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사경회를 마치고

 

 

이번 추석사경회는 주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추석이 월요일이라 주일저녁부터 2박3일로 시작된 사경회에는 여름전도여행 때와 같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 찾아 왔다.

 

어떤 목사님은 십년 만에 보는 분이었는데 그동안 너무나도 오고 싶었다고 고백을 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며 왜 이렇게 오래간만이냐고 인사를 했더니 그동안 오고 싶어서 벼르고 별렀는데도 잘 안 되어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와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멀리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왔다.

 

명절 때마다 사경회에 빠지지 않고 오는 한 목사님이 계신데 충청도에서 몸이 불편한 이들을 상대로 목회하시는 분이다. 이번에도 첫날 밤늦게 도착을 하셨는데 아마도 저녁예배를 교회에서 드리고 늦게 오신 것 같았다. 항상 그분들이 오면 오랫동안 씻지도 못한 몸으로 참석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협회사무실을 옮기면서 샤워장을 설치하여 그분들이 오자마자 몸을 씻도록 하여 아무런 문제없이 집회에 참석을 할 수가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헌신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중에 한분은 구십세의 나이에 첫날밤에 숨을 거두고 소천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밤길을 달려와서 몸만 씻고 말씀도 한마디 듣지 않은 채 주님나라로 갔다.

 

그러는 가운데 요한 일서를 가지고 말씀이 시작이 되고 항상 그렇듯이 시간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가운데 요한일서 1장만을 다루었다. 1장의 주제를 “처음처럼 하나님과 함께 살아라.”로 주님이 주신 가운데 참 하나님이신 예수를 보고 듣고 주목하고 만진바 된 신앙생활이 참 신앙생활이요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이시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보고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너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인데 그 사귐이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 곧 천국생활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는 4절의 말씀은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다시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성령을 받아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천국생활을 사는 기쁨이라는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과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어두움이 없는 것과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 거짓된 신앙생활 곧 가짜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도 없고 그 아들과의 사귐도 없으며 성도와의 교통도 없는 그냥 교회만 다니는 종교생활만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요 교회 밖에서 곧 세상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길거리에서 분초마다 주님을 모시고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며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도와주는 것이 교회생활임을 말씀하였다.

 

사도요한이 요한 일서를 쓴 이유는 교회가 생기고 60년 정도 지나면서 백슬라이딩 곧 타락하고 순수성이 없어지며 주님과의 생활이 희박해진 가운데, 성도간의 교제가 사라져가는 가운데, 교회가 세상을 향한 영향력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가운데 교회생활의 참모습을 일깨우고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요한일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와 가르침이 빈번히 있었던 것이다. 요한이 쓴 이 서신서대로 온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초대교회와 같이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하는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 거룩한 부흥의 시작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있다.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나라를 둘째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을 시켜주심으로 믿고 성도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초대교회에는 신앙생활의 내용이 없이 교회만 다니는 껍데기 종교인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어도 날마다 짓는 죄를 없이하고 사함을 받는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순간이라도 마귀의 정죄에 빠져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이다.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그와 같은 죄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인격을 한(恨)하고 그렇게 무질서하고 조절되지 않는 인격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의 말씀으로 통치되고 다스려지고 고쳐지는 인격과 생활로 변화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죄를 씻는 것이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요 죄를 고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교회가 살기 시작하면 교회라는 공동체가 거룩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그 거룩함을 보게 될 때에 전도도 되고 믿고 주께로 무수히 돌아오는 역사도 나타나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교회와 사람들이 전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교회는 문을 닫는 곳이 나타나고 교인들의 숫자도 감소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거룩함을 상실한 타락한 교회 세속화된 교회는 담대함이 없어서 세상이 무섭고 교회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불신자들이 두려워서 전도를 인간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으로 전락을 시키고 세상과 마귀와 타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한 인간의 탐심과 정욕의 도구로 전락을 시킨 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전도는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고 그의 나라가 살아지는 역사가 나타나야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지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내게도 살아지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지 못하고 성령으로 살지 못하는데 누구에게 가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겠는가? 살지도 않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짜전도이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쓰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먼저 말하거니와 복음전도와 상관이 없이 주의 재림을 말하는 이들은 다 잘못된 사람들이다. 날을 말하고 때를 말함으로 교인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도 마귀의 술수이며 사단의 역군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임할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 무슨 권능인가? 나를 다스리는 권능이다. 나와 같이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인격이 성령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내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되고 조절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쳐지고 성령으로 다스려지고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이다. 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 권능인 것이다. 그래야 그 후에 내가 통치 받고 고침 받는 생활을 사는 하나님나라를 남에게 담대하게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복음을 그렇게 전했다. 1975년 12월 1일 직장에 들어가던 날부터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말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변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이십삼 년과 예수를 믿고 나서의 하루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나와 같이 예수를 믿읍시다."

그리고 그 복음은 역사를 했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기 시작을 했다. 그리고 남자 다섯 명으로 시작을 한 직장모임이 오 년 만에 삼백 명이 되었다.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를 살고 인격이 변하고 생활이 고쳐지고 동료들이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만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그것이 성도가 주께 받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요 교회가 세상에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못하고 또 전도를 해도 전도 같지 않은 전도를 하고 인위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또 전도가 안 되고 회심하는 일들이 안 일어나는 것도 이와 같이 한사람의 교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고쳐지지 않았는데 그 교회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을 바보가 세상에 있겠는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은 교회다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이 인증하실 수 있는 교회를 말한다.

주님은 예로부터 그의 성전에 그의 이름을 두셨다.

그러므로 두세 사람의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모인 곳에는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있고 그들 중에 주님이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시는 것이 하나님나라요 교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두세 명만 되어도 그들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인 교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기에 합당한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일을 수행하는 참된 교회인 것이다.

그렇지 못한 교회는 잘못된 교회요 병든 교회요 거짓된 교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변하지 않고는 전도를 할 수도 없고 어떤 일을 또는 무엇을 해도 그것은 전도가 될 수 없고 인간의 노력과 일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처음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생활과 인격 속에 간섭하시고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천국생활을 사는 기쁨이 곧 복음전도의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인 것이다.

 

이제 요한 일서를 통해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사모하고 그렇게 살도록 주님께 간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하나님나라의 부흥이 가까이 온 것을 본다. 이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거룩한 부흥을 기다리는 거룩한 소원을 주심으로 한사람부터 먼저 하나님을 모시고 지금을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사는 부흥이 처처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아멘.

 

 

(*.8.21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