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자식을 바치는 믿음

 

요즈음 한 교회의 세습문제 언론에서 집중보도함으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당사자인 교회는 세습이라는 단어가 김일성 가계에 국한된 단어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듣기 싫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그로 인하여 방송국은 국어사전의 사전적인 의미까지 동원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단은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사회적인 규범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리분별을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저버린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교회의 모습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본인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민주적인 방법으로 되어 진 일이라고 목소리를 내지만 정작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는 말은 일언반구도 못 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일을 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또 늙은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과 독대를 많이 했다는 기이한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개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성도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이 기도하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한 발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하나님을 이용하여 선전하고 홍보하는 악한 일이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이 문제를 잠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나에게 싸우려는 듯이 발언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도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줄 의도를 충만하게 가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아들이 전도사인 그는 아마도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 주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그래서 감리교의 김 아무개 장로교의 김 아무개 목사 등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한 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기준인 것처럼 떠들어 댔다.

나는 그에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창세기 22장의 아케다”(묶어서 바친다는 뜻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를 말해 주면서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아니 물려주고는 그다음의 문제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믿음을 물려 주어야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이 바치는 아버지나 바쳐지는 아들이나 동일하게 헌신된 믿음이 될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족장의 직분을 이삭에게 물려 주도록 하신 것과 같이 먼저 자식에게 믿음을 물려주고 자식과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평신도들까지도 나의 말을 이해했는데 당사자는 끝내 그 말을 수용하고자 아니했다.

 

사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세습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육신적인 혜택이 아니라 고난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아버지와 같은 믿음으로 유업을 이은자들이다. 그러나 사무엘이나 다윗이나 엘리제사장들은 믿음이 같은 믿음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 큰 손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오늘날 교회를 물려주는 일은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도 내가 떠난 후에 일어나기도 했었고 또 주변에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일을 전후해서 교인들이 보는 것은 담임목사의 노욕(老慾)이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일은 주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노목사가 많은 사례금을 받고 은퇴를 하면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것같이 되고 때로는 비참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현직에 있을 때의 경제적으로 누리던 것을 자식을 그 자리에 세움으로 보장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규모가 작은 개척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자식들도 그 희생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위 세습이라는 것은 예산규모가 큰 교회에서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곧 다름이 아닌 금전적인 문제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물질적인 풍요함을 찾아 갔던 롯과 같이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패가망신하고 본인도 망하고 자식도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물질을 더 의지하게 하는 물질우선주의의 우상숭배사상에 들어가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욕이 이제는 사람들, 곧 세상 죄인들에게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교회의 수치가 온 세상에 가득한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이일로 인하여 세상의 여론이 안 좋아서 전도가 안 된다는 망령된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는 정작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전도는 여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종교로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의 전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5)

 

전도는 사람됨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이 그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사람됨의 복음으로 전도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이렇게 세상에서 교회가 저주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일곱 대접의 재앙이다. 둘째대접은 교회에서 나온 재앙이 피가 되어 세상의 영혼들을 다 죽이는 것을 말한다.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16:3)

 

주께로부터 생수를 마시고 살아야하는데 교회가 복음이 없고 복음적인 인격도 없는 교회는 생수가 아니라 마실 수 없는 피를 쏟아 내므로 마시는 영혼마다 죽게 만드는 것이다.

어쨌든 세상죄인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아주 옛날에 목회자훈련을 하면서 말씀을 전할 때에 내용을 주님이 생각나게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오늘날 어떤 아류들은 교회를 자식에게 바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사실 이는 무서운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저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미 귀머거리 독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58:3-8)

 

그들은 입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이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3:4-7)

 

교회 안에는 죄인이 없어야 하는데 오늘날은 교회 안에 의인을 찾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 안에는 짐승이 없어야하는데 오늘은 들짐승으로 가득한 세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두려움이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는 흑암 속에서 빛을 구하여야 할 때이다. 강단에서 생수가 없고 오히려 영혼이 마실 수 없는 피 같은 설교가 흐르는 속에서도 우리는 생수를 구하여야 할 때이다.

세습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이다.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면 온 세상의 노인들이 노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

지금은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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