인들로 세상에서 요란한 마음으로 살다와서 그마음을 진정시키고 추스르는데에 도움이 되는 곡을 연주해야되는 것을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송가 앞부분에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의 찬송을 연주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속도는 가급적 느리게하여 가사를 음미하게 하는 것과 연주를 할 때에 손가락으로 하지 말고 재능으로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연주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찬송을 간절히 부르면서 연주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27장을 연주하게 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위에 앉으신 주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없는 자비를 뭇천사 소리 모아서 늘찬송 드리네....."

그아이의 어머니인 사모님의 눈에서 금새눈물이 쏟아 졌다. 남자전도사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슴도 뭉클해지고 여기저기서 교인들의 얼굴이 상기되고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배를 시작했다 주님이 말씀으로 우리모두를 만나주시고 주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었다. 교인수는 얼마 안되었지만 예배내내 장엄한 분위기속에 마치 수백명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은혜가 임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밖에서 이와같은 영광과 위엄으로 살고 교회밖에서 생활이 예배가 되고 찬송이 되고 기도가 될 것을 가르치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것을 말했다. 교인들의 얼굴에 결연한 마음이 비추어 보였다.  

그다음주인 다섯째주 예배에도 동일한 영적인 감동이 이어지고 그에서 더해지는 은혜를 주님이 주셨다. 그리고 그옛날 하나님의 신실한 왕들이 유다에서 산당을 제하듯이 강단에서 복음성가책자들과 악보들을 없앨 것을 말하고 교회밖의 어지럽게 남들이 갖다 붙여놓은 포스타들도 뗄 것을 말하였다. 오직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게하는데에만 전심전력하고 그것을 방해하고 흐리는 것들을 배격하기로 하였다. 성도들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다같이 끄떡였다. 너무나 오랜만에 영적인 깊음의 예배의 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가까운 장래에 이땅의 모든 교회들이 복음성가와 인간의 노래로 어지럽혀지고 시끄러워지고 천박해진  예배로부터 벗어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수 있는 영적인 예배를 하루속히 회복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2-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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