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이신 예수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의 교회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인간중심의 교회였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버리고 인간의 유전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교회였으며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먼저 깨닫고 회개하기보다는 율법주의에 빠져서 교인들에게 행위를 강요하고 그것으로 정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이용을 해먹는 것이 일반이었던 교회형편이었다.

복의 개념이 육신적으로 변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제일먼저 영적인 축복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는데 산상팔복의 여덟가지 복이 전부가 영적인 축복임을 알수가 있다. 다윗이 말한바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복의 여덟가지를 주님은 서둘러서 말씀을 하셔야할 정도로 교회의 축복의 개념은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죄를 보는 눈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도덕적인눈으로 보는 죄관(罪觀)이 뒤틀려져 있었다. 주님의 눈은 죄인의 죄를 사해주시고 고쳐주시려는 의사의 눈이라면 저들의 눈은 죄를 발견하는대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매장시키려는 마귀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율법주의에 빠져서 육신의 행위를 중시하고 종교적인 행위를 강요하였으며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앞에서 자기의 의를 행하려는 관습이 팽배해 있었다.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도록 했으며 금식을 구제를 사람에게 보이도록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물질의 축복이 소중하고 그래서 보물을 땅에 쌓아놓는 삶을 살았으며 주님보다도 재물을 더 사랑하고 섬기고 살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하여 양식을 구하기 보다는 먼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고 그러다보니 날마다 걱정과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어떤가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의 모습이 이와같지 않은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먼저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어리석음과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애통하고 상한 심령을 하나님앞에서 항상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우리들의 믿음의 선진들의 삶임에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영혼을 씻는 경건생활의 개념조차도 교회안에서 사라진 악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와같은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어리석음과 미련함의 어두움이 온교회를 덮고 있다.

회개는 없어진지 오래고 성령의 역사도 사라졌다. 영감이 없는 교회를 인간적이고 혼적인 감동으로 대체하려는 감성적인 복음성가와 방송장비와 기계들과 악기들이 교회를 가득하게 채우고 있다. 이방제사에서나 볼수 있었던 바디라인이 다비치는 옷을 입고 나와서 춤을 추는 기이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영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귀신적인 분위기로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이 된 모습을 상실하고 세속의 것들이 교회안에 다 들어와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 같다.

교회안에 존경을 받는 인격이 상실되고 목사이며 장로이면서도 세상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중에 이르지 못하는 행실로 세인들의 손가락질과 비방의 대상이 되다 못해 저들로 저주를 받는 일들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아마도 어떤이는 나는 안그렇다고 항변을 할지 모른다. 그것 또한 어리석은 말임이 분명한 것은 내가 그렇고 안그렇고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되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나는 안그렇다고 하는 사람은 우리속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람이며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을 귀히 여기기보다는 자기의 명예를 앞세우는 가짜에 속한 사람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이 오셨을 때의 교회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인격이 교회안에 하나도 없었다. 세상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격 그의 행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기에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것을 세상사람들이 알아보는 인격 그래서 하늘에계신 아버지께 세상사람들이 영광을 돌리는 인격이 없었다. 오늘은 어떠한가 그러한 인격이 교회안에 있는가? 세상사람들에게 세상사람보다 더 존경을 받는 주를 닮은 인격이 교회안에 존재하는가?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참된 신앙생활을 제시하시면서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판을 하지 말고 자기의 죄를 볼 것을 주문하신다. 남의 죄를 보기보다는 자기의 죄를 먼저 보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가 깨끗함을 얻을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속의 들보와같은 엄청난죄들이 회개되어야한다. 그죄는 이전에는 티끌처럼 여기던 죄들이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에는 보지 못하던 죄들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심은 거룩함의 진보가 날마다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주님도 그사람을 개로 여기고 개취급을 하시기때문이라는 아픈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씀의 진리를 주시지 않는 사람은 돼지 취급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의 제자들도 개처럼 돼지처럼 대해야할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목사가 되고 개취급을 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로가 되고 돼지취급을 받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목사가 못되고 장로가 못되어도 거룩함을 주께 받아 살고 진리의 말슴을 날마다 들려주시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종일토록 성령을 구하고 종일토록 성령의 임재를 찾고 종일토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은 아침마다 권징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고 침을 삼킬동안에도 그눈을 나에게서 떼지 않고 나를 놓지 않으신다고 욥은 말하고 있다. 침을 삼키는 순간도 빠짐없이 성령을 구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살았는가? 그렇게 지금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은혜라도 주시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좁은문보다는 넓은 문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힘들고 어려운 신앙생활보다는 쉽고 사람들에게 박수와 칭찬을 받는 길을 더 택한다. 전도하는 것이 좁은문이라면 전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넓은 문이다. 회개함으로 날마다 자기의 영혼을 정결케 하고 세속으로부터 영혼의 더럽힘을받지 않고 사는 것이 좁은 문이라면 회개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이다. 칭찬을 받고 박수를 받는 것보다는 핍박을 받는 길이 좁은 길이다.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의를 행하는 것보다는 은밀히 하나님앞에서 행하는 것이 좁은 문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즐기는 것이 넓은 문이라면 그시간에 말슴을 보는 것은 어찌보면 재미없어 보이는 좁은 문이다.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향해 달려갈 때에 나홀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좁은 문이다. 남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때에 자기 영혼의 아픔을 가지고 각근히 행하는 것이 좁은 문이다.

그리고 참신앙생활은 거짓선지자들을 가려내고 그들을 삼가고 멀리하는 것이다. 말은 잘하지만 열매가 없는 이들을 가려내는 일을 해야 한다. 어떤이들은 가끔 내게 와서 잘못된 사람들에 대해 그사람도 말씀은 바르게 한다고 말하는 적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라 마귀도 말슴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미혹케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거짓선지자를 색별해내는 주님의 방법은 열매이다. 인격의 열매 일의 열매 전도의 열매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개처럼 여기고 돼지처럼 여기는 사람을 선지자 취급하는 혼란에 빠져서는 아니된다. 양의 탈을 썻다고 다 선지자가 아니다. 그속을 보아야 한다. 노략질을 하는 이리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있다. 헌금을 노략질하듯이 거두어 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을 다 알고 있지 아니한가? 그들의 열매가 무엇인지 보아야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당시의 타락한 교회의 지도자들도 말만 듣고 판단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그리고 참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한말씀 한말씀씩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반석위에 집을지은 믿음이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헛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믿음이 있는 것같은 모양은 있지만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소위 위기를 타파해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이와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반석위에 집을 지음과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개혁자이신 예수는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교회를 향해 이말씀을 하셨다. 이말슴은 오늘날의 우리의 교회에도 유효한 말씀이다. 이말씀으로 우리를 조사하고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주께로 돌아가는 부흥이 영적개혁이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 시늉만내던 연습이 아니라 이제는 실제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교회,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도가 되는 은혜를 주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이와같은 내용으로 마태복음 3권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권이 나올 때에 한국교회의 눈을 열어주고 깨우시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하고 열심있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eafj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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