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회개를 하고 전도를 했다. 그러나 돌이켜서 가만 생각을 해보면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나라가 아니었다. 교회를 하기 위해서 전도를 해야 했고 교회를 개척 해 놓고 또는 교회를 맡은 사람들이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야 하는데 신학교에서나 어디에서나 또 어느 누구나 전도를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교회도 커져야만 했고 작은 교회도 크기를 원했다. 그래서 전도훈련을 받고 전도를 해서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전국방방곡곡에서 모여 들었고 그들은 돌아가서 교인들을 또 훈련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방방곡곡에서 ‘예수천당’을 외치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이 전도가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지금은 지금시대에 맞는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발목의 힘줄을 다 끊어 놓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지 않아도 전도훈련만을 받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도 그 은혜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다시 끊었던 오락과 스포츠와 세속에 속한 것들과 텔레비전을 버렸던 사람들이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세상이 주는 것들을 즐기고 그것들을 향한 탐욕을 다시 키우는 일들을 다시 하면서 누가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전도를 할 수 없는 메마르고 완악한 심령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자극은 자극이고 변화는 변화이다. 자극을 가지고는 변화를 받을 수가 없다. 지속적인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가 아니고서는 변화될 수가 없고 변화되지 못한 심령이나 변화를 받지 못한 교회는 전도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거룩한 부흥이 와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뜬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에 힘을 쓰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얼굴이 삼삼하기만 할 뿐이며 그렇게 부흥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을 하던 그들이, 또 각 지역에서 집회를 할 때마다  한번만 불쌍히 여겨주시사 거룩한 부흥을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던 그들의 얼굴들이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 떠오르지만 그들도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전도가 문제가 아니고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문제라면서 남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이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설교하겠다고 수백 명씩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던 이들이 이제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속했다는 말씀을 알면서도 교단의 핍박을 피해서 최00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전도방법을 배우다가 그의 천박한 인격이 드러나고 구원파적인 교리상의 허점이 드러나고 ‘새벽기도로부터 자유하라.’, ‘전도로부터 자유하라.’는 외침에 영적으로 황폐화된 이들이 또다시 율법을 가르치는 윤아무개 목사나 전아무개목사 무슨 청교도니 하는 모임에 가서 능력을 받아 목회를 하겠다고 웅성거리는가 하면 이름도 다 잊어버렸지만 영성이니 왕권이니 새물결이니 두날개니 하는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자기들을 좇게 만드는 것들과 교회를 크게 하겠다는 탐욕을 따르게 하는 데에 빠져 미혹이 되어 진리의 길을 떠나 답답한 영적인 구렁텅이에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마치 열두해를 혈루병을 앓으며 많은 의사에게 고생만 하고 병도 못 고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해 버린 여인과 같은 이들도 있다.
그들이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가? 돈이 아닌가? 또 무엇인가 그 귀한 세월들이 아닌가? 목회가 아닌 목회를 하며 설교가 아닌 것을 설교하고 인위적이고 인본적인 노래를 부르며 어느 원로목사의 고백과 같이 자기들의 신앙이 바알신앙인 것이 명백하다고 탄식조차 하지 못하는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이들은 설교꺼리를 찾겠다고 지방교회에 가서 성경을 배우는 몇몇 성결교회 목사와 순복음 교회목사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목회인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어느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주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따라가고 있어”
“.......”
“조직을 따르고 있어”
“.......”
“조직을 따르는 것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야. 교단을 따르는 것도 사람과 조직을 따르는 것이지.”

