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 미치지 않는 교회

 

온 세상에 재앙이 임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이 무서운 재앙은 이제 바야흐로 국지적인 전염병(epidemic)에서 전세계적인 전염병(pandemic)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어리석은 죄인들은 이병이 어디로부터 왔느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대응의 자잘못부터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인 수명 연장을 위하여 이전염병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떠 넘기고 자기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전가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들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간사하고 다 거짓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나타는 것이며 이와같은 재앙은 각사람이 죽음후에 받을 심판의 그림자이며 이세상의 모든 것이 끝날 때에 받을 최후의 심판의 기준을 그 일부분만을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그의 맹렬한 진노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때에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살고 그의 말씀에 거역하여 살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는 것도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사람들에게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곧 회개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전적고도 일방적인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여 고침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들은 그냥 멸망가운데로 들어가며 그대로 죽어서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은 내가 과연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안에는 그들의 출처가 어딘지 또 어떻게 교회안에 들어 와 있는 지를 알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13: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13: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알지 못하노라우 에이도인데 에이도는 부정사완료동사로서 과거에 죽 진행이 되다가 지금 막 완료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가 누구인지를 과거로부터 주욱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마태복음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의 도무지 아니라는 우데포데로서 어느 때도 아닌, 절대로 아닌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그리고 알지기노스코인데 안다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아는 친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의 시제는 부정과거 곧 에어리스트 시제로 과거에 단번에 완료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제대로 번역을 하면 너희는 나하고 전혀 친했던 적이 없었잖아라는 뜻이 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현재분사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곧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과거에 한번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참으로 구원을 받은 진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피차에 가짜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곧 열매로 진위를 알아 보는 것입니다. 항상 변함 없이 꾸준히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임이 틀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외모로는 그럴싸해 보이고 입으로는 청산유수같이 말을 해도 열매가 없는 사람은 조심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주의 제자들이 주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13: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적으니이까올리고스로서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의 없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을 보면서 구원받을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힘쓰라아고니조마이인데 이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싸우고 투쟁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말은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되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떤 환난이 와도 전혀 두려워 하지않는 것은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받았으며 빼앗기지 않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영생을 얻은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징계는 있지만 저주도 심판도 다 지나간 것입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우리가 받은 저주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로부터 말미암는 재앙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비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염병이 유행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육체가 안전히 거하는 것입니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16: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그이유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항상 주를 모시고 주와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감정과 상관이없이 주님은 항상 내안에 거하시고 나도 주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주께 받은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하늘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오늘도 이땅에서 사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요 그것이 참된 교회생활이다. 그래서 이찬송을 입으로가 아닌 생활의 간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게 사는 사람은 주님이 모든 위경에서 건져 주십니다. 모든 대적의 손에서도 건져 주시고 모든 질병과 가난으로부터도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중에 고난도 많고 사고도 질병도 우환이나 우고도 많은 것은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을 모시고 하늘나라의 생활을 사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런 믿음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없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구원은 받았으나 잘못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생활을 살고 교회에 와서는 교회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중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수 없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며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은 얼씬도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백성들중에서 끊어졌으며 이방인들과의 교제는 불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사는 교회생활을 잘 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든 전쟁과 기근과 질병으로부터 막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동일한 제사와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은 진노 하심으로 그들을 칼에 붙이시고 염병과 기근에 붙이심으로 끝내 그들을 멸망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신약교회도 구원받은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그와같은 교회를 세우실 것을 이사야는 미리 봄으로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26: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구원을 성과 곽으로 삼은 교회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굴을 들이 밀수 없습니다. 이사야와 같이 스가랴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신약교회를 이렇게 미리 보고 말했습니다.

 

(2: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서 모든 원수와 대적하는 자들과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주시는 교회가 신약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대하여야 합니다. 구원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구원이 말하여지지 않는 곳도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교회안에서도 구원받은 사실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고 구원받은 것을 감추고 살도록 은근히 강요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할수 없는 종교적인 조직이며 인간들의 집단일 뿐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종을 이루고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똑같은 말을 하며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교회라고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기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주무대가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믿음이 있는것처럼 보이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는 그와는 다른 생활을 사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일을 열심히 한다고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 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라고 무턱대고 기뻐하시는 소경이 아니십니다. 장로라고 무조건적으로 기뻐하시는 바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염병에서도 제외시켜 주시고 전쟁과 기근의 두려움이나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어리석게도 노아의 언약을 무지개 언약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게 되면 그런 그들의 어리석은 말에 동의할수 없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노아와 세운 언약이 아닙니다. 무지개의 언약은 노아의 가족들과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그들과 함게 한 모든 생물들 곧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들과 세우신 영원한 언약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9:10)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9: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9: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9: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9: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노아와 세우신 언약은 무지개 언약이 아니라 방주의 언약입니다.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6: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그런데 방주의 언약은 영생의 언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언약입니다. 노아가 믿고 의인이 되었던 영생의 언약은 그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여자의 후손의 언약입니다. 후손”(제라 아하르)의 언약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 된 것은 이 후손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후손의 언약을 믿는 노아의 가정을 방주의 언약을 믿게 하심으로 방주로 들어 가게 하시고 그들을 홍수로부터 건져 주신다. 그 구원은 방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후손의 언약을 믿는 의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교회생활을 시작할 때에 홍수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방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은 영혼이 아니라 그들의 육체 이었습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면 육체의 모든 위험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시편 16편의 말씀에서와 같이 다윗은 육체가 안전히 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교회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우편에서 그를 책임지심으로 아무일에도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같이 방주의 언약에 순종하여 교회생활을 함으로 홍수로부터 건짐을 받았음과 같이 또 다윗이 주를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참되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함으로 그의 우편에 계신 하나님이 그를 항상 도우셨던 것과 같이 귀하고도 귀한 교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땅의 모든 죄인이며 악인들이 받는 진노의 모든 재앙을 비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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