교회는 주님을 위해 존재한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되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교단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교단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존재하고 교단이 교회위에 군림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반역하는 일이다.
저들은 조직의 생리를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저들은 조직을 끌고 가는 정치논리를 앞세우지 하나님나라의 법칙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조상들의 유전을 지킨 것이 조직을 끌고 가는 정치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유전으로 결국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죽이는 마귀의 도구들로 쓰임을 받는 슬픈 자리에 들어가고 만다. 
그러다 보니 저들을 끌고 가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서 목회를 하지만 결국은 주의 일을 하면서 사람의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성장주의는 그것대로 교회가 부자가 되려는 어리석은 정욕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목회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도 그게 아니다.
교회도 그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런 것들을 피해가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믿음이다. 부자가 되려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지는 것은 목회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다.
영혼을 위해 있는 교회가 교회를 위한다는 모토아래 영혼들을 죽이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도 할 수가 없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1,12).

의와 경건을 좇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믿음으로 살고 사랑하며 서로를 향하여 오래 참으며 자기를 향하여 인내하면서 온유함으로 말씀에 길들인 삶을 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그래서 영생을 취하는 것 곧 이 땅에서 영생으로 살고 그 받은바 생명으로 구원을 이루는 생활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교회가 그렇게 가야하는 것이요 한사람이라도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인 것이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이 난다고 자기의 영적인 상태나 좌표도 깨닫지 못하고 교회나 크게 해 보려고 하는 정욕으로 하는 일이 잘될 리가 없고 그것은 주님의 일도 될 수 없는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교인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갑자기 교회가 커지고 예배당을 건축을 하고 큰 교회를 목회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만인이 그와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들을까하여 세미나도 참석을 하고 무슨 노하우를 배우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본다. 그것도 헛된 것이다. 요즘 같은 교회현실과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볼 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영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어느 목사가 개인적인 자리에서 교회가 갑자기 부흥하는 교회를 일컫기를 블랙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알다시피 블랙홀은 별을 잡아먹는 굴이요 우주의 구멍이다. 아마도 그 목사의 말과 같이 큰 교회는 영혼들을 돌보지도 못하고 사랑해주지도 못하고 영혼들을 죽이고 잡아먹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교회는 무엇인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할 것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이다.
구한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기도응답이 있는 곳이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단 두세 명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교회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이름에 목숨을 걸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 좌우되는 모임, 주님의 이름을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는 인격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단 두 명이라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이 사람들이 서로 영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곳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회가 영적인 교회요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두세 사람의 목회를 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필요하다. 어떤 큰 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교회 안에 교인들이 삼천 명이나 되지만 그들 가운데 천국에 갈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를 않는다고 그러나 그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는 육신적인 자신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기업인 교회를 생업으로 물려준 사람이 되었다. 어떤 이는 오래전에 훈련에 참석을 하면서 목회를 그만둘 생각을 하면서 교인 중에 주님께 헌신된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도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단 두 명은 고사하고 자기 영혼도 살리지 못하면서 무슨 목회를 하겠는가?

어떤 목사는 시험에 들어서 월요성경학교를 안 나오는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슨 목회를 하겠느냐고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는 나의 권면이 듣기가 싫어서 안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권면해도 싫고 전도를 하라고 권면해도 싫은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겠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오해의 영이 임하여 이 거룩한 모임에서 하나님이 끊어낸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이는 사람의 말을 듣고 거짓에 빠져서 무리에서 나뉘고 자기의 소욕을 좇아 형제들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전도가 문제인가? 아니다.
목회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다.
설교가 문제인가? 아니다.
교회가 문제인가? 그것도 물론 아니다.
지금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자기의 영혼을 돌아볼 때이다.
자기의 영혼이 소생되어야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의 영혼부터 살아야 한다.
자기 영혼이 살기 위해서 살길을 택해야 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9,20).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여야 한다.
일을 택하고 사명을 택하고 교회와 교회 일을 택하는 것도 나중 일이다. 먼저 생명을 택하여야 한다. 생명을 택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요 그 말씀를 순종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 곧 그에게 붙어서 그에게 밀착 곧 착 달라붙어서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 곧 주님을 따르고 좇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기다려 온 거룩한 부흥은 죄나 자백을 하고 간음죄나 자백을 하면서 용을 쓰고 또한 그것으로 논란을 삼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그래서 울고불고 하는 것이 부흥이라면 나는 그와 같은 것을 수천 번 수만 번 경험을 한 사람이다. 그것은 부흥이 아니다. 거룩해지는 것이 부흥이다. 죄를 씻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죄를 고치는 것이 부흥이다. 지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그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중심이 고침을 받고 거룩해지며 그것으로 생활과 인격이 거룩해지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간음죄를 자백하고 음란한 죄를 자백하고 도적질한 죄와 거짓말한 죄를 자백하고 남을 해친 죄를 자백하는 것은 말하자면 잡범의 수준이다.

가인의 살인죄가 큰 죄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행위를 중시하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사상에서 온 것이다. 가인의 살인죄보다 더 큰 죄가 아담의 죄인 것이다. 가인의 죄는 행위적인 죄이지만 아담의 죄는 존재적인 죄이다.

거룩한 부흥은 존재적인 죄를 자백할 때에 오는 것이다.
존재적인 죄를 자백할 때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생활이 시작이 되는 것이요 그 영적생활을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요 그것이 거룩한 부흥인 것이다.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보고 살게 된 욥의 존재적인 죄를 자백함을 들어 보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고난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순전한 사람이요 정직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사는 그와 같은 사람이 이 땅에 다시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통과하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부흥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문제는 욥과 같은 믿음이 없고 욥과 같이 말씀과 고난으로 연단을 받는 사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욥과 같이 믿음으로 연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 존재적인 회개를 함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부흥의 때가 가까이 왔다.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내려가고 애굽으로 가서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빼앗기는 등의 죄를 짓고 행위적인 회개를 많이 했지만 아브라함은 마침내 이삭을 드리는 존재적인 회개를 하고나서야 하나님의 벗이 되어 살게 되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붙는 가운데 “네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를 존재적인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야곱의 벧엘에서 부터 시작되어 밧단아람과 얍복강에서 비로소 존재적인 회개를 하였을 때에 그는 그 형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평안히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요셉의 보디발의 집의 종노릇이나 애굽의 감옥에서의 고난이 그로 하여금 존재적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권인 주권을 믿고 인정하고 고백한 말을 들어 보자.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4-8).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한 것도 존재적인 회개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리요.”라고 부르짖은 탄식도 존재적인 회개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승리의 선언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을 사는 것을 로마서 8장에서 고백을 하고 있다.

성경 66권을 보더라도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를 보더라도 거룩한 부흥은 철저한 자기부정에 들어가는 존재적인 회개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존재적인 회개를 하는 것이 믿음이다. 존재적인 회개 후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부흥이며 안식이다. 이제는 이 부흥이 가까이 왔다. 우리는 교회에 실망하고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목사에게 실망하고 장로에게 실망하고 교단지도자들에게 실망을 하고 교회의 과거에도 실망을 하고 현재에도 실망을 하고 미래에도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 가운데 있다. 아직 믿을 이는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밖에 없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동안 주어졌던 나를 실망시키고 낙심시키는 고난을 충분히 받았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1,2).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이 났다.
이제는 죄악의 사함을 받았다.
이제는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통해 배나 받았다.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때이다.
그 위로가 가까이 왔다.

사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주님의 위로가 오지 않는다면 절망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절망이 될 뿐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도 회복할 수도 없을 것 같은 흑암이 온 교회를 온 영혼들을 누르고 있다. 하루에 42명씩 자살을 해도 그것을 책망하여 돌이킬 교회가 자고 있다. 이혼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면서도 교회는 그것을 고칠 힘을 상실하였다. 기본적인 도덕률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도덕률은 이 땅에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도 불교와 유교로 잘 지켜지던 도덕률이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익이 없어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고통하고 있다.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교인들이, 목사가, 장로가 자기들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하는 존재적인 회개를 하는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다릴 때가 되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는다. 그의 사랑을 믿고 그의 불쌍히 여기심을 기다린다.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